소녀. 얌전하거나, 재수없거나?!

얼마 전 SNS를 중심으로 유명세를 탔던 영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P&G사의 여성용품 브랜드 Always가 내놓은 2015 슈퍼볼 광고입니다 

 

이 광고는 칸 광고제에서 PR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한 Like a girl 캠페인의 일환으로, ‘여자애 같다’는 조롱조의 관용어에 내재된 편견을 재치 있게 다뤄 많은 지지를 얻었습니다. 영상에서 여자아이처럼 달리거나 싸워보라는 요구에 남성이나 소녀가 아닌 여성은 희화화된 동작을 취합니다. 두 팔을 흔들며 뒤뚱뒤뚱 뛰거나 손톱을 세워 할퀴려 드는 그들의 모습은 모니터 밖의 우리도 흔히 머릿속에 떠올리는 전형적인 소녀상입니다. 이는 육체적으로 나약하고 보기 민망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우며 최선을 다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주죠. 하지만 ‘진짜 여자아이’들은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소녀들은 ‘여자애처럼’을 그저 자기답게 최선을 다하라는 말로 받아들여, 달리라면 열심히 달리고 던지라면 힘껏 던졌습니다. 두 집단의 선명한 대조를 통해 Like a girl 캠페인은 “여자아이처럼 행동한다”는 말에 내포된 빈정거리는 뉘앙스가 그 말을 듣고 자란 소녀들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성 역할 고정관념을 강요할 수 있음을 폭로합니다.

소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건 언어 뿐만이 아닙니다. 애니메이션도 ‘소녀’에 관한 고정관념을 재생산합니다. 조금씩 개선되고는 있으나 국내에서 발간 혹은 방영되는 만화에 등장하는소녀 캐릭터는 여전히 ‘예쁘게 꾸민 모범생’의 전형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따금 제작자들은 얌전한 해어화 (解語花)1)편집자 주: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의미로 양귀비를 이르는 말이었다. 여기서는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아름다운 여자들을 이르는 뜻 아니면 재수 없는 알파걸 외에 다른 여자 캐릭터를 만들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허허 웃는 할아버지 박사님이 등장하고 바보스럽거나 촐싹거리는 남자아이와 대개 새침하고 똑소리 나게 행동하는 여자아이가 대비되며 교훈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도, 학습만화를 부지런히 읽어 왔던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가요? 얌전하고 방정해야 할 여자아이가 덜렁거리다가 실수를 하고 혼쭐나는 장면은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멍청한 잘못을 저지른 남자아이에게 혀를 차며 면박을 주는 여자아이는 금세 떠올릴 수 있지만요. 여자아이들은 만화 속에서조차 활발하게 설치고, 떠들고, 생각할 수 없는 걸까요?

멍청한 철수에게 면박을 주는 영희

나의 픽사 여캐는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끝내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픽사는 초창기부터 매력적인 소녀 캐릭터를 만들어 왔는걸요. <인사이드 아웃 (2015)>의 주인공 라일리는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닙니다. 물론 픽사가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 건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 최초로,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하지만 초기작부터 픽사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상당히 진보적으로 그려졌습니다. 디즈니 프린세스나 바비 인형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그들은 모험의 주체로서 남자 주인공과 비등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충분히 고유의 매력을 어필합니다.

그럼 한 번 짚어봅시다. 먼저 픽사의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벅스 라이프 (1998)>의 개미 공주 아타와 도트를 들 수 있겠네요. 아타 공주는 비록 플릭의 거짓말에 감화된 것이 계기였으나, 오랜 식민지 생활로 노예 근성에 젖어 있던 개미 왕국을 독려하며 메뚜기에게 앞장서 맞섬으로써 개미 여왕으로 거듭납니다. 일종의 걸스카우트인 블루베리단을 이끌며 플릭을 전력으로 돕는 도트 공주는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보통 ‘성장’ 속성은 철없는 남자 주인공에게 부여되기 마련이지만 ’벅스라이프’에서 그러한 속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건 두 공주 개미였습니다. 개성 있는 초능력으로 십분 활약하는 히어로 가족이 등장하는 <인크레더블 (2004)>의 예민한 사춘기 딸 바이올렛도 이들처럼 작품 내에서 가장 많이 성장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런가 하면 엄마 헬렌은 왕년에 현역 히어로로 뛰던 시절, 본인의 기량이 뛰어나기 때문에 가정에 안주해서 세상을 구하는 일을 남자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발언을 한 적 있지요 2)주: 원문은 settle down, are you kidding? I’m at the top of my game! I’m right up there with the big dogs! Girls, come on. Leave the saving of the world to the men? I don’t think so!.

남자들 꺼져 여기서부턴 내가 조진다

남자들 꺼져 여기서부턴 내가 조진다

픽사의 간판 작품인 <토이 스토리>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겠죠. 1편 (1995)의 유일한 메인 여성 캐릭터 보는 우디의 현명한 애인 수준에 머무르지만 2편 (1999)부터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제시와 포테이토헤드 부인같은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가 활약하기 시작합니다. 말괄량이 카우걸을 콘셉트로 디자인된 제시는 모험 시에 제 몫을 거뜬하게 해내는 것은 물론, 리더인 우디에게도 이견이 있으면 당당히 맞섭니다. 예컨대 3편 (2010)에서 앤디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우디에게 반대해 Sunnyside 탁아소에 남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녀였죠. 포테이토헤드 부인에게는 다소 경망스러운 아줌마의 특징과 문제 해결의 열쇠가 동시에 주어집니다. 앤디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오해를 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식입니다. 또한 제시의 회상에 잠시 등장하는 그녀의 전 주인 에밀리는 카우걸 복장을 하고 밖에서 뛰어 노는 것을 좋아하는 소녀로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리의 전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느낌이 겹치죠.

한편 픽사의 그녀들은 최고의 조력자로서 어떤 때는 남주인공보다 더한 활약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니모를 찾아서 (2003)>의 도리는 아들바보 말린이 니모를 찾는 데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주었으며 작품의 주제의식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3)2016~2017년쯤에 개봉이 예정돼 있는 스핀오프 작품 <도리를 찾아서>에서는 무려 단독 주인공으로 승격되기도 했습니다. <라따뚜이 (2007)>의 콜레트는 또 어떤가요. 초반에 본인 입으로 말하듯 체력이나 서열문화가 중시되는 남성 중심의 요리사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은 독종입니다. 링귀니가 구스토 레스토랑을 물려받은 이후로는 이 무능력 찌질이를 대신해 요리사들을 지휘하는 등 실질적인 셰프라 볼 수 있고요.

라일리는 홀로 라일리, 소녀는 홀로 소녀다

이처럼 픽사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남주인공과 연애 플래그를 세운 뒤 급속도로 비중이 줄거나 DID4)damsel in distress, 도움이 필요한 여자로 전락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적 매력만 강조된 팜므파탈이나 쓰러뜨려야 할 마녀 같은 모험의 객체도 아닙니다. 그녀들은 그녀들만의 개성으로 오롯이 빛납니다.

 

남주인공의 연애 대상도

섹슈얼한 팜므파탈도

쓰러뜨려야 할 악인도 아니다!

단순히 톰보이처럼 옷을 입는다고 해서, 격렬한 스포츠를 즐긴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소녀 캐릭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건 ‘남자가 한다면 여자도 할 수 있다’는 우격다짐에 가깝습니다. 그런 평면적인 접근은 여전히 고정관념이 내재되어 있어 멀쩡한 캐릭터도 우스꽝스러운 흉내쟁이로 만들어 버리죠. 가령 <드래곤 길들이기> (드림웍스)의 아스트리드는 독보적인 전투 실력을 가진데다 예뻐서 마을 남자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소녀입니다. 학습만화에 곧잘 등장하는, 너무 완벽해서 어색한 홍일점 여주인공 같지요. 예능에 여성 게스트가 나오면 호들갑을 떨며 꽃가루를 뿌리고 핑크빛으로 도배하며 칭찬하는 모습을 볼 때의 위화감과 비슷합니다. 게다가 까칠하고 기 세던 그녀가 남주인공 히컵과 사랑에 빠져 부드럽고 연약해지는 성격 반전의 클리셰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아스트리드에게 전형적인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한 남성성과 여성성을 무리하게 모두 구현하려는 드림웍스의 시도는 촌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슈렉> 시리즈의 피오나 공주도 디즈니 프린세스를 외모 면에서 비트는 데는 성공했지만 속편부터는 줄줄이 망작이기도 했고 많이 아쉬운 행보를 보였습니다.

픽사의 여성 캐릭터들은 설치고, 생각하고, 떠듭니다. 남자 캐릭터 사이에 홍일점으로 끼어 고명으로 취급되지도 않고 인간미 없는 완벽녀도 아니며 이야기에서 수동적으로 소비되지도 않습니다. 그녀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장하거나 결정적인 조력자가 되는 등 행동 반경이 넓지요. 그저 정수기 물통을 잘 가는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어쩔 때는 사고도 치고 잘못도 저지르며 성장하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입니다. 이런 경향이 점점 강해져서 마침내 주인공 자리를 꿰차는 데에 이른 것입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 (2012)>이 그다지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 건 낮은 완성도도 그렇지만 과도기의 작품이라 주인공으로서 메리다의 포지션이 미묘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나온 끝판왕 라일라!

그래서 나온 끝판왕 라일리!

하지만 픽사는 그간 꾸준히 쌓은 경험치와 메리다의 실패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 공들인 <인사이드 아웃>에서 이름, 옷차림, 취미는 물론 머릿속까지도 다채로운 색깔로 칠해진 매력적인 소녀 라일리를 만들어냈습니다. 픽사가 해냈다, 해냈어! 아이스하키를 잘하고 원숭이 흉내를 내며, 엄마의 카드를 훔쳐 가출을 감행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니콘을 좋아하고 막연히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남자친구상을 품고 있는 여자아이,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분노와 소심이는 남성, 기쁨, 슬픔, 까칠이는 여성으로 묘사됩니다. 이미 감정들의 성별이 하나로 통일된 어른들이나 이성에 일찍 눈뜬 남자아이와 달리, 라일리는 장차 어떤 나무로 자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가능성을 품은 떡잎 그 자체입니다. 소녀적인 감성이 제거되거나 그에 매몰되지 않은 채 라일리가 홀로 라일리인 것, 그것이 <인사이드 아웃>이 성취한 모든 미덕 중에서도 최고라 할 수 있겠습니다.

 

편집 및 교정 / 혼세

글 / 가시

   [ + ]

1. 편집자 주: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의미로 양귀비를 이르는 말이었다. 여기서는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아름다운 여자들을 이르는 뜻
2. 주: 원문은 settle down, are you kidding? I’m at the top of my game! I’m right up there with the big dogs! Girls, come on. Leave the saving of the world to the men? I don’t think so!
3. 2016~2017년쯤에 개봉이 예정돼 있는 스핀오프 작품 <도리를 찾아서>에서는 무려 단독 주인공으로 승격되기도 했습니다
4. damsel in distress, 도움이 필요한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