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쉬리>

어느덧 ‘너희가 90년대 영화를 아느냐’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이 시리즈의 프롤로그 편을 잠시 떠올려보자. 생각이 안 나면 찾아가서 보고 오면 된다. 90년대의 영화 중흥은 <사랑과 영혼>으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직배 영화의 공습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영화 제작사들이 생겨나고, <결혼 이야기>같은 기획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동방불패>와 같은 홍콩 무협영화들은 점차 세력이 줄어들었고 <펄프픽션>, <중경삼림>과 같은 세계에 통하는 작품이 오히려 인기를 끌었다. 할리우드의 물량 공세는 <쥬라기공원>, <더 록>, <타이타닉>을 통해 점점 더 크고 강한 폭발력을 선보였다. 한국인들은 서울의 봄을 만끽하듯 검열 없는 극장을 찾았다. 관객들은 매해 증가해서 50만~100만에 가까운 흥행 대박이 터지기 시작했고 <서편제>와 같은 100만 관객 돌파 영화도 나왔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에 대항하는 한국 영화의 방식은 장르의 차별화였다. 한국인의 오리지널 감성을 자극하는 코미디와 멜로 장르에서 <넘버 3>, <개같은 날의 오후>, <할렐루야>, <약속> 등의 수작이 나왔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영화 스타일을 모두 흡수할 것 같은 기세의 한국영화 제작자와 감독들에게 블록버스터 역시도 포기할 수 없는 장르였다. 한편에서는 장르의 차별화로 흥행을 만들어내면서도 한국식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내겠다는 욕심 역시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흐름의 대표주자가 바로 <쉬리>의 감독 강제규 감독이었다.20150602000133_0_99_20150603112910

강제규 감독은 감독 데뷔 전, 한국 누아르 영화의 계보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게임의 법칙>의 각본을 맡아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수상한 각본가기도 했다. <게임의 법칙> 전에 맡았던 각본은 강수연 주연의 <장미의 나날>이었는데 이 영화의 장르 역시 한국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팜므파탈이 나오는 스릴러. 강제규 감독의 할리우드 장르를 영화화하고 싶다는 욕망은 그때부터 꾸준했던 걸로 보인다. 스릴러-누아르를 거쳐 그가 감독 데뷔를 이룬 첫 영화의 장르는 동양 판타지물이었다. 바로 신현준의 ‘황장군’ 캐릭터로 대표되는 <은행나무침대>다. 1989년 중국 정소동 감독의 영화인 <진용>에서 모티브를 딴 듯한 캐릭터와 서사였지만 나름의 독창성을 가진 이야기, 홍콩 무협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의 눈높이에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촬영 기법과 특수효과,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양귀자의 소설 <천년의 사랑>에서도 다룬 환생과 그 후에도 이어지는 사랑이라는 감정 등 흥행요소가 충분했고 결국 흥행에 성공했다. <은행나무침대>의 흥행 이후 강제규 감독의 장르 욕심에 걸려든 것은 바로 한국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본격 블록버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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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배우 신현준입니다. 공포영화에 나오는 인형 아닙니다. – 은행나무 침대 중 캡쳐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을 내건 영화는 <쉬리> 뿐만이 아니었다. 1994년 김영삼 정부에서 “<쥬라기공원> 영화 한 편이 벌어들인 수익이 1년 동안 현대자동차 150만 대를 수출해서 얻은 수익과 같다”며 영화 산업을 육성하는 순간부터 해외에서도 수출 가능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것이 한국 영화계에 내려진 지상과제였다. 스크린쿼터 없이는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의 물량 공세에 대해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자생책이기도 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1998년에 나왔던 <퇴마록>이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내세웠다. 이름에 걸맞게, 혹은 원작의 명성에 걸맞게 컴퓨터그래픽에도 신경 쓰고 제작비도 쏟아부었지만 그야말로 흥행 참패. 당시에 이 영화를 봤던 내가 평을 내리자면 이 영화의 모든 단점 중 최악의 선택은 캐스팅이었다. 안성기-박신부, 현암-신현준 등 원작에서 팬들이 그렸던 모든 이미지가 영화 <퇴마록>의 주역 4인방 캐스팅과 완전히 동떨어졌다. 마치 나의 아스카는 이렇지 않아… 같은 기분.6f1eb77f14d47ccdc6a4068adbb265df <퇴마록>의 실패 이후 역시 한국에서는 블록버스터가 안 된다는 섣부른 판단이 흘러나올 때 <쉬리>가 등장했다. 도심 총격전 촬영 장면 때문에 9시 뉴스에 등장하기도 하며 제작 당시부터 화제를 모았던 대작이었다. 그리고 쉬리는 한국영화의 벽이라는 서울 100만 관객과 <서편제>를 넘어서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타이타닉>마저 넘어서면서 서울 244만 명, 전국 580~620만 명이라는 그때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흥행 기록을 세운다. 과연 <쉬리>는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전 세계적인 <타이타닉>의 흥행에까지 찬물을 끼얹을 수 있었을까.

1. 한국의 분단 상황 콤플렉스를 극복

1948년 남한이 단독정부를 선포하는 순간부터 한국은 계속 분단국가였다. 한국전쟁을 거치고 미소가 냉전을 하는 중에도 거기에 동조해서 끝없이 서로를 적대해왔다. 오히려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이 북한을 이용해 총선에서 이기기 위해 남북 갈등을 부풀리는 북풍 사건을 일으키는 등 서로를 적대하는 모습을 끊임없이 언론에 드러내려고도 했다. 하지만 세계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냉전이 끝나고 화해 무드로 돌아서며 붉은 광장의 레닌 동상이 철거되었다. 미소의 대립과 첩보전을 소재 삼아 상대를 적국으로 상정하는 수많은 영화를 만들어내던 할리우드조차도 적으로 삼을 대상이 없어져 삐걱댔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햇볕정책을 시행하던 1999년 역시 화해무드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국에서 남북한의 대립을 다룬 영화가 나오게 된 것이다.

1970년대 똘이장군이 빅 배드 울프 잡던 시절이었으면 모를까, 1990년대의 영화계는 북한을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북한을 나쁘게 묘사하면 촌스러워보였고, 북한을 좋게 묘사하자니 언제나 힘을 발휘하는 ‘빨갱이’ 논란이 따라올 것 같았다. 쉬리는 이런 점을 영리하게 피해 갔다. 우리 편을 더 멋있게 만든 것이다.movie_image (35)

국가정보원이라는 공간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에 대해서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진 바는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없었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그들이 박정희와 전두환의 손에서 풀려난 이후, 국가 전복을 시도하는지 북한 내부에 침투하는 간첩을 만들고 있는지 전 세계를 누비며 첩보 활동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요즘에는 다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안다. 간첩이 아닌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문서 조작을 일삼고, 대선에서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 혐오 발언 등을 올리며 국민 정서를 분열시키기 위한 댓글 공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암튼 <쉬리>에서 그려진 국가정보원 조직은 ‘키싱구라미’ 작전에 넘어가서 온갖 정보를 물고기를 통해 다 내주는 무능한 조직 같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적의 음모도 밝혀내고 북한 내부의 실정도 잘 알고, 작전을 파훼1)파훼 : 깨뜨리어 헐어 버림 – 편집자 주하기도 하고 국민의 생명을 위해 이 몸 한번 바치는 훌륭한 조직이다. 송강호와 한석규를 통해 인간적인 고민까지 하는 조직원으로 그렸으니, 국가정보원 차원에서도 <쉬리>같은 영화가 흥행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갑자기 <쉬리> 흥행도 국정원이 인터넷 댓글로 홍보해서 흥행에 달성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그 당시의 인터넷은 피시통신을 갓 넘은 수준이라 파급력이 요즘 같지는 않다)

그렇게 괜찮은 모습으로 남한의 정보조직을 만들어놓고 북한에 힘을 준다. 마치 가끔 <남북의 창>이나 특별 다큐 <북한 특전사의 삶>같은 홍보영상에 나올 것 같은 총과 칼로 선보이는 진기명기들을 보여주며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북한 군인들의 강철 같은 의지와 체력을 보여준다. 여기서만 끝났으면 단순한 괴물 같은 이미지였지만, <쉬리>는 최민식이 맡은 박무영 역을 통해 남한의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한다. 강제규 감독 본인도 96년 있었던 북한의 기아 사태를 보며 <쉬리>의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밝혔듯이 북한의 가난과 남한의 소비문화는 <쉬리>의 주요 갈등 이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런 설명 없이 남북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위험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요즘에 와서 다시 보면 참 구구절절하다. 축구 경기장에 있는 수천 명의 시민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무슨 대학교 모의토론 하듯이 서로의 논점을 주고받는 걸 보면 참 선비의 나라다운 블록버스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은 문제였고 요즘에 보면 그렇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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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박무영 씨는 북한에서 한글 맞춤법 교육 좀 제대로 받아야겠다 ‘오랫만’이라니…

2.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훌륭한 현지화.

아까 말했던 북한군의 훈련 장면에 나오는 진기명기들. 분해된 총을 먼저 조립해서 상대를 쏘는 장면, 사람들이 서 있는데 그 사이로 총을 쏘는 장면 같은 것은 이미 서부극에서 사용된 방식이다. 이방희가 애용하는 각종 저격 장면, 도심 총격전, 빨갛게 달아오르는 폭탄, 친구의 죽음, 품위를 지키려는 악역 캐릭터 등. 90년대를 거치며 우리가 눈에 익숙해져 있는 수많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장면들이 곳곳에 녹아 있기도 하다. 이것을 표절이나 베끼기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강제규 감독이 하고 싶었던 것은 할리우드에서도 하는 것을 한국에서도 하는 것이었고, 이 시도는 꽤 성공적이었다. 여기에 한국 영화에서 즐겨 사용되던 상징 집어넣기(“키싱구라미는 한 마리가 죽으면 따라 죽는대.”)와 주제곡 강조(‘When I dream’) 등의 장치를 집어넣어 한국인이 좋아하는 블록버스터, 진정한 의미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창조한 것이다. 요즘 들어 뻑하면 나오는 수사인 ‘웰메이드’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90년대 영화가 바로 <쉬리>였던 것이다.

3. 멀티플렉스의 탄생.CGVgangbyeon

1998년 4월 대한민국에 첫 멀티플렉스가 생겼다. 바로 강변CGV11. 제2의 용산전자상가라고 불린 강변 테크노마트 건물과 결합되어 있었고 지하에는 대형마트인 ‘롯데마그넷’이 있었다. CGV의 첫 극장이기도 했던 강변CGV11은 IMF 사태 직후였음에도 성공을 거뒀고 이에 따라 다른 기존 영화관들도 재개장, 리모델링을 통해 원스톱 쇼핑 시스템을 도입했다. 점점 영화를 보기 편해지고 좋아지는 시기였다. 통신사 할인과 카드 할인(각 1,000~1,500원 할인)으로 조조할인(4,000원)을 이용하면 1,500원~3,000원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기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만 하면 비디오 보는 돈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골방에서 비디오로만 영화를 보던 나 같은 비디오키드들이 남는 시간을 이용해 조금씩 더 영화관으로 이동하는 시기기도 했다. 그 후 2000년에 메가박스 코엑스와 씨너스 등이 생기며 본격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리고 천만 관객 시대를 맞이하게 되지만, 그건 잠시 후의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관의 발전과 흥행 대박 영화의 상관관계는 너무나 상식적인 일일 것이다. <쉬리> 및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 기록을 재려다 보니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 추정치로만 재오다가 통합전산망이 갖춰진 것이 2005년의 일이다.

B-side <너희가 21세기 영화를 아느냐>

90년대가 한국에서 영화 중흥의 시기이자 영화 문화의 태동기라면 2000년대는 영화 문화의 융성기였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왕의 남자>, <괴물>, <해운대> 등 천만 영화가 등장했고 이에 못지않은 800만~900만 영화도 속출했다. 90년대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습과 이에 맞선 한국영화의 서사로 읽어내릴 수 있다면 2000년대는 이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고르고 영화를 읽어야 한다. 90년대에 뿌리를 내린 다양한 인재들이 IMF 경제 극복이라는 호재를 만나 마음껏 자신의 역량을 드러냈던 시기였다. <너희가 90년대 영화를 아느냐> 시리즈는 여기서 마치지만, 2000년대를 읽어 내릴 만한 좋은 방식이 떠오르는 시기가 오면 2000년대 영화 연대기로 다시 찾아올 것을 약속드린다.maxres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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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훼 : 깨뜨리어 헐어 버림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