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연합뉴스

광주 비엔날레가 연일 화제다. 안타깝게도 좋은 일은 아니다. 현 박근혜 대통령을 김기춘 비서실장의 꼭두각시로 풍자한 걸개그림이 그 화제의 주인공이다. 민중미술작가 홍성담씨의 작품인 이 그림 ‘세월오월’은 박근혜 대통령뿐만 아니라 전두환씨와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풍자하고 있다. 문제는, 이 그림을 비엔날레의 주최자인 광주시에서 불편해하고 있단 점이다. 지난 8일 윤장현 광주시장은 시의 재정이 부담하는 비엔날레에서 정치적 성향의 작품-세월오월-이 올라가면 안된다고 작품의 전시를 반대했다¹.

시의 재정이 쓰이는 비엔날레에서 정치적 성향이 담긴 예술작품은 게재되면 안 될까. 물론, 다양한 구성원의 의견을 담아야 하는 곳에서 구성원 간의 동의 없이 정치적 의견을 펼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세월오월’을 둘러싼 광주시립미술관과 광주비엔날레 그리고 광주시의 입장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예술작품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사소해보여도 억압은 억압이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넘어선 검열

행동의 기반은 생각이다. 개인의 모든 행동은 사상을 기반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사상의 자유는 현대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또한 생각은 행동될 때에만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기에 사상의 자유는 언론, 출판의 자유와 이어진다. 개인이 예술가라면 그 사상의 자유는 예술작품으로 표현된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예술전람회인 비엔날레에서 예술가의 작품이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킨다고 제재된다면 이는 분명히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

물론 그 작품에 담긴 사상이 명백히 소수자에 대한 위험과 차별 -예를 들어 인종차별-등을 포함한다면 안되겠지만, ‘세월오월’에 담긴 사상은 전혀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기득권에 대한 풍자와 희화화일 뿐이다. 이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장려되어야 한다. 극소수의 철인을 제외하면 기득권 역시 불완전하고 이기적일 수 있는 개인일 뿐이기에, 그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힘을 고려한다면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비판이 장려되어야만 한다. 이는 기득권 개인에게도, 힘이 없는 우리에게도, 그리고 사회 전체에게도 이득이 된다. 이런 비판이 제재된다면 – 표현의 자유가 제재된다면 – 그 사회가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결국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내부비판이 없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썩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언론의 비판이 자유로웠던 – 인신공격 수준으로 – 참여정부와 국민의 정부와 달리, 비판이 자유롭지 못했던 MB정부는 그 실정이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의 비판마저 ‘정치적 논쟁’이라며 거부된다면 이는 자유에 대한 억압을 넘어선 검열이다. 모든 검열은 자의성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가장 객관적이고 시민들의 불편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지자체들의 선택일지라도, ‘제 멋대로’의 검열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 기득권의 실정을 은폐하는 결과만 낳는다. 시민의 세금을 운영하는 지자체, 그리고 그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비엔날레라면 오히려 이런 ‘정치적 논쟁’이 담긴 작품을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한다. 전술했다시피 그것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그러면 안돼? 정치적인 건 무조건 싫어?

정치와 예술은 멀지 않다, 멀지 않아야 한다. / 사진 = 뉴시스

궁극적으로 이 사안에 얽힌 전제는 ‘예술작품은 정치성을 띠면 안된다’라는 것이다. 비단 이번 사건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탈정치화의 중심인 대학가와 그 대학가의 주체인 20대가 주타겟층인 대중문화에서 정치성을 띤 무언가는 항상 지양된다. 사회를 비판하는 노래는 공중파에서 소외받고, 사회가 거부하는 시선 -사회주의-은 대학강단에서 소외받는다. 심지어 과거 군사독재 시절을 비판하는 책은 군부대에서 ‘불온서적’이라 낙인 찍힌다. 결국 정치는 9시 뉴스에서만 소개되는, 사실상 동물원의 원숭이로 간주된다. 이렇게 정치성을 띤 무언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항상 ‘예술작품은 예술이면 되지 왜 정치까지 간섭하느냐?’이다.

되묻고 싶다. 예술작품의 역할은 무엇인가? 단순히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 현실을 재현하는 것? 그렇기에 정치성을 띠면 안 되는 것인가?

예술작품은 항상 현실 그 너머의 것을 노래해왔다. 그렇기에 식민지 시대에도 빼앗긴 들을 되찾길 꿈꾸었고, 냉전시대에서도 제 3지역을 그릴 수 있었다. 예술은 그래야만 한다. 만일 예술이 항상 정치와 사회를 저버리고 순수한 현실만을 그린다면 그건 예술이 아니라 아편일 뿐이다. 현실을 혁명시킬 수 있는 그것이 안된다면 현실에 비판적 사유를 제시해볼 수 있는 예술이어야 진짜 예술이다. 그래야만 예술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야만성을 순화시키고, 설국열차의 남궁민수처럼 문 밖의 현실을 상상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우리가 여성청소노동자에게 쉽게 쓰는 ‘어머님’은 사실 공적인 영역-노동-과 사적인 영역-가정-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이로 인해 계급적 인식을 은폐시키는 언어다. 남성 정치적 시각으로 보면 섹스는 성기의 삽입이지만, 여성 정치적 시각으로 보면 섹스는 성기의 흡입이다. 이렇듯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 역시 정치적이기에, 이것을 해결하려면 정치를 통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탈정치화된 무언가는, 사실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누군가가 그것의 정치적 색을 강탈해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치적인 것을 혐오할 필요가 없다. 정치를 혐오하는 이들은 오히려 자신을 의심해봐야 한다.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사실 누군가에게 세뇌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져야만 한다. 정치는 혐오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인지해야만 하는 성질의 것이다. 그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현실의 문제를 새로이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 그림이 불편한 누군가들에게

디스는 받아들여야 / 사진 = 스윙스 페이스북 캡쳐

저정도의 비판이 불편한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좀 더 관용을 가지라고. 자신에 대한 비판에 관용적이지 못한 이는 그냥 폭주기관차일 뿐이다. 때로는 쉬어가고, 때로는 자신을 관조해야만 발전하는 것이 인간인데, 이를 하지 못한다면 폭주하다가 언젠가 터져버리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판자들에게 유쾌한 관용을 베풀면서, 그들의 비판이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해라. 스윙스 같은 스웩을 보여주라고.

 

각주 1) 그는 여론의 질타를 받고 난 후에,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면 안된다는 식으로 한 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