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심심하고… 심심해요

친구와 나는 애주가다. 워킹을 오기 전에도 ‘야, 퍼스에 놀 거 없대. 한국에서 다 놀고 가자’며 우리의 주 근거지였던 안암은 물론 홍대와 강남을 쏘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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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슈퍼바이저는 가끔 일이 끝나고 이렇게 맥주를 돌렸다. 우리는 두세 캔씩 집어왔다.

기분 좋은 날엔 기분이 좋다고 술, 스트레스 받는 날엔 스트레스 푼다며 술, 비 오는 날엔 비오니까 막걸리! 라며 술, 날 좋은 날엔 한강 치맥이지 하며 술 마시는 이유도 다양했다. 이미 치솟을 대로 치솟은 앵겔지수의 반 이상이 술값이리라. 이런 데만 머리가 발달한 우리였으니.

전 편에 말했듯 퍼스는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농사일에 종사하기 때문에 생활 패턴이 빠른 편이다. 사실 이건 도시 호주인들도 그렇다. 타운의 펍은 오후 4시부터 맥주를 찾는 사람들로 붐볐고, 일반 가게들은 6시면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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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밖에서 맥주를 마시려면 한 잔에 10불을 넘어 가는데다, 타운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30분이나 됐기에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도 문제였다. 차가 없던 우리는 장을 보거나 멀리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방1의 종화오빠에게 리프트를 부탁했다. 매번 차를 얻어 타는 게 염치없긴 했지만 양손에 비닐봉지를 든 채로 30도를 육박하는 더위를 뚫고 올 자신이 없었다. 문을 똑똑 두들기곤 오빠~^.^ 우리 마트 갈 건데 같이 갈래? 하면 오빠도 장바구니와 차키를 들고 나섰다. 우리 둘 모두 처음 오빠들의 방문을 두드릴 땐 서로 네가 하라며 미뤘지만 두어 번 하다 보니 저것도 익숙해지더라. 인간은 생존과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렇게 오빠들과 함께 장을 보러가는 날이면, 우린 마트 옆에 딸린 리쿼샵1)호주에서는 일반 마트에서 술을 구매할 수 없다. 따로 위치한 liquor shop에서 구매해야한다에서 맥주를 한 박스씩 사다 들였다. 말이 한 박스였지 둘이 마시면 일주일도 안 되어 동이 났다.

술인지 물인지..

술인지 물인지..

그런 다음날이면 우린 백팩 가득 맥주와 안주거리를 채워 낑낑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물론 우리가 공으로 차를 얻어 탄 건 아니다. 흡연자였던 오빠에게 보답의 의미로 담배를 문 앞에 걸어두곤 했다. 여긴 담배 값이 금값이니까. 한 갑에 20불이나 되었다.

남쪽 세상의 밤하늘

집에는 두 대의 자전거가 있었다. 우리의 애마였다. 자물쇠조차 없는 자전거를 끌고 하이웨이를 달려 타운으로 나다녔다. 날은 더웠지만, 자전거를 타며 맞는 바람은 꽤나 선선했다. 마가렛리버는 별이 많은 도시였다. 은하수가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별이 무수했다. 해가 진 후, 밤하늘을 보며 달리는 하이웨이가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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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라도 한잔 걸치고 오는 날이면 꼭 별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별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친구와 나는 집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는, 와인잔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잔디밭에 누워 와르르 쏟아지는 별들을 마주했다.

와, 별 진짜 많다.

나 여기 와서 평생 별 볼 다 보고 가는 것 같아.

근데 진짜 신기하지 않냐. 이거 남쪽 하늘이잖아. 한국에 있었으면 평생 못 봤을 건데.

어, 그렇네. 그럼 북두칠성도 없나?

엉. 대신 남십자성 있대.

저건가? 저기 제일 밝은 거.

오, 그런 듯. 쟤만 제일 밝아.

집 안에서 누구의 미래가 더 암담하나 내기하던 우리는 금세 밝아졌다. 남십자성 덕이었다. 남반구 하늘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호주에 오지 않았더라면 과제에 찌든 채, 가로수를 별빛 삼아 귀가하고 있을 터였다. 지구 반대편에도 하늘은 있고 그 아래에도 사람은 사는구나, 새삼스레 깨달았다. 문득 이 세상 하늘 다 보고 죽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안 가던 도서관 리뷰.txt

집에서 타운까지 가려면 도보로 30분, 자전거로 15분. 쉐어하우스에는 인터넷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와이파이를 이용하려면 타운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차가 있는 오빠들은 근교 여행도 다니고, 비치도 자주 나다녔지만 믿을 거라곤 튼튼한 두 다리밖에 없던 우리는 타운의 도서관을 애용했다.

도서관은 회원에 한하여 하루에 2시간 무료로 와이파이 서비스를 제공했다. 호주의 인터넷 서비스는 대부분 이랬다. 도서관을 가도 몇 시간, 카페를 가도 몇 시간, 심지어 집에서도 종량제 인터넷을 사용하더이다. 게다가 속도는 더럽게 느렸다. 0.5kb/h라는 속도를 난생 처음 봤다. 도서관 와이파이로 한국 예능 하나 다운받으려니 대기시간 2주일이 뜨기에 바로 중지 버튼을 눌렀다. IT강국에서 온 나에게는 적잖이 당황스러운 문화였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우린 답을 찾을 거라고.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속에서 살던 우리는 모니터 밖으로 나오기로 했다.

도서관의 크기는 상당히 작은 편이었지만 없는 게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디비디, 각종 CD자료, 퍼즐, 보드게임 등 모두 대여가 가능했다. 일이 끝나고 시간이 비는 날이나 주말이면 우리는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퍼즐을 했다. 이러니 한국에서 가져온 옷들은 죄다 소용이 없었다. 여기서 입는 옷이라곤 츄리닝 반바지와 반팔티, 이따금 후드티와 가디건이 전부였다. 천 피스짜리 퍼즐을 맞추면서도 야, 근데 우리 지금 꼴 되게 너드(nerd) 같지 않냐, 킬킬거렸다.

나?

나 불렀니?

왜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친구를 두고 나 혼자 마트에 장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물과 과자 따위를 골라 계산대로 향하는 나를 붙잡은 건 웬 한국인이었다. ‘저 한국인 맞으시죠?’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와 그보다는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남자. 자신들은 마트 맞은편 펍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창 밖으로 내가 슝 지나갔댔다. 자전거를 타고서. 너무 예뻐서 이 다섯 글자를 타이핑하는 내 손이 오그라드는 건 왜일까 쫓아왔다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기들 일하는 펍에 오지 않겠냐고.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생각해보지도 않고 ‘죄송합니다’만 연발하는 나였다. 워낙 세상이 흉흉하니까. 아빠가 호주가기 전에 딱 한 가지만 명심하랬다. 한국에서 하지 않을 일은 호주에 가서도 하지 않기. 그래서 난감한 얼굴로 눈동자만 뱅글뱅글 돌렸다. 여자는 한국인 진짜 오랜만에 만나서 그래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근데 누구 닮으셨단 말 많이 들으시죠! 아이유 닮았는데!! 아하하, 아니에요,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을 따라갔다. 아이유를 닮았다는 말 때문은 절대 아니고.

편집자 : ?....

편집자 : ?….

여자는 자신을 하리라고 소개했다. 나와 동갑이었고. 이쪽은 써니 오빠! 발랄하게 남자의 몫까지 대신했다. 그들이 일하는 펍은 꽤나 컸다. 친구와 별 생각 없이 지나다니던 곳이었는데, 알고 보니 서호주뿐만 아니라 호주 전역에서도 유명한 펍이었다. 우리 뒷자리에 앉은 노부인은 이 펍에 오려고 무려 영국에서 왔다고. 처음에는 한 두 시간만 잠깐 자리를 지키다 나올 요량이었는데 술이 들어가다 보니 그 자리가 즐거워졌다. 하리의 아이유 언급에 이어 성격도 좋고 첫인상이 좋아 보인다는 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내향적이고 남에게 무관심한 성격 탓에 2n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류의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써니오빠와 하리와 함께

써니오빠와 하리와 함께

퇴근을 한 펍 직원들까지 함께 어울려 놀았다. 왁자지껄. 내가 싫어하는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기억이 나쁘지만은 않다. 써니오빠와 하리는 내가 퍼스에 올라온 후에도 종종 연락을 해왔다.

쏟아지는 별빛 아래 함께

하루는 영화를 보려고 했다. 근처 vineyard에서 야외 영화 상영을 한다는 현수막을 본 우린 당장에 종화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보러 갈래? 어디서 하는데? 타운에서 차타고 5분! 몇 시에 하노. 상영은 7시고 입장은 6시부터래. 그래. 캄 집에 왔다가 같이 가자. 신나는 마음으로 마트에 들러 주전부리를 골랐다. 감자칩과 젤리, 담요 등 완벽한 준비를 한 우린 오빠의 차를 탔다. 빙빙 주변을 한참 돈 후에야 겨우 상영장소를 찾았지만, 날씨가 좋지 못한 까닭에 금일은 영화 상영을 하지 않는다는 팻말만이 우리를 반겼다. 배고파. 빡쳐. 짜증난다. 우울한 얼굴로 감자칩을 뜯었다. 와그작 와그작, 과자를 씹는 우리에게 오빠가 제안했다. 그러면 버셀톤 갈래? 버셀톤은 마가렛리버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해안도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온 수상기차의 모티브가 된 제티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흔들려보이는 건 기분탓..

흔들려보이는 건 기분탓..

딱히 할 것도 없는 우리는 고갤 끄덕였다. 차는 직선도로를 달렸다. 도로의 오른편으로는 막 해가 떨어지고 있었고 왼편에는 푸르스름한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밤바다는 어쩐지 썰렁했다. ㄷ자형 제티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뻗은 직선 제티. 직선 제티의 초입에는 기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낮 시간에만 운영하는가봐. 가로등이 펼쳐진 제티에게서 등을 돌려 ㄷ자형 제티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 제티 위를 걷다가 내가 제안했다. 야, 여기 누워보자. 우리 셋은 나무로 된 제티 위에 드러누웠다. 갈매기의 하얀 배설물이야 아무렴 어때. 등 아래로 파도가 소리쳤다. 눈 앞에는 별빛 문양을 수놓은 이불이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하늘과 맞닿은 가슴이 두근댔다. 오리온 자리는 북반구에서도 볼 수 있고 남반구에서도 볼 수 있는 별자리래. 그래? 어딨는데? 음… 같이 찾아보자. ㅋㅋㅋㅋㅋㅋㅋ그래. 저거 남십자성 아이가. 어어, 맞는 거 같다. 제일 밝네. 얘들아, 근데 여기 센과 치히로? 그거 맞나. 여튼 거기에 나온 데라 카드라. 아, 진짜? 이런 장면이 있었나. 어, 감독이 여기 왔다가 영감 받았다 하대. 오, 나중에 영화 다시 봐야겠네. 누운 채로 젤리를 나눠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지금껏 무엇이든 혼자서 하는 게 멋진 줄만 알았다. 혼자 해서 즐거운 일도 있지만 우리라 더 즐거운 일도 있다. 별이 쏟아지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진짜 행복하다. 죽을 때 이 기분이면 좋겠어. 처음으로 함께라서 즐거웠다.


본 글의 제목은 다음카페 ‘여성시대’의 게시판 이름을 따왔습니다.

편집 및 교정/ 커밋

글/ 가오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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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주에서는 일반 마트에서 술을 구매할 수 없다. 따로 위치한 liquor shop에서 구매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