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곳을 가는 게 항상 즐겁지만은 않다.

고등학교 OT, 대학교 새내기 배움터, 2013년 연말에 간 인도 역시 행복한 마음으로 가진 않았다. 오히려 우울했다. 새로운 곳이 주는 왠지 모를 불안감과 설렘, 그리고 긴장감은 날 옥죄어왔다. 인도와 달리 이번 남미여행은 친구들과 함께 가서 다행이었다. 약간의 긴장을 친구들과 “퍼스트는 언제 타냐”, “안 될 거야, 아마” 등의 신세 한탄과 면세점의 명품 구경으로 풀었다. 남미는 햇빛이 세서 선글라스가 필수라는데, 면세점의 선글라스는 너무 비쌌다. 면세이긴 한데, 면세해도 비싼 물건을 판다. 그렇게 비행기에 올랐다.

해외에 가본 적이 많지 않다. 고등학교 때 프랑스, 2013년의 인도를 포함해서 이번이 세 번째다. 비행기를 타본 건 이번이 4번째다(귀국 비행기 제외).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을 때와 달라진 점은 아무 것도 없다. 이코노미석은 여전히 좁고, 비행기가 이륙할 때 난 항상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언제쯤 비즈니스석을 탈 수 있을지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승무원이 음료수를 나눠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비행기를 처음 탔다. 그때 와인을 처음 먹었다. 미성년인 나이에 술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와 친구는 스스럼없이 와인을 먹었고 취했다. 맛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에는 승무원이 나눠준 진저 에일(캐나다 드라이)을 마시면서 과자를 먹었다. 아메리칸 에어라인은 짭짤한 땅콩이 아니라 미니 프레츨을 줬다. 사실 이륙 전에 버거킹에서 햄버거를 먹어서 큰 아쉬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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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당시의 감상만큼이나 기록이 중요하다. 기록이 없으면 망각하기 마련이다. 남미여행이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노트북을 가져갈 수는 없었고, 다이어리 한 권과 스마트폰용 메모리 카드(32gb) 2개를 챙겼다. “다큐멘터리식으로 영상을 남기고 싶었다”는 거짓말이다. 다이어리 쓰다보면 손 아파서 핸드폰 영상과 녹음으로 기록을 남기려 했다. 기말고사 기간에 본 <꽃보다 청춘>이 영감을 주긴 했다. 한 가지 차이점은 꽃청춘은 카메라감독이 있지만, 우리는 셀프카메라였다는 거다.

인천공항에서 달라스 공항까지는 12시간 45분이 걸린다. 처음엔 암담했다. 12시간을 비좁은 이코노미석에서 버티는 건 아무리 생고생을 작정해도 어려운 일이다. 이륙하자마자 영화를 켰다. 볼만한 영화는 <캡틴 아메리카 : 윈터솔져>와 <신의 한 수>였다. <윈터 솔져>는 한 번 봤지만, 시간 죽이려고 다시 봤다. 크리스 에반스는 언제 봐도 멋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캡틴 아메리카를 보고 <신의 한 수>를 봤다. 우성이형은 멋지다. 비록 호구형이지만 간지 하나는 끝판왕이다. 대체 왜 조폭이 바둑으로 돈을 벌고 살인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성이형은 멋있다.

12시간 동안 사육당함ㅋ

12시간 동안 사육당함ㅋ

비행기는 사육장이었다.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은 모르겠지만 이코노미석은 그저 사육장이었다. 음료수 먹고 밥 먹고 자고 싸는 12시간은 아무리 봐도 ‘완전한 사육’이다. 중간중간에 잠을 잤지만, 도합해서 5시간 내외밖에 자지 못했다. 영화보느라 잠도 자지 않았지만, 이코노미는 너무 좁아서 편히 잘 수 없었다. 비행기를 탄 후 6시간은 영화로 버틸 수 있었으나, 남은 시간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수면으로 버티려고 마음먹었지만, 잠은 약국과 같다. 필요없을 때는 눈에 계속 밟히는데, 정작 필요할 때 약국은 잘 안 보이거나 닫혀있다.

남은 시간은 다이어리로 때웠다. 3주 내외로 간 인도여행에서 나는 약 70쪽의 다이어리를 썼다. 혼자 간 여행이기도 하고, 인도가 위험하다고 들어서 밤에는 쭉 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도 다이어리를 챙겼다. 첫 다이어리 내용은 “아 드디어 간다”로 시작한다. 지금 보니 역시 별 내용이 없다. “친구들과 싸우지 말기를…”구절이 눈에 띈다. 다시 생각해보면 30일간 친구들과 싸운 적은 한 번밖에 없었는데, 그 역시 10분을 지나가지 않고 풀렸다.

타자마자 음료수와 과자를 주고, 밥을 주고 다시 음료수를 줬다. 저녁은 비빔밥이었다. 빵 1개와 비빔밥이 나왔다. 시저샐러드도 있었는데, 난 육식정글러라서 대충 먹었다(..). 비행기 타자마자 프레츨을 먹을 때는 캐나다 드라이를 먹었고, 비빔밥을 먹을 때는 코카콜라를 먹었다. 저녁으로 나온 비빔밥이 꽤나 매워서 탄산이 필요했다. 코카콜라 한 캔과 같이 사과주스를 먹었다. 사과주스로 고추장을 일차 처리하고, 코카콜라로 마무리했다. 그 즈음 우리 비행기는 날짜 변경선을 지나갔다.yellow

지루한 열두 시간 중에서 기억나는 순간은 ‘날짜 변경선’을 지나는 때였다. 선 하나를 지나면 어제와 오늘이 바뀐다. 이 선을 넘지 말라며 시위대에게 경고하는 정부와 가만히 있으라는 세월호의 안내방송이 떠올랐다. 누군가로 인해 학생들에겐 죽음과 생이 바뀌었고 시위대는 ‘종북빨갱이’가 됐다. 클래지콰이의 노래도 생각난다. 노래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날짜변경선이 지나면 어제와 오늘이 바뀌듯이 연인이 있는 어제와 없는 오늘이 다르다는 노래 아닐까 싶었다.

새삼 내 삶의 분기점이 된 때가 언제인지 싶었다. 아마 2012년 어느날이었다. 어느 때와 다름 없이 사회복무요원으로 출근을 하던 중 엄마의 전화 한 통이 왔다. “무슨 일이야?” “어떡하니, 큰 삼촌이 죽었대.” 엄마는 울먹였다.

삼촌은 수면 무호흡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죽었다. ‘돌아가셨다’, ‘영면하셨다’ 따위의 단어가 들어가기엔 너무 비참한 죽음이었다. 삼촌이 돌아갈 데는 가족 품밖에 없었다. 자식과 아내가 있는 곳은 여긴데 갈 데가 어디 있나.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잠든 큰 삼촌은 그렇게 벽 하나를 두고 안방에 있는 가족과 이별했다. 외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가고 싶던 경희대 한의학과 대신 서강대 경영에 간 삼촌은 대기업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회사에서 만난 숙모와 결혼을 했지만, IMF로 인해 숙모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모든 회사원이 그렇지만 접대 때문에 삼촌은 술을 참 많이 먹었다. 담배도 많이 폈다. 뱃살이 나오고 지방간이 있는 건 당연했다. 삼촌은 조금의 정년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노조위원장 선거에 참여했다. 아쉽게 떨어졌다고 들었다. 자식은 2명이었다. 당시 19살이던 남자아이와 7살의 여자아이.

처음엔 믿을 수 없었고, 슬펐다. 점차 슬픔은 허무함과 분노로 바뀌었다. 왜 힘들게 산 사람은 끝마저 힘들까. 왜 개같이 산 사람은 개같이 죽을까 싶었다. 외갓집은 돈이 없어서 자식들을 원하는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엄마는 서울대 국문과에 붙었지만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라는 집안의 반대와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서울교대에 갔다. 작은 삼촌은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붙었지만 역시 돈 때문에 서울교대에 갔다. 큰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큰 삼촌을 설득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엄마는 자기 때문에 삼촌이 죽은 거라 했다. “한의사가 됐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텐데..”라면서 엄마는 계속 울었다.

“훅 가는 건 순간이야”라는 말을 그때 그야말로 뼈저리고 처참하게 느꼈다. 하늘이 준 교훈이면 하느님을 때리고 싶었다. 그렇게 처참하게 가르쳐 줄 필요는 없었다. 그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죽음 앞에서도 공평하지 않은 인생이라면 최대한 ‘나’한테 집중하는 게 맞다. 남 눈치 신경 안쓰고.

직장인을 보면 가끔 삼촌이 겹쳐 보인다.

날짜변경선을 지나고 나서 다시 잤다. 눈뜨고 보니 미국이 가까웠다. 승무원이 빵, 초코바, 쿠키로 된 아침을 줬다. 배를 채우는 건지 당분을 채우는 건지 모르겠지만 꾸역꾸역 먹었다. 먹고 나니 곧 도착이었다.

달라스 공항에서 대기 시간은 1시간 30분이었다. 게이트에서 나와 짐검사와 몸검사를 하고 나니 약 30분이 남았다. 우리가 가야할 게이트 근처에는 서브웨이가 있었다. 미국 서브웨이는 뭔가 다를까 싶었는데 똑같았다. 오히려 가격만 비쌌다. 안타깝게도 구체적 가격은 생각나지 않는다.

다시 탄 비행기 역시 아메리칸 에어라인이었다. 남은시간은 약 7시간이다. “12시간을 끝냈으니 7시간쯤이야 아무렇지 않겠지”는 착각이었다. 이코노미는 우리를 봐주지 않는다. 비행기가 작아서 그런지 TV모니터가 개인용이 아니었다. 비행기 천장에 몇 개가 붙어있었다. 영화는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였다. 아쉽게도 기억 나는 게 없다. 내 왼쪽에는 다소 뚱뚱한 남미 아저씨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김샤카가 자고 있었다. 다소 느끼한 파스타를 먹고 다시 잠들었다. 느끼할 때는 콜라다. 콜라를 먹고 화장실을 갔다가 잠들었다.

눈떠보니 드디어 리마공항이었다.

리마에 도착해서 처음 찍은 사진.

리마에 도착해서 처음 찍은 사진.

리마공항은 습했다. 바다의 짠내는 나지 않았지만 분명 습했다. 확실히 ‘우기’란 걸 느꼈다. 2014년 12월 27일 새벽 1시 리마의 밤날씨는 여름과 가을 사이의 경계선이었다. 덥진 않지만 그렇다고 춥지도 않았던 날씨. 한인 민박에서 예약한 픽업을 타고 숙소로 들어갔다. 픽업가격은 30달러였다. ‘비싼 거 아니냐’라는 생각이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20시간 가량의 항공 시간은 우리를 지치게 했고, 아침이 될 때까지 공항에서 노숙할 생각도 없었다. 픽업을 타고 약 30분이 지나서 숙소에 들어갔다. 숙소는 리마의 부촌인 ‘미라 플로레스’안에 있었다. 이중 철문으로 보안은 철저했다. 숙소 앞엔 태평양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 위에 떠있는 통통배들과 저 멀리 가로등이 보였다.

우리가 예약한 방은 5인 도미토리였다. 우리 세 명의 숙박비는 각각 11달러였다. 여기서 2일(도착 당일 포함)을 머물기로 해서 계산은 체크아웃 때 하기로 했다. 미리 자고 있는 2명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들어가서 짐을 풀고 이를 닦았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자마자 페이스북에 생존신고를 하고, 부모님께 도착했다고 연락을 드렸다. 새삼, 인터넷이 우리 시대의 ‘공기’라는 걸 느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없던 시절의 해외여행은 대체 어떻게 했을까 싶었다. 이를 닦고,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핸드폰 충전기를 꽂고 바로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