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IMDB

누구나 한 번쯤 침대에 누워 거울을 보며 혼잣말을 한 적이 있다. 누구나 가끔 눈물을 흘린다 따위의 셀카용 감성이 아니라, 진심으로 누군가 나를 이해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스마트폰 메신저엔 수많은 이름이 등록되었지만 선뜻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못할 때, SNS상에서 행복한 친구들이 그저 부럽기만 할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고단한 수험생활에서 내게 안식을 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새벽 2시의-학교가 늦게 끝났다-라디오였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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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의 주인공 티어도르(호아킨 피닉스) 역시 이런 처지다. 그는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작가지만 정작 자신의 진심을 표현할 상대가 없다. 그러던 그가 ‘당신을 위한 OS(운영시스템)’라며 광고하던 인공지능프로그램을 구매한다. 그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스스로를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라 부른다. 그렇게 그와 그녀는 만난다.

2시간의 러닝 타임 동안 이 영화는 관객을 색감으로 압도한다. 화려한 색감은, 현실에서의 인연을 떠나 보내고  인공지능과의 사랑을 하는 외로운 티어도르마저 아름답게 꾸며준다. 하지만 비단 이 영화가 관객을 압도하는 지점은, 스크린이 내린 직후부터다. 아름다운 색감 뒤에 숨겨진 선명하고 잔혹한 인간에 대한 고찰이 관객을 압도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바로 사랑과 인간 근원에 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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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어에서 주어로

티어도르는 대필작가라서 타인의 감정은 글로 표출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은 표출할 곳이 없다. 대화할 상대도 없다. 그러던 와중에 ‘그녀’가 오게 되고,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가 사실 자신 말고도 수많은 인간들-641명-과 같은 관계에 빠진 사실을 알자 괴로워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괴로워한 사실이 자신 말고도 수많은 타인들과 관계에 빠졌다는 극 중 장치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알던 그녀와 실제의 그녀가 일치하지 않았음에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자신만이 그녀의 대화상대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 그는, 그녀와 떠난 휴가에서 그녀가 ‘대석학 인공지능’과 그들만의 대화를 나누자 미시감을 느낀다. 그녀가 자신이 인지하고 상상하던 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그 너머에 있음을 깨닫는 순간 그에게 그녀는 그의 문장에 갇혀 있는 단순한 목적어(Her)가 아닌 또 다른 주어(She)로 다가온다. 이 깨달음이 그를 괴롭게 한다.

사실 그는 이번이 첫 고통이 아니다. 극 중에서 티어도르는 이혼 수속중이다. 전 부인은 티어도르가 항상 자신으로 하여금 ‘강요된 모습’을 살게 했다 말한다. 이로 인해 그들은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완전히 죽지 않았고- 같이 살지 못한다. 티어도르의 친구 에이미와 찰스 부부 역시 마찬가지다. 8년을 같이 한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사소한 문제-신발장 정리-로 그들은 헤어진다.

주어가 된 순간, 이해는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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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인간 사이의 가장 큰 슬픔은 이 주어에서 시작한다. 즉,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불가하단 점이 이 곳에서 시작한다.영화 후반부에서, 사만다는 자신들(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은 곧 머나먼 세계로 떠나야 한다면서- 지능의 발달로 인해 찾게 된 새로운 세계- 티어도르에게 이별을 고한다. 극 중 사만다는 결국 컴퓨터프로그램일 뿐이다. 그런 컴퓨터마저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자 티어도르와 같은 세계에서 살 수 없음을 고백한다. 티어도르를 위해 디자인된 프로그램마저 사람과 완전한 이해가 불가함을 의미하는 이 장면은 현실이자 슬픔이자 좌절이었다.

수많은 오타쿠들을 양산해낸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로봇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이의 이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나 전 인류를 용해해서 하나가 되게 하는 극 중 미션, 외계 물체(사도)와 에바 사이에 생기는 AT필드는 역설적으로 인간 사이의 이해는 불가함을 이야기한다. 에반게리온이 담은 메시지와 영화 그녀가 말하는 메시지는 다르지 않다.

슬프게도 그녀가 내 문장에서 목적어가 아닌 그녀만의 주어가 되는 순간, 인간 사이의 이해는 멀어진다. 그들 각자의 세계가 확고해지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녀와 그의 완전한 이해로-비단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만들어준 것은 그녀가 그의 문장에서의 존재함이었는데, 그마저 없어진 지금 그녀와 그는 결국 다른 세계의 주체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인정하는 순간 서로의 완전한 이해가 불가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는 비단 사랑뿐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의 문제다. 인간 근원에서 나오는 한계, 너와 내가 존재하는 한 항상 있는 한계, 이 한계는 모든 철학자의 문제였고 우리의 문제다. 슬프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신체적 결합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외로움의 문제다.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이기만 할까?

위로가 되어준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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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존재 혹은 갈망했던 존재가 우리의 문장에서 사라지면, 우린 이 세계 자체가 다르게 보인다. 그토록 이해되던 혹은 이해되지 않던 세상이 투명하고 선명하게 만져지는 기분. 아이러니하게 그 기분은 우릴 더 고통 속에 빠뜨리고 그 고통은 명명되지 못할 정도로 참혹하다. 해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아픔이 우릴 덮친다.

인간 사이의 희망은 역설적으로 이 상처를 직면하는 곳에서 시작한다. 각각 그와 그녀를 떠나보낸  에이미와 티어도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것처럼 자신이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의 새살에서 또 다른 그녀와 그가 자라난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문장을 써내려간다. 그렇게 과거의 문장과 현재의 문장 사이에는 마침표가 아닌 쉼표가 찍힌다.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할 게 아니라, 그렇게 새로운 이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희망할 수 있다.

무엇이 틀린 문장인지 언제나 예민하게 지각하고, 틀린 문장을 고치고 새로운 문장을 써내려 갈 수 있을 때, 그렇게 문장이 문단이 될 때 우리 사이의 거리는 다시 한 번 좁혀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