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파리 한 가운데 덩그러니 떨어졌을 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명 몇 시간 전 비행기 창문 너머로 반짝거리던 유럽 땅을 지켜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감정이었다. 그 때, 파리는 무작정 저지른 휴학을 만회하기 위한 몸부림의 첫 번째 목적지였고, 그래서 더더욱 당황스러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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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혼자 외국을 나온 것이 처음이라서 그럴 거야.’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그 감정은 내 생애 첫 유럽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 유럽 여행 갔다 왔네? 어땠어요? 느낀 게 뭐에요?’ 그 이후로 이 질문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되었다. 사실은, 느낀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열성적으로 대답하곤 했다. 베르사유 궁전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독일 맥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한심하다는 눈빛을 피하고 싶어서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돈을 그 정도 쏟아 부었으면 무엇인가는 느꼈어야 한다고 자기 자신을 다그친 결과였다.

배낭여행을 가지 않을 자유

휴학을 한 학생들이 꼭 해야 할 n가지 목록에는 언제나 해외여행이 들어있다. 그것도 패키지가 아닌, 자유 배낭여행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내가 겪은 자유 배낭여행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자유가 아니었다. 우선, 내게 배낭여행을 가지 않을 자유 같은 것은 없었다. 목돈이 생긴 청년에게 배낭여행은 암묵적인 의무였다. 에라 모르겠다, 휴학버튼을 누르고 약 400만원의 돈이 수중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유럽여행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왜냐하면 사방 천지에서 젊은 시절에 유럽 여행을 꼭 가봐야만 한다고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집안 사정이 나쁘지 않은 주위 친구들은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유럽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좀비처럼 외쳤다. 이 방법이 어렵게 느껴지면 우리는 부모님의 500만원을 가볍게 빼 먹기도 했다. (때문에 중산층에도 속하지 못한 친구들은 자유 여행 경험을 빼앗겼다고 느껴야만 한다.)

간디작살 등골브레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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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죄책감과 부담감은 쉽게 합리화되곤 했는데 그게 바로 ‘경험도 스펙’이라는 삐까뻔쩍한 선전 문구에 의해서였다. 엄마가 이렇게 많은 돈을 네 여행에 쓰는 것도, 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해주는 거야. 알지, 딸? 엄마는 미안해하는 내게 말했다. 별 것도 없이 외국에서 돈을 펑펑 쓰고 오면 자기소개서에 그나마 한 줄을 적을 수 있었다. ‘제가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

‘자유여행’에서의 자유는 그러니까,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 다른 의미의 자유였던 거다. 스펙 열풍의 한가운데에서 내가 내 자신의 경험을 상품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그런 의미의 자유. 그래서 사실은 여가여야만 하는 여행도 스펙을 생산해내는 노동의 시간으로 변해버린다. 마지막 여행지였던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7일을 묵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나는 스스로를 압박 중이었다. 또, 한달 여간을 끊임없이 여행했으니 육체든 정신이든 제대로 된 상태는 아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냥 하루 종일 유스호스텔에 처박혀 잠이나 자고 싶었다. 조식을 두 번씩 퍼먹고, 같은 방에 머무르던 모든 여행객이 사라지길 바라며.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나중에 면접관이 여행가서 무얼 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예, 저는 몇 백 만원씩 내고 여행을 가서는 방에 처박혀 잤습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러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내 돈 내고 여가를 즐기러 간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새 그 여행을 나중에 써 먹을 스펙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낭여행 목적지의 자유

둘째로, ‘자유 배낭여행’에 목적지의 자유는 없다. 배낭여행의 행선지는 대부분 유럽의 잘 알려진 국가들이고, 약간 특이한 곳을 가봐야 인도 혹은 라오스다. 꽃보다 할배, 꽃보다 청춘, 또는 꽃보다 누나. 온갖 여행 프로그램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바로 그 곳으로 우리는 가야만 한다. 다른 곳은 정보조차도 제대로 없거니와 ‘유럽 여행 갔다 왔다면서 파리도 안 가봤어?’라는 질책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목적지만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각 국가 당 유명한 도시 한 두 곳에 고작해야 며칠을 머물면서 관광지를 미친 듯이 돌아다닌다. 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봤자 다음 몇 가지뿐이다.

유명 관광지에 입장료 내기, 사진 찍기, ‘유럽 가면 꼭 사와야 할 물건들’에 적힌 것 사기, 사진 찍기, 유명 레스토랑에서 식비 지출하기, 사진 찍기, 한국에선 비싼 면세품 사기, 사진 찍기, 게스트 하우스 혹은 호텔에 숙박비 지불하기, 그리고 또 다시 사진 찍기.

그렇다. 내 첫 번째 유럽여행 폴더에는 도시별 랜드 마크 사진이 수두룩 빽빽하다. 여기서 조금 발전하면 한복 입고 여행하기 등이 추가될 수 있겠다. 강연 프로그램에 이런 식으로 독특하게 여행을 한 젊은이들이 등장하면, 바로 수많은 복제 여행이 양산된다. 사진 속의, 강연 속의 그들은 모두 행복해 보인다. ‘유럽 여행을 가서 엄청난 삶의 의미를 느끼고 왔어요. 여러분도 꼭 가보세요, 배낭여행.’ 그래서 일단 유럽 여행을 가면 무엇이든 의미 있는 경험을 할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비행기를 탄 우리는 곧 당황하게 된다. 사실, 가보니까 별 게 없었거든. 와, 건물들이 정말 아름답다. 경탄도 하루 이틀뿐이다. 단순히 심미적이기만 한 것들은 절대 오래가지 못한다. 이제 무엇을 해야만 하나? 당혹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소비를 시작하게 된다. 어서 입장권을 남기고, 그 안에 내가 있는 사진을 남기고, 기념품을 남겨야만 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투자한 비용에 비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공산이 크니까. 여기서 자유여행의 ‘자유’가 가진 또 다른 의미가 등장한다. ‘관광 시장에서 돈을 쓸 수 있는’ 자유. 쉽게 말하자면, 에펠탑 열쇠고리를 살 자유 같은 것 말이다.

다슷개 일유로

다슷개 일유로

그러나 유럽 자유 배낭여행을 다녀오지 못한 친구들은 언제까지나 다녀온 친구들의 삶을 부러워할 것이다. 자유 여행을 다녀왔던 친구들의 삶은 그래서 행복한가? 이제 이들은 그 아무 의미 없었던 경험을 자신의 스펙으로 포장하기 위해 고군분투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우리의 자유 여행은 진짜 자유 여행이었는가?

배낭여행의 진짜 자유

유럽 여행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많은 대학생 친구들은 내가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다른 ‘진짜’ 여행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유럽 여행에 대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환상에 떠밀려 바보 같은 실수를 한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으리라고는 말 할 수 없다. 난 그저 그런 친구가 더 이상 없기를 바랄 뿐이다. 여행은 흔히들 말하듯이 값진 경험이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동시에 나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여행이니까. 따라서 여행은 나의 끝엔 남이 있고, 남의 끝엔 내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가장 행복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내 안에 진짜 자유의 의미가 살아있을 때에야 가능하다. 자유가 더 이상 시장에 의해서 보장되는 자유가 아닐 때. 자유가 나만의 자유, 그래서 나 혼자만이 책임져야 하는 자유가 되지 않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진짜 자유여행을 떠날 수 있다. 그제서야 우리는 별 의미를 찾지 못하더라도 조급해 하지 않고 맘껏 노는 여행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의 자유여행이 아니라면 어차피 내가 하는 경험은 돈지랄이 될 테니, 그런 것이라면

‘니가 가라, 자유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