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의 변

박완서 작가 못지않게 한국 문학의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바로 오정희 선생님입니다. 수능에 출제 된 ‘중국인 거리’나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저녁의 게임’으로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좋은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읽은 오정희 선생님의 작품들은 세밀한 관찰과 심리묘사를 기반으로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불안의 정체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번에 소개할 ‘어둠의 집’은 소설집 『유년의 뜰』 중에서 마지막에 실린 단편입니다. 남편의 쉰 다섯번째 생일을 앞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거나 미농지라는 단어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첫 문장

– 그 여자는 꼭 한 잔 분량의 물을 주전자에 부었다. 손 짐작은 대개의 경우 정확했다. 찻물을 가스레인지 위에 얹는 동안에도 한 손에는 미농지의 설명서를 들고 있었다.

달콤한 문장

– 여름 같으면 아직 박명이 머물 시간이건만 방안은 아주 어둡고 십사 인치 텔레비전의 텅 빈 화면이 검푸른 빛으로 불투명하게 떠 보였다. 거울은 더욱 검었다. 무릎 걸음으로 다가가 다만 어둡고 깊을 뿐 아무것도 되비치지 않는 거울을 바라보던 그 여자는 문이 열리는 듯한 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 착각이었을까. 커튼은 움직이지 않은 채 바깥 하늘빛의 반사로 어둠이 조금 엷을 뿐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런데도 어깨로 으쓱 한기가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집을 관찰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생생한 묘사입니다. 사실 그동안 어둠 속에서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다른 물건들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전등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 없고, 혹여 잠들기 전에 불을 끄더라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 바빴기 때문입니다. 잠시 이 글을 읽으면서 어둠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운 문장

– 해방이 되고 외지에 나가 있던 그 여자가 북쪽 고향집에 들어 왔을 때 그곳에는 이미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늙은이거나 어린애거나 여자라면 얼굴에 검댕이를 칠하고, 문밖 출입을 삼가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바깥에 인기척만 나면 그 여자의 어머니는 딸을 다락 속에 밀어넣었다. 로스케가 온다. 지켜야 할 것은 목숨보다 정조였다.

이후로 외국군의 범죄 행위가 묘사됩니다. 이것을 참아 넘기는 부분은 읽는 분들에게 불편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 이 단편집 내내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정리하는 문장

가만히 불안을 들여다보는 눈

보태는 문장

제가 처음으로 접한 오정희 선생님의 작품은 ‘중국인 거리’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수능 준비를 하며 읽었던 소설을 성인이 된 지금 다시 읽으니 “나는 양갈보가 될꺼야”라는 충격적인 대사들과 가슴 아픈 이야기로 새롭게 다가 왔습니다. 꼭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