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넘버 3>

1997년의 대표 영화는 한석규와 최민식이 주연으로 출연한 것보다도 송강호의 충격적인 신 스틸링으로 더 회자되는 영화 <넘버 3>다. 이 멤버는 1999년 <쉬리>에서 다시 만나 흥행 기록을 세운다. 그리고 <넘버 3>의 감독이기도 한 송능한 감독은 <쉬리> 이후 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흐름 속에 1999년에 개봉시킨 그의 두 번째 작품 <세기말>의 흥행 실패를 겪어야 했다. 그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캐나다로 떠나며 더 이상 연출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20세기에만 존재했던 사람처럼 97년과 99년 단 두 편의 영화를 남겼고, 두 편의 영화들은 똑같이 세기말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었다. 영화의 스타일은 <펄프 픽션>과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었는데,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온전한 한국의 것이었다. 세계 영화의 흐름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한국 영화의 급성장이 느껴지는 모습이기도 하다.movie_image (31)

송능한 감독은 다양한 작품의 각본과 각색에 꾸준히 참여한 시나리오 작가였는데 <넘버 3>를 연출하기 바로 전에 참여한 작품이 양은이파 보스인 조양은이 출소 후에 직접 주연을 맡은 <보스>였다. 제작 전 과정에 현직 보스인 조양은이 손대지 않은 곳이 없었을 테니, 시나리오 작가인 그가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조폭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넘버 3>에 담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넘버 3>는 대사 하나하나가 살아 있다. <넘버 3> 이후로 이만큼 대사의 맛이 살아 있는 시나리오는 <공공의 적> 정도라고 생각될 만큼 임팩트 있는 명대사가 넘쳐 난다. 대사가 살아 있으니 당연히 캐릭터도 살아난다. 오랜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경력이 감독 데뷔작에서 꽃피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맛을 살리기 위해 이번 편은 대사를 중심으로 리뷰를 해보겠다.movie_image (5)

“야, 너 사랑이 뭔지는 알아? 사랑이라는 거는 누군가를 90프로 이상 믿는다는 거야. 까놓고 말해서 난 너 그만큼 못 믿어.”

“그럼 몇 프로나 믿는데?”

“51프로.”

태주(한석규)는 삼류 양아치다. 그의 여자 친구는 시를 사랑하는 술집 아가씨 현지(이미연)다. 그는 항상 그녀에게 51프로만 믿는다고 말한다.

“내 히든 카드 어떠냐?”

“다이아몬드 에이스던데요.”

“에이스 원 페어 받아놓고 포커 치면 돈 잃을 일 없을 거야”

조직에 반란이 일어났다. 킬러의 습격이 있을 거라는 소식에 태주->여기 빼고는 보스를 보필하고 보스는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히든카드인 “재떨이” 재철을 부른다. 참고로 포커 카드의 무늬 서열은 스페이드, 다이아몬드, 하트, 클로버 순이다. 즉, 자기가 스페이드 에이스고 재철이 다이아몬드라고 말하는 부분이다.movie_image (7)

“세상에 나 오진아를 감동시키는 건 딱 세 가지뿐. 캐쉬, 크레디트 카드, 섹스.”

현지는 보스의 아내기도 한 오진아와 언니 동생으로 지낸다. 현지는 시를 배우기를 갈구하고 진아에게도 시를 배우라고 권하지만, 오진아는 시 선생이자 제비인 ‘랭보’의 섹스 실력이 궁금할 뿐이다.

“불사파, 아닐 불, 죽을 사, 절대 안 죽는다는 뜻이야. 의리, 충성, 사시미. 사시미. 문신을 새기도록 해라. 문신.”

송강호가 연기하는 불사파의 리더, 조필. 그는 야산에서 지옥훈련을 하며 불사파를 창설하고 ‘아이들’을 양성한다. 한 번씩 말을 더 하는 게 조필의 습관이다.

“너, 인터넷이 뭔지 알아?”

“국제경찰 아닙니까? 형님.”

“그건 인터폴이야 인터폴. 이건 인터폰이고 인터폰.”

송능한 감독이 다룬 것은 조폭이야기와 코미디지만, 그 안의 주제는 확실하다. 세기말 각종 삼류 인생을 보여주며 우리의 인생도 그들과 똑같은 삼류 인생이라는 것. 그리고 삼류 인생이라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 세기말을 넘어서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똑똑한 21세기형 건달 태주, 무식하고 힘만 좋은 재철의 구도라든가, 무식함을 이용한 개그 등은 형식만 남아서 이른바 조폭 코미디로 이어지게 된다. 송능한 감독은 조폭 코미디를 만들지 않았지만, 조폭 코미디의 원류를 이야기할 때 <넘버 3>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에이 씨. 어떤 새끼가 넘버 스리래. 내가 넘버 투야!”

“투나 스리나 다 똑같은 거지. 막말로 넘버 원이 다 싹쓸이하는 세상 아니냐.”

태주는 조직의 넘버 스리가 됐다. 스스로는 넘버 투라고 믿고 있지만 내부에는 강력한 넘버 투 경쟁자인 “재떨이” 재철이 있다. 도끼파 넘버 투는 태주를 만나 투나 스리나 다 똑같다고 이야기한다. 한석규 특유의 침 튀기는 대사다. 한석규는 조용하고 차분한 이미지 속에 강렬한 에너지를 숨기고 있는 역할에 참 잘 어울린다. 특히 이렇게 언성 높이고 말 더듬어가며 침 튀길 때 에너지가 폭발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movie_image (18)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헝그리 정신에 관해서야. 헝그리. 배가 고프다는 뜻이지. 헝그리. H. U. N… 그 누구야. 현정화. 현정화 걔도 라면만 먹고 육상에서 금메달 세 개씩이나 따버렸어.”

“임춘앱니다. 형님.”

“나가 있어.”

알 사람들은 안다는 그 현정화 신이다. 송강호의 신 스틸링 장면이기도 하다. 불사파의 리더인 조필은 부하들에게 정신교육을 하는데, 부하 중 하나가 그의 ‘오류’를 지적하고야 만 것이다. 조필은 절대적인 권위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배반이야. 배신.”을 외치고야 만다. 이 영화로 송강호는 충무로의 괜찮은 조연 배우 이미지를 얻었지만 그리 잘생기지 않은 외모 덕에 그가 한국의 대표 배우가 되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2000년 <반칙왕>과 <공동경비구역 JSA>로 송강호는 충무로 최고의 남자배우 대열에 오른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x같아 하는 말이 뭔지 아니?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야. 정말 x같은 말장난이지. 솔직히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 죄를 저지르는 x같은 새끼들이 나쁜 거지.”

최민식은 깡패보다 더 깡패 같은 검사 마동팔 역을 맡았다. 지나가는 곳마다 건달 조직을 싹 쓸어버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에는 태주네 조직이 대상이다.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된 태주와 마동팔은 생활반경 속에서 자꾸 마주친다. 심지어 아파트 놀이터에서 주먹질까지 하는데… 이상하게 우정이 생긴다? 검사도, 깡패도 다 삼류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동등해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movie_image (34)


“너 깡패 영화에 왜 애새끼 안 나오는지 알아? 애새끼 생기면 마음 약해져. 마음 약해지면 건달 끝이야!”

“깡패 영화에 왜 아이들 안 나오는지 알아? 오빠 같은 깡패한테는 희망도 미래도 없기 때문이야. 알아?!”

현지와 태주가 아이를 낳는 문제로 싸우는 장면. 희망도 미래도 없는 세기말의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한 대사이자,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대사다. 태주는 보스에게 직접 마동팔 검사를 해치우라는 지령을 받는다.

“예전에 말이야. 최영의라는 분이 계셨어. 최영의. 그 양반 스타일일 이래. 딱 소 앞에 서면 말이야. 너 소냐, 너 황소, 나 최영의야. 그리고 그냥 소뿔 내려치는 거야. 소뿔 빠개질 때까지!”

movie_image (20)<카오스>라는 룸살롱으로 주역들이 모두 모인다. 태주네 보스가 일본 야쿠자들과 만나기로 한 자리. 태주, 재필 등 태주네 조직이 모두 모이고, <카오스>의 마담이기도 한 진아가 랭보를 불러들이기도 한다. 현지 역시도 여기서 시인 데뷔 파티를 하고 있다. 그리고 태주네 조직이 모두 모여 있다는 정보를 받은 조필과 불사파는 보스를 암살하기로 한다. 거사를 치르기 전 조필은 ‘무데뽀’ 정신을 강조하며 최영의의 일화를 말해주는데… 송강호의 두 번째 신 스틸링 장면. 언제 봐도 웃긴 장면이다.

“야, 통역. 쟤한테 독도가 누구네 땅이냐고 물어봐.”

“물론 일본의 섬이라고 하시므니다.”

“다시 한 번 물어봐. 아무래도 니가 통역을 잘못 하는 것 같다.”

재철이 야쿠자에게 애국심(?)을 강요하는 장면. 결국 재철이 실수로 야쿠자 보스를 재떨이로 맞히는 바람에 <카오스>는 난리통이 된다. 박상면도 코믹과 살벌을 넘나드는 “재떨이” 역할로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movie_image (26)

“오빠, 궁금한 게 있는데, 나 지금 몇 프로나 믿어?”

“51프로. 야, 현지야. 너 아직도 모르냐. 내가 누군가를 51프로 믿는다는 거는 100프로 믿는다는 뜻이야. 49프로 믿는다는 거는 절대로 안 믿는다는 뜻이고.”

새천년, 21세기가 시작된 2001년. 교도소에 수감된 태주에게 스타 시인이 된 현지가 면회를 온다. 그리고 다시 그 질문을 던진다.movie_image (29)

B side <할렐루야>movie_image (36)

1997년에 <넘버 3>의 송강호만큼이나 신 스틸링을 했던 배우가 있다. 바로 <비트>의 임창정. 왕가위 스타일로 허영만 원작 만화를 영화화한 <비트>는 정우성, 고소영의 흔들리는 청춘 연기도 인기였지만, 가장 인상적인 연기는 17:1 무용담을 자랑하는 임창정의 능청 연기였다. <비트>에서의 코믹 연기를 바탕으로 임창정은 다음 해, <엑스트라>로 첫 주연 영화를 찍게 된다. 이 <엑스트라>의 감독이 바로 신승수 감독이다.movie_image (39)

90년대 황금기를 맞아 새로운 감독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에 85년에 데뷔한 신승수 감독은 이미 중견감독이었다. 신승수 감독에게 리즈 시절이란 게 있다면 바로 <할렐루야>, <엑스트라>, <얼굴>로 이어지는 97~99년의 영화 세 편일 것이다. <할렐루야>와 <엑스트라>에서 선보이는 블랙 코미디는 <넘버 3>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90년대 내내 코미디 장르를 연구하던 한국 영화가 마침내 <넘버 3>와 <할렐루야>로 진화한 듯한 신선한 코미디였다.

목사 흉내를 내야 하는 사기꾼 박중훈의 경쾌한 사기 행각들은 박중훈의 물 오른 연기력 속에서 경쾌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정작 박중훈이 벌이는 사기 행각들은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블랙 코미디라 할 수 있겠다. 실제의 목사보다도 마음 착한 영화 속 사기꾼의 회개 장면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박중훈-임창정의 세대교체라는 느낌이 드는 1998년작 <엑스트라>도 챙겨 볼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