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축제와 일상

축제는 무슨...

일상에서 탈출 실패..☆

4학년 1학기. 이번 학기가 지나면 12학점이 남는다. 빼도 박도 못하는 취준생. 나보다 어린 여자 후배들은 졸업 사진을 찍었고, 백년만년 과방에서 죽치고 있을 것 같던 여자 동기들은 하나 둘씩 사원증을 목에 걸고 직장 동료와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린다. 한량 같이 다니던 선배들 대부분은 학교에서 사라졌다.

‘취준생’만한 회색 지역이 없다. 하얀색도 검은색도 아닌 회색. 축제를 즐기기엔 자기소개서가 걱정되고 자기소개서를 쓰기에는 축제의 스피커 소리가 우리를 흔든다. 조용한 열람실과 시끄러운 광장 사이 어딘가가 내 위치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우리 학교 축제의 제목은 다소 허무했다. 탈출이라 함은 갇힌 곳에서 열린 곳으로의 완전한 이동인데, 우리의 축제는 완전한 이동이 아니라 잠시의 유사 탈출 경험을 줄 뿐이다. 축제가 하루하루 진행될수록, 연예인에 환호하며 우리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느낄수록 아이러니하게 일상이 얼마나 비참한 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32대 1. 16대 1로 싸웠다며 허세를 부리는 시시껄렁한 영화 대사가 아니다. 대졸 신입사원의 취업 경쟁률이다. 100명이 지원하면 서류에서 반이 걸러지고, 면접에서 또 반을 거른다. 최종 면접을 걸쳐 남은 사람은 고작 3명. 100명 중 3명만이 신입사원이 된다. 신문에서만 느낄 수 있던 삼성 갤럭시 S5 부진은 신규 채용 규모 감소라는 다소 딱딱한 8글자로 다가왔다. 8글자의 공포가 이렇게 컸던 점은 처음이다. 아마 그 8자에 수많은 내 동기와 선배 그리고 후배들의 좌절이 담겨있을 거라 생각한다.

10명 중 2명은 열정페이를 겪고, 100명 중 3명만이 직장을 가질 수 있는 일상. 한국은행 총재는 앞으로 청년실업이 심해질 거라 말하고 대통령은 해외로 떠나라고 한다. 해외로 떠날 능력이 있으면 왜 한국에서 지지고 볶고 있겠냐고 되묻고 싶지만 고개를 떨군다. 그럴 시간에 한 글자라도 신문을 더 봐야 한다는 무언의 명령이 내 머리 속에 들어왔다. 아마 이 일상이 나로 하여금 열람실과 광장 사이에 방황하게 만든 이유가 아닐까 싶다.

 

2. 대동제와 일상

우리 학교 대동제의 제목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이었다. 축제라고도 부르지만 대부분 학교 축제의 정식 명칭은 대동제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는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 소소한 차이를 극복하여 커다란 하나가 되자는 공동체 의식의 발로가 `대동제`란 이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라며 대동제의 뿌리를 80년대 학생운동에 두고 있다.

알다시피 학생들만이 학교의 유일한 구성원은 아니다. 청소노동자, 교수, 교직원 모두가 학교의 구성원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대학교 축제의 다른 이름은 대동제인데, 이는 학교의 모든 구성원들이 즐길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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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대 총학생회 페이스북

이번 축제 기간에 내 눈길을 끈 유일한 타학교는 ‘서울여대’였다. 서울여대 총학생회는 ‘더 나은 축제환경’을 위해 현수막을 자진철거했다고 한다. ‘스스로 철거한다’는 자진철거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서울여대 총학생회가 ‘중립’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총학생회 페이스북은 “총학생회와 중운위는 학교와 노조 그 어느 측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학생들이 더 즐길 수 있는 서랑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앞으로도 학우들의 편의를 위해 힘쓰는 총학생회와 중운위가 되겠습니다”며 현수막 철거의 변을 말했다.

현수막 철거가 중립일까? 청소노동자들의 의지가 담긴 현수막을 철거하는 것은 곧바로 청소노동자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다. 결국, 학교 측의 의견을 돕는 ‘지금’을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입장을 표명한 행동이다. 이 행동의 전제는 크게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파업은 정치적이며 옳지 않다’는 것과 ‘청소노동자는 학교 구성원이 아니다’라는 것. 마지막은 ‘중립은 학교 안에서 정치적 목소리를 배제하는 것’이다.

첫 번째 전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파업은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정치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파업이 옳거나 그르다고 주장할 수 없다. 자신의 이익을 내세우는 행동(파업)이 틀린 것이 되려면 타인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해쳐야 하는데, 청소노동자의 파업은 자신의 이익을 회복시키려는 것이기에 틀리다고 판단할 수 없다. 오히려 약자가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유일한 행동이다. 서울여대 총학생회는 저 파업에 옳거나 그르다는 가치 판단을 할 게 아니라 얼마나 비참했기에 그 행동을 했는지를 파악해야만 했다.

이렇게 손에 손을 잡고는 안되나…?

두 번째 전제인 ‘청소노동자는 학교 구성원이 아니다’는 총학생회가 얼마나 편협한 시각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총학생회와 중운위는 학교와 노조 그 어느 측에도 치우치지 않고”라는 문장은 청소노동자를 학교에 대립하는 무언가로 보지 않는 이상 쓸 수 없다. 자신들이 무심코 버리는 종이쓰레기와 매일 쓰는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노동자들을 내부 성원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내부 성원을 타자화하고 본인들보다 아래의 것으로 보는 시각은 “청소노동자의 노동 3권 보장되면 툭 하면 파업할 것“이라 발언한 김태흠 의원과 닮았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수행하는, 공동체를 원활하게 굴러가게 하는 모든 사람이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마지막 전제가 가장 문제다. 학교에 정치적 의견이 담긴 현수막이 없어야 축제하기에 좋은 환경이 될 거라는 서울여대 총학생회의 주장은 “학교에 정치적 목소리가 없어야 한다”와 이어진다. 학교에는 각자 입장이 다른 수많은 단체가 있다. 각자의 입장은 각자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다분히 정치적이다. 그리고 그 이익은 충돌하고 갈등을 낳는데, 그 갈등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민낯이다. 축제 혹은 대동제는 그 일상을 외면하기보다 그 일상 속에서 행복과 일탈을 꿈꾸는 공간이다. 우리가 보기 싫어도 봐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을 외면한 대동제는 그야말로 마약일뿐이다. 서울여대 총학생회는 자신들의 축제에서 정치적 약자의 목소리를 제거했다. 고작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말이다.

편향은 나쁜 것이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은 편향을 “현실 위를 미끄러져 들어감으로써 더 명확하게 사건을 들여다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쌍의 렌즈”라 말했다. 곧 편향을 통해 사실 속에 숨겨진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편향이 무조건 나쁘지 않듯이, 중립 역시 무조건 옳지 않다. 약자의 목소리를 중립을 외치며 제거하는 것은 곧 현실에 대한 수수방관이며 학생회로서의 책임 회피다.

그간 한국 사회의 많은 정치적 변혁은 중립따위 개나 줘버린 편향적인 학생회로부터 시작됐다.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며, 광주 학살에 대한 분노를 외치는 편향을 통해 우리는 민주화를 이룩했고 지금까지 왔다. 경제적,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해 신음하는 약자들을 위해서 우린 기꺼이 중립을 버리고 편향을 택해야만 한다. 서울여대 총학생회는 중립과 편향 사이에서 전자를 택했다. 단언컨대 그들의 중립은 며칠의 미관을 위해 대동제의 참뜻을 버린 멍청함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