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쉐어하우스, 포도따기

쉐어하우스에는 총 일곱명(중간에 잠깐 여덟명이 되었지만)이 살았다. 쉐어 마스터 커플과 남자 둘씩. 그리고 우리. 아, 강아지 보리도.

멍!

보리 잠오개..

마가렛리버에 도착한 첫날부터 우리는 지현이1)이제 공개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나와 함께 기나긴 여정을 떠나게 된 친구의 이름이다.가 캐리어에 고이 모셔온 팩소주를 깠다. 농장일이 새벽 일찍 시작하고, 오전 중에 마치기 때문에 오후에 매일 이렇게 바베큐를 하거나 밥을 먹으며 반주를 하는 게 일상이랬다. 마스터 언니는 나와 이름이 같았다. 처음 카톡으로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흥은 지현이가 소주를 꺼내자 아주 폭발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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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어식구들 중 그 날 저녁식사를 함께 한 건 마스터 커플과 지후오빠 뿐이었다. 방 1을 쓰는 지후오빠와 종화오빠는 한국에서 함께 호주를 온 절친한 사이였다. 출신 지역에 따라 사람 분류하는 걸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둘은 정말 ‘부산 사나이’다웠다. 말수는 별로 없고, 무뚝뚝한 듯 보이지만 가끔씩 무심하게 챙겨주는 츤데레의 정석인 경상도 남자, 랄까? 그리고 며칠 뒤, 방 2에 동현오빠가 들어왔다. 오빠는 뉴질랜드에서 워홀을 하다가 호주로 넘어왔댔다. 우리처럼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농장에 온 케이스였다. 방 1의 부산 사내들은 26살 동갑내기 친구였고, 방 2의 구뉴현호(구 뉴질랜드 현 호주 워홀러)는 우리보다 6살이 많았다. 이제 만 1살이 된 보리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막내인 셈이었다. 가끔씩 인스타그램에 집 식구인 오빠들 차 타고! 하는 글과 함께 사진을 올리면, 친구들이 물어왔다. 야, 룸메이트처럼 서강준이나 찬열 같은 남자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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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남자라고 다 휴잭맨이나 히스레저 같은 거 아니잖아요. 영국 남자 다 콜린 퍼스 아니잖아요. 마른 루니, 키 큰 루니, 안경 쓴 루니, 옷 잘 입는 루니잖아요. 대학에 송중기 같은 선배 없잖아요. 마른 최효종, 키 큰 최효종….(눈물을 훔치며 뒷말을 생략한다) 물론 오빠들과의 생활도 즐거웠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천피스짜리 퍼즐을 밤새어 맞추고, 주말 아침에 뒹굴거리다 같이 설국열차 보는 그런 류의 아주 건전한 즐거움 말이다.

포도야 포도야~

포도 농장들은 피킹 시즌을 맞이했다. 청포도와 적포도가 주렁주렁 나뭇가지에 늘어져있었고, 우리는 포도따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역을 옮기자마자 바로 일을 하게 되다니.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시즌을 잘못타면 한두달씩 기다리기도 했다. 에이전시에 이름을 올려놓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거다. 혹은 그날 티오가 나지는 않을까, 엑스트라로라도 일을 하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에이전시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농장에서의 하루는 새벽 5시에 에이전시 앞에 모이는 것으로 시작됐다. 조별로 10분씩 시간차를 두고 모였다. 각 조마다 맡는 빈야드(vineyard)가 다르고, 하는 일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새벽조가 피킹을 하면, 오전조는 피킹한 상자를 수확하는 식이었다. 마가렛리버 타운에 위치한 에이전시와 농장들과의 거리가 꽤 되기 때문에 농장일을 하는 데에는 차가 필수적이다. 에이전시 스태프들은 각 조 명단에서 차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했다. 강제 카풀 시스템을 적용하기 위함이었다.

왕복 14불에 5명이 한 차를 타고 농장으로 간다. 배치된 조의 멤버 구성은 매번 비슷비슷했다. 20명 정도가 한 조를 이루고, 그 날 할당받은 빈야드를 끝내면 해산한다.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은 날에는 11시쯤 마치고, 스태프들마저 ‘big picking day!’라며 혀를 내두른 날엔 2시, 3시가 되어 마치기도 했다.

오후시간을 활용하기엔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농장일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능력제라는 데 있었다. 포도 한 버켓을 채우면 1.8불에서 2.5불을 받는다. 처음 일을 시작한 날, 나는 7시간을 일하고 고작 30버켓을 채웠다. 최저시급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확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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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기 전까지는 선선해서 일을 할 만 했다. 문제는 해가 뜬 후였다. 12시가 넘어서까지 일을 하는 날이면, 모자와 고글(나뭇가지에 눈이 찔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착용해야함) 아래로 땀이 흘렀다. 심지어 우리가 입은 옷은 긴팔과 긴바지였다.

살이 타는 것을 방지하고, 나뭇가지와 벌레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야했다. 그 대신 얻은 건 땀줄기였다.

농장의 사람들

내가 농장에서 일한다는 걸 아는 몇몇 친구들은 ‘흔한 호주 농부들’ 같은 게시글에 나를 태그하곤 했다. 물론 저렇게 잘생기고, 몸 좋은 농부가 옷까지 벗고 일하진 않지만, 가끔 다른 조와 일을 할 때면 눈호강을 할 수 있었다. 몸에 빨래판이 새겨진 남정네들이 웃통을 벗은 채, 주차장에서 샤워를 한다거나, 라틴계 남정네들이 우르르 지나갈 때면 우린 그들이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함에 감사했다.sdfzd

와, 쟤넨 무슨 땀을 저렇게 흘려도 존잘이냐.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꽁지머리 아래로 흐르는 땀마저 섹시했다. 옷은 불편하지도 않은지, 민소매와 청반바지를 입고 일을 했다. 주머니에 꽂은 스피커에서는 EDM이 흘러나왔고, 그들은 비트에 맞춰 피킹을 했다. 그런 거 여자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면 아주 크나큰 오예에요, 오예.

조 편성은 매일 달라졌지만, 멤버 구성은 비슷했다. 우리 조에는 동양인이 많은 편이었다. 대만에서 온 자매는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홍콩에서 온 친구들도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우리가 코리아에서 왔다는 것을 듣자마자 아이 노 김종국! 김수현! 이종석! 을 외쳐댔다. 이곳에 와서 놀란 사실은 아시아권에서 런닝맨의 인기가 생각보다 어마무시하다는 것과 웬만한 아시아인들은 한국인을 우호적으로 생각한다는 거였다.

일본인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드라마와 예능, 아이돌이라는 주제로 웬만한 아시아권 사람들과는 한참 동안이나 수다를 떨 수 있었다. 한국인도 간혹 보였다. 농장일을 하는 한국인들의 9할이 세컨비자2)호주를 제외한 워킹 홀리데이 협정을 맺은 국가들 모두 워홀러들에게 1년 간의 체류만을 허가함. 호주의 경우 농장이나 공장 등의 일터에서 88일을 일하게 되면 세컨 비자를 발급, 2년까지 체류할 수 있도록 함를 따기 위해 왔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도 안 되는 농장에 남아있는 건 그 88일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우리처럼 ‘고생하러’ 농장에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것도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막차를 타고 왔고3)제한나이에 맞추어 워홀 오는 걸 더러 막차 타고 온다고 표현한다, 웬만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손윗사람이었다. 이 곳에서 22살은 어딜가나 어린 나이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청춘이었으며. 서울에서 8천키로가 떨어진 이곳에 와서야 그걸 깨달았다.


본 글의 제목은 다음카페 ‘여성시대’의 게시판 이름을 따왔습니다.

편집 및 교정/ 커밋

글/ 가오나시

   [ + ]

1. 이제 공개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나와 함께 기나긴 여정을 떠나게 된 친구의 이름이다.
2. 호주를 제외한 워킹 홀리데이 협정을 맺은 국가들 모두 워홀러들에게 1년 간의 체류만을 허가함. 호주의 경우 농장이나 공장 등의 일터에서 88일을 일하게 되면 세컨 비자를 발급, 2년까지 체류할 수 있도록 함
3. 제한나이에 맞추어 워홀 오는 걸 더러 막차 타고 온다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