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휴학이야

노트북은 생각했다. ‘내 주인은 도대체 왜 사흘 밤을 새가며 피피티를 만들고 있는 걸까? 것도 네 개씩이나? 왜 주인이 보내는 카톡의 숫자들은 사라지지만, 답장은 오지 않는 걸까? 내 주인은 왜 급기야 스크립트와 레포트까지 도맡은 걸까?’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다...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다…

학교에 질렸다. 팀플이 싫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파워포인트와 초안, 완성본 진짜 완성, 최종본, 리얼 최종, 이제 끝, 진짜 끝…, 내일 발표, 2조 아침 최종 완성본 따위의 제목을 단 PDF 파일 때문에 학을 뗐다. 급기야 나는 미디어 공부를 하려고 우리 과에 들어온 건데, 왜 공산주의의 폐해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걸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우리 좀 떠나자, 어디로든.

야, 우리 진짜 길게 여행 갔다 오자. 친구와 나는 미디어관 지하 1층 영상 편집실에서 틈만 나면 여행, 여행 노래를 불렀다. 둘 다 팀플의 노예였다. 복사 붙여놓기 수준의 자료조사와 ‘저 피피티 할 줄 모르는데‘ 스킬을 시전하는 새내기, 이공계열이라 레포트는 못 쓰고 대인기피증 때문에 발표도 못하겠다는 조장, 그리고 화룡점정이 되어준, 발표기간에 중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중국인 학생.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병을 유발하는 조원들을 까댔다.

한참 열을 올리다가 여행 이야기로 한숨을 돌렸다. 그럼 우리 인도 갔다가 네팔 가서 히말라야 등정이나 하자. 원래 우리의 계획은 그러했다. 겨울방학 때 인도, 네팔 여행을 갔다가 3학년 1학기(2016년 1학기)는 대구에서 요양 휴학을 할 셈이었다.

이분들 여행 스타일 채소...

이분들 여행 스타일 채소…

그리고 우리는 뜻밖의 복병을 마주친다. 우리 엄마가 인도행을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다른 데는 어떤 나라든 괜찮은데 인도는 안 된다. 여자 둘이 가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다. 일부분 동의했다. 친구와 나는 오지 탐험식의 여행, 즉 생고생만 하다오는 여행을 선호했고 부모님도 우리의 어드벤쳐 정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는 다양한 경험적 근거(물론 인터넷과 주변인을 통한 간접 경험이었다)를 토대로 엄마를 설득하려했지만, 잊고 있었다. 나는 엄마 딸이라는 걸. 나는 고집이 셌고, 엄마도 고집이 셌고, 아빠는 우리 둘보다 더 셌다. 그렇게 인도와 네팔 행을 포기했다.

우리는 다른 여행지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모험심을 충족시켜줄만한 나라는 없었다. 아프리카를 제외하고. 아프리카 간다고 했다가는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와 등짝 스매싱을 날릴지도 몰랐다. 웬만해선 내가 하겠다는 일에 반대하는 법이 없는 두 분이었는데, 당시에는 그랬다. 그래서 워킹 홀리데이로 방향을 틀었다. 지난 여름방학, 캐나다 워홀 신청의 실패가 여지까지 씁쓸했다. 못내 미련이 남았던 때문일까. 내가 제안했다. 나 워홀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갈래? 아주 일상적인 물음이었다. 야, 나 오늘 비도 오는데 파전에 막걸리나 마실래? 하는 것과 같은. 돌아온 대답 역시 그랬다. 헐, 그래. 언제 출발할래? 겨울방학? ㅇ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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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막걸리 마시러 가듯 결정했다..

왜 하필 워홀이야?

나도 한때는 편한 삶을 추구했다. 딸이 원하는 건 웬만하면 다 해주려는 부모님을 둔 덕에, 내가 외국물 좀 먹어보고 싶다,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부모님도 틀림없이 보내주셨을 게다. 집을 빼서라도. 남들 다 가는 교환학생이라든지, 유학이라든지, 어학연수라든지. 하다못해 해외여행이라도. 그랬기에 한 번쯤은 내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아낌 없이 지원을 해줄 거라는 믿음 아래에 나는 21년 동안 부모님 등골을 쪽쪽 빼먹어왔다.

나만 등골브레이커가 아닐텐데..?

나만 등골브레이커가 아닐텐데..?

아마 내 친구도 그랬을 거다. 우리 둘은 월말이면 날아올 카드 사용 내역서를 두려워했고, 그러면서도 술값을 낼 때는 거침없이 엄카(엄마 카드-나의 경우 아빠였다)를 긁었으니까. 내가 제 아무리 알바를 많이 해봤다 한들, 우물 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걸로 난 금수저 문 애들이랑은 달라! 용돈벌이는 할 줄 안다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고생을 좀 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교환학생이 아니라 워킹 홀리데이였다.

부모님도 처음에는 반대했다. 한 일주일 징징거리니까 네 멋대로 해라, 하시더라. 대신 딱 일 년만이라고 했다. 워홀에서 번 돈으로 세계 일주를 할 계획이라, 아마 일 년은 훨씬 넘을 것 같은데. 일단 알았다고 했다. 그건 그 때 가서 또 징징거리지, 뭐. 나도 효녀는 못되었다.(엄마가 글 연재하게 되면 보여 달라고 했는데…. 불효녀는 말이 없다.)

친구와 나는 겁이 없었다. 그리고 쓸데없이 결단력과 추진력이 강한 스타일이었다. 11월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곧 다가올 기말고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공권을 예매하고, 호주 비자신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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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유는 절대 아니다

그냥 장기 휴학을 한다는 생각에 신났던 것 같다. 팀플 중에도 한참동안 검색을 해댔다. 초기 지역은 퍼스로 정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각자 아는 사람이 그 도시에 있었으니. 더불어 시드니, 멜버른, 브리즈번, 골드코스트 등 복닥복닥한 동쪽보다는 서쪽에 홀로 뚝 떨어진 퍼스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워홀은 그냥 간다고 당장 갈 수 있는게 아니야..

초기 지역을 정했으니, 초기 자금을 모아야했다. 초기 자금이란 대게 일을 구하기 전까지의 생활비를 말한다. 영국은 천만 원, 캐나다는 오백만 원, 호주는 이백만 원 정도. 물론 대략적인 수치에 불과하고 사람에 따라 준비해가는 자금은 천차만별이다. 호주의 경우, 어학원을 다닐 생각이거나 일반적인 쉐어가 아닌 홈스테이를 할 계획이라면 500, 600만원 정도를 초기자금으로 잡는 게 좋다고 들었다. 대학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내 통장 잔고는 0에 수렴했고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출국하고 싶었다. 초기자금은 백오십만 원으로 잡았다. 출국 날짜는 2월 26일. 두 달이면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초기 자금을 벌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알바천국지옥에온것을 환영하오, 낯선 이여

알바천국지옥에온것을 환영하오, 낯선 이여

종강 직후, 나와 친구는 당장 알바를 시작했다. 나는 에이랜드, 도미노피자, 콜센터를 전전하다 유니클로에 정착했다. 한 달 반가량 일을 했고, 통장에는 그만한 돈이 모였다1)덧붙이자면 유니클로 알바는 최고였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 하는 탓에 어떤 일이든 남들보다 더 빨리 질려하는데, 유니클로에서 일하는 동안은 정말 재밌었다. 알바계의 해운대라는 소리를 들어서 겁을 많이 먹었는데, 텃세도 없고 다들 잘 챙겨주고 일 자체도 나랑 잘 맞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유니클로에서 일하지 않을까 싶다..

일을 하는 동안, 건강검진 결과를 이민성에 보냈고 곧 비자 승인 메일을 받았다. 설 연휴가 지난 다음에야 우리는 다시 만났다. 2월 23일, 출국을 3일 앞두고 백팩커를 예약했다2)한국에서 집을 구한 다음 출국하기보다는, 백팩커와 같은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에서 며칠 머물며 집을 보러 다니는 게 일반적이다. 카페에서 나오는 길에 다이소에 들러 화장솜과 돼지코3)출국 3일 전 샀던 돼지코는 호주용 돼지코가 아니었다. 우리는 돼지코를 찾기 위해 퍼스 시내의 모든 한인마트를 돌아다녀야 했다. 그리고 캐리어는 이곳에서 첫 번째 정착도시로 이사한 후, 엄마가 새로 사주셨다. 엄마 말은 일단 듣고 보자. 엄마 말 들어서 손해볼 거 하나도 없다.를 샀다. 아직 실감이 안 났다. 일 년 동안 한국을 뜬다는 사실이. 자취방을 정리했다. 집을 비우는 동안에는 다른 친한 친구가 내 빈자리를 대신하기로 했다. 우체국 택배 박스에 넣을 물건과 캐리어에 넣을 물건을 구별하는 것으로 짐 쌀 준비를 시작했다.

방을 정리하며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는 정말 공항에 안 가도 괜찮으냐며 물었다. 친구네 어머니도 일하셔서 못 오신대, 엄마만 오면 좀 그럴 것 같기도 하고 진짜 안 와도 괜찮다고 답했다. 또 엄마는 낡은 캐리어를 걱정했다. 대구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계속하던 걱정이었다. 캐리어 새로 사줄까? 아니, 괜찮아. 고급스럽게 여행가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구를 텐데. 새로 사서 뭐해.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왔는데, 낡은 캐리어는 출발 전부터 말썽이었다. 짐을 가득 넣으니 닫히질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짐 싸기를 겨우 끝냈다.

드디어 걸음을 떼다.

2월 26일 오전 9시 30분에 출발하는 항공편이었다. 우리는 인천공항에서 7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한 뒤, 잠에 들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는데 문자가 왔다. 비행기가 연착된다는 긴급 문자였다.

에어아시아...

에어아시아… 저가항공 C발아..

야, 비행기 연착 됐대. 11시에 보자. 친구에게 문자를 남기고 나도 느지막하게 출발했다. 지하철로 이동하기 위해 고려대역으로 향했다. 캐리어는 다시 말썽을 부렸다. 손잡이가 없어서 불편할 뿐만 아니라 자꾸 열리려고 했다. 3분이면 갈 거리를 15분간 걸었다. 고려대역으로 내려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손이 너무 아파. 캐리어는 너무 무겁고, 백팩이 두 개라 어깨가 빠질 것 같아. 엄마가 걱정할까 조금 힘들긴 하지만 괜찮다며 전화를 끊고 지하철에 올랐다. 때마침 함께 가는 친구의 다른 친구에게서 페이스북 메시지가 왔다. 깜짝 배웅을 하고 싶은데 출국장이 어느 방향이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나도 엄마 부를걸. 철없는 스물 두 살의 오기는 그렇게 좌절됐다.

결국 나는 지하철 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 + ]

1. 덧붙이자면 유니클로 알바는 최고였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 하는 탓에 어떤 일이든 남들보다 더 빨리 질려하는데, 유니클로에서 일하는 동안은 정말 재밌었다. 알바계의 해운대라는 소리를 들어서 겁을 많이 먹었는데, 텃세도 없고 다들 잘 챙겨주고 일 자체도 나랑 잘 맞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유니클로에서 일하지 않을까 싶다.
2. 한국에서 집을 구한 다음 출국하기보다는, 백팩커와 같은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에서 며칠 머물며 집을 보러 다니는 게 일반적이다
3. 출국 3일 전 샀던 돼지코는 호주용 돼지코가 아니었다. 우리는 돼지코를 찾기 위해 퍼스 시내의 모든 한인마트를 돌아다녀야 했다. 그리고 캐리어는 이곳에서 첫 번째 정착도시로 이사한 후, 엄마가 새로 사주셨다. 엄마 말은 일단 듣고 보자. 엄마 말 들어서 손해볼 거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