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난 5월 11일 미스핏츠에서 내보낸 ‘조선, 한겨레 우리가 남이가’란 기사에 대한 반박이 ‘라식해라’ 님으로부터 도착했습니다.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읽으실 수 있게 반박과 재반박, 솔직한 코멘트들이 오가도록 교차 편집했습니다. 저희가 글을 읽으면서 궁금한 점도 함께 여쭙고 있습니다. 재반박에 대한 재반박도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모쪼록, 저희는 반론권을 보장하는 매체 아니겠습니까. 


싸움에는 규칙이 있다. 중학교 일진들 간 주먹다짐에도 ‘급소를 차지 않는다’란 거룩한 계율이 있지 않던가. 지면을 통한 싸움에는 논증이 필수다.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할 때 논증은 실패하며, 논증에 실패한 비판은 악플에 불과하다.

‘지켜본다’의 5월 11일자 악플, ‘조선, 한겨레 우리가 남이가’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그와 ‘미스핏츠’ 편집국의 무모한 용기가 필자를 비롯한 젊은 언론인들에게 폭소를 선물했다.

필자님이 말하시는 젊은 언론인들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려주면 안되겠니?궁그미~  

답례로 기꺼이 ‘설명충’의 멍에를 짊어지며, 해당 악플의 웃음 포인트 몇 군데를 짚으려 한다. 유쾌한 시간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 맞아여! 존나 유쾌상쾌통쾌한 시간을 보내봅시다!

조선일보 기사 둘, 한겨레 기사 하나가 인용됐다. ‘지켜본다’는 메르켈 총리가 장 본 게 왜 ‘한 남자를 위’한 것이며, ‘유연함과 포용력’이 왜 여성의 강점이냐고 분통을 터트린다. 솔직히 여기서부터 잘 모르겠다. 앞의 기사는 본문 맥락상 조금 과한 수사 정도로 봐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글쓴이는 “제목과 대응되는 취재 내용이 기사 본문엔 하나도 없다”고 비판했으나, 설령 기자가 직접 요리하는 메르켈을 목격했다 하더라도 꼬아 보려면 볼 수는 있는 제목이다. 성별에 따른 강약점은 연구 중인 사안이다. 일반화하기 힘든 문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전제이기에 두 번째 기사에 대한 비판은 유효하다. 백 발 양보해서 일단 두 기사 모두 “쓰레기 수준”이라고 치자. 원래 저런 양반들 아니던가. 온 나라가 아는 사실을.

‘지켜본다’의 본격적 오류는 한겨레 비판에서 시작된다.

“전지적 남편 관점에서 기사는 (…) 출산 때문에 퇴직을 고려하는 아내를 졸지에 ‘신데렐라 판타지에 빠져버린 현실도 모르는 흔한 아줌마 1호’로 만들어 버린다. (…) 아내는 2주에 400만 원이 들어가는 산후조리원으로 옮기고 싶다며 남편을 조른다. (…) 기사 말미에는 남편의 상황을 ‘보통 남자’라고 규정하며, 아내까지 ‘보통 여자’로 결정지어 버리는 흔한 일반화를 해버린다.”

두 가지가 간과됐다. 하나는 해당 기사가 ‘인터뷰’라는 사실이다. 내부 성원이 아니기에 한겨레 ‘인터뷰; 가족’란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연재를 훑어보면 코너가 대면 인터뷰나 서면 투고를 바탕으로 재구성된다는 것쯤은 금세 알 수 있다. 필연적으로 1인칭 “남편 관점”으로 쓰일 수밖에 없는 형식이다. 이 코너에는 무능하고 편견에 찬 남편도, 종교를 강요하는 독선적 아버지도 등장한 바 있다. ‘지켜본다’의 논법에 따르면 한겨레는 여성 못지않게 남성에게도 “그들의 편견을” “씌워버”린 셈이다. “운동권 꼰대” 한겨레의 실체는 드러났다. ‘20대가 말하는 젊은 미디어’ 미스핏츠는 어떤가. 인터뷰이의 목소리가 곧 언론사의 입장이라면, ‘김정은을 처단해야 한다’는 변희재의 인터뷰가 청년 실업에 대한 미스핏츠의 해답인가? “아 이게 무슨 개판인가.”

인터뷰이가 말하는 걸 받아 적는 거랑 기자가 1인칭 관점으로 말하는 건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습니다. 인터뷰이의 목소리를 인터뷰이 신분을 밝히면서 날 것으로 내는 거랑 인터뷰이의 목소리를 재가공해서 “나는 대한민국의 보통 남자다” 멘트까지 삽입하면서 넣는 건 다른 차원인 것 같은데요.

사실 관계도 무시됐다. 천인공노할 남편놈의 의견은 젖혀두고 아내에게 일어난 사건들만 체크해보자.

  1. 임신 이후 퇴직을 고민한다.
  2. (신데렐라 스토리의) 드라마를 좋아한다.
  3. 2주에 400만 원짜리 조리원에 가려 한다.
  4. 남편의 사업을 말린다.

i)은 ‘지켜본다’의 지적처럼 현실적이고 일반적인 고민이다. iv) 또한 할 수 있는 이야기다. ii)는 신경이 곤두선 남편이 과잉 해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그는 ‘씁쓸’해할 뿐, 공격적으로 반응하지는 않는다. 남편이 글을 쓴(인터뷰 한) 직접적 계기는 iii)이다. 여기서 묻겠다. 조리원에서 ‘거의 두 달 치 월급을 2주 만에’ 쓰는 건 상식적 행동인가?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아내의 발상에 당황하는 남편은 발언할 권리조차 없는가?

권리야 당연히 있죠. 하지만 과연 기사로서의 가치가 있을까요? 속으로 구시렁대는 것은 커뮤니티 댓글이나 트위터 그리고 카톡방에서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죠. 종이신문에 실을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저게 진짜 발언인지 혹은 상상력이 첨부된 소설인지 모호하다면요?

‘지켜본다’는 여기에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딱히 질문이 없어서 답을 해야했는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 ͡° ͜ʖ ͡° )

남편이, 기사가 아내를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하고 현실도 모르는 아내”로 만든다며 비난할 뿐이다. 그러나 iii)의 ‘사실’만으로 아내는 이미 “현실도 모르는” 게 맞다.

아내분이 현실을 모르는 말씀을 하셨더라도, 앞에서 “‘신데렐라 스토리’를 좋아하는 아내”라는 문장이 앞에 있는 걸 감안하면 아내를 과도하게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남편분이 그렇게 생각하시고 보내셨더라도 데스크는 조금 더 고민해야하지 않았을까요?

산후조리원 비용을 남편이 뻥튀기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더구나 그는 아내의 정신 나간 계획을 수용하기까지 한다. 오랜 꿈이었던 사업마저 아내의 말 한마디에 포기한 애처가 아닌가. 글쓴이는 이 모든 사실 관계를 외면한 채 남편이 “아내를 졸지에 ‘신데렐라 판타지에 빠져버린 현실도 모르는 흔한 아줌마 1호’로 만들어 버”렸다고 힐난한 뒤, 스스로의 “문장”이 “위험”하다며 깜짝 놀란다

제 문장이 위험하다고 한 게 아니라 한겨레 본문 기사의 문장이 맥락을 고려하면 위험하다고 말한 겅미!

“뇌내 망상”도 이 정도면 중증이다.

해당 기사가 개인적 수기고, 등장하는 여성은 객관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점을 무시한 후 글쓴이는 가장 치명적 오류로 나아간다. 그는 한겨레가 “남자는 항상 현실에 충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지만 여자는 현실 쥐뿔도 모르고 항상 징징대기만 하고 고생은 안 하려고 하고 남자 등골만 빼먹는 모습”을 그렸다고 광분한다. “문제가 생기면 여자 탓이고, 이 빌어먹을 현실을 뚜벅뚜벅 이끌고 살아가는 것은 남성이라” 주장하는 “ 80~90년대 진보 운동권 꼰대”의 전형이란 소리다.

여기서 ‘지켜본다’는 특정 개인을 그 성(性) 전체와 동일시하는 우를 범했다.

특정 개인을 성 전체와 동일시하는 우는 한겨레가 먼저 범하지 않았나요?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보통 남자’라는 표현이 남편분이 직접 쓰셔서 기고하신 것일지라도, 남편분이 혼자 구시렁대는 것과 한겨레라는 종이신문 주말판에 실리는 것은 다른 이야기죠. ‘보통 남자’라고 자조하는 것이 “내가 ‘보통 남자’야!” 라는 선언으로 바뀌고 한겨레도 인정하는 꼴인데요. 적어도 내용에 문제가 있으면 데스크에서 걸러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한겨레 기사에서 남편이 하소연한 것은 자기 아내다. “전지적” 네이트판녀 “시점”이 아닌 이상 누구든 비난할만한, 꽤나 사치스러운 성품인 배우자의 이야기이다. 기사가 ‘남자는 (여자와 달리) 항상 현실에 충실’하다고 그렸다는 판단은 비약이다. 달랑 기사 한 편으로 회사 전체의 논조를 간파해내는 영험함이, 도박과 외도, 알코올 중독을 일삼는 ‘남성’ 기사들에는 왜 발휘되지 않는가.

음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다만 알코올 중독을 일삼는 남성 기사와 여성 혐오 담론이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만연한 시대에서 한겨레 기사에 더 큰 문제를 느꼈습니다. 비슷한 사안이 있고 제보해주시면 좀 더 잘 써보겠습니다.

성차별과 역차별 논쟁이 아닌, 미디어 비평의 기본 요건 문제다. 역설적으로 이런 식의 “흔한 일반화”야말로 일베를 비롯한 인터넷 남성우월주의의 본질이다그렇죠.. 문제적 개인이 그가 속한 성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억지, 부분집합이 곧 합집합이라는 기이한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일베는 ‘여성가족부 폐지’, ‘지켜본다’는 ‘조선일보=한겨레’란 마스터키를 손에 넣는다. 그로테스크한 풍경이다.

일베는 데스크란 게이트키핑이 없습니다. 적어도 한겨레는 편집부 데스크란 최종 게이트가 있고, 데스크에서 손 보는 분들은 나름 한겨레에서 뼈가 굵고 많은 고민을 하셨다고 생각했기에 ‘논조’를 언급했습니다.

이렇게 엉터리 증명을 해치운 뒤 ‘지켜본다’는 “김치녀라는 유령이 한국사회에 떠돌고 있다”고 엄숙하게 ‘선언’한다. 나아가 ‘조선=한겨레=경향=일베=운동권꼰대=성범죄자’라는, 육위일체를 주장하는 데에 이른다.

제가 경향신문과 성범죄자까지 언급했나요? 그 단체가 직접 성범죄를 저지르진 않았습니다만 그렇게 읽으셨다면 제 표현이 잘못됐네요.

‘20대가 말하는 젊은’ 김치녀가 운동권 꼰대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 근거는 없다.

김치녀 프레임을 뒤집어 씌우는 모습이나, ‘운동권 꼰대’분들이 여성을 무시하는 모습이나 둘 다 진보와 거리가 멀고 여성인권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기 때문에 언급했습니다.

“개나 줬”나보다. 이후 글은 ‘한국 사회의 성’과 ‘현대 미디어론’ 수업 필기를 섞어놓은 듯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별안간 출몰한, “한겨레나 조선이나 거기서 거기다”라는 마그리트적 문장을 끝으로. 대학가 호프집에 그득한 젊은 주정뱅이들의 언어다.

저희는 한겨레 읽으면서 전형적인 운동권 꼰대라고 생각했거든요? 진보진보 운운하면서 다른 의제들 때문에 흔히 페미니즘 개무시하는 운동권 꼰대 모습이랑 똑같은데(…). 한겨레도 진보 진보 운운하고 여성 문제 관심 가지는 척 하면서 결국 기사에서 김치녀 만들어 냈잖아요.

굳이 이 글이 기사나 칼럼을 참칭하고자 한다면, 필자는 그 전개 방식을 ‘아몰랑 저널리즘’이라 이름붙이고 싶다. ‘조선일보=한겨레’를 논증하기 위해서는 양 매체 기사의 경향성을 찾아내야 한다. 여러 지면에 실린 다양한 기사들이 성차별을 묵인한다는 자료가 뒷받침돼야 옳다. 최소한 조선일보의 두 기사에 대응하는, 피처 기사와 스트레이트 기사 하나 정도는 준비했어야 말이 된다. 개인의 수기를 멋대로 왜곡해서 신문 전체의 논조로 딱지붙이는 것이야말로, 텍스트를 비틀어 정해진 결론에 이르는 조선일보의 전통이다. ‘지켜본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아저씨”들에 대한 증오에 눈이 멀어 논증의 기본 요건을 포기했다. “왜 조선일보나 한겨레나 똑같은뎅?” “몰랑!!!!! 그냥 꼰대 자체가 짜증나ㅜㅜㅜㅜ”

개인의 수기라고 해도 데스크의 손질이 들어가고 한겨레 신문에 올라갔다고 하면 언론사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별개로 필자분이 쓰신 ‘아몰랑’ 단어는 상당히 위험해보이네요. 특히나 아몰랑이 여성시대 등의 여초 사이트를 비난하는 용어로 쓰인다는 현실을 감안하면요.더불어, 적어도 저는 텍스트를 왜곡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사소한 허술함까지 물고 늘어지지는 않겠다. 꼼꼼히 보자면 밤새 써야한다. 가령 ‘서른 살’이 어째서 “80~90년대” “꼰대”인지.

이는 지극히 수사적 표현이었습니다. 모습과 닮았다는 것이 그 분이 곧 운동권 꼰대라고 하는 건 아닌데요.

스스로를 ‘보통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게 왜 “아내까지 ‘보통 여자’로 결정지어 버리는” 일인지.

‘아내 때문에 쪼들리는 모습’의 자신을 보통으로 규정하면, 보통 남편은 아내들에게 산후조리원 때문에 쪼들린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는 보통 아내들은 남편을 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남편은 보통 아내와 만나지 않나요? 보통 남편은 특별한 여자를 만나지 않잖아요. ‘보통’이라는 단어 자체가 다수를 가정하는데, 다수의 남자를 만나는 건 소수 특별한 여자가 아니라 다수 ‘보통’ 여자겠죠?

정작 인용된 “기사 본문엔 하나도 없”는, “밤일까지 잘하면 가산점 100점”, “침대에서는 마릴린 먼로” 운운은 글쓴이 개인의 섹스 “판타지”인지 같은 문제들이다저것은 제 생각이 더해진 문장이기에 굳이 기사 본문을 언급하신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단 한 줄로 글 전체의 신뢰도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구절이 수십 군데 이상 있다. 논리의 경합이란 지면의 규칙을 뗑깡 표출로 대체했기에 그렇다. 바둑판이 아무리 썩은들, 알까기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지켜본다’의 글이 악플로 전락한 건 그 기치가 그릇돼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 성차별은 엄존한다. 다수 언론이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글쓴이는 환부를 도려내는 대신, 생살을 찢은 후 증오의 굿판을 벌였다. 이 글이 틀릴 뿐 아니라 ‘나쁜’ 건 불성실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이상한 아내와 더러운 세상에 시달리는 남편의 수기는 적합한 논거가 아니었다. 이미 같은 지면에 이상한 부모, 자식, 남편이 꽤 쓰였다면 더욱 그렇다. 한겨레는 양성 평등의 신앙을 위해 ‘여성인 개인’의 기행은 싣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어떤 여성도 공격받지 않아야 한다는 “운동권”적 마인드가 ‘지켜본다’ “아저씨”의 숨겨왔던 본심인 건지 궁금하다.

적어도 개인 여성의 기행을 담고 싶었다면 기사 내에서 여성의 입장을 담거나, 추후 보도가 있었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범죄자한테도 반론권을 보장하는 세상인데 기사 속에서 기행을 저지르게 된 그녀의 반론권을 담거나 아니면 최소한 ‘보통 남자’라는 표현은 편집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떤 여성도 공격받지 않아야 한다는 게 운동권적 마인드인가요? 설령 어떤 여성이 잘못을 했다고 해더라도 받아야 할 것은 반박이지 공격이 아닙니다

재반론이 나올지는 모르겠다. 사실 ‘지켜본다’보다 다른 ‘미스핏츠’ 성원들의 입장이 더 알고 싶다. ‘조선, 한겨레 우리가 남이가’는 어떤 시금석이다. 미스핏츠는 황색 저널리즘을 장착한 동아리 문집이 될 수도 있고, 기성 언론과 차별화된 진정한 의미의 뉴미디어가 될 수도 있다. 다음 대응이 기다려진다.


그리고, 어느 구절에서 딱히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마지막으로 엮은 미스핏츠의 사족을 덧붙입니다.

  1. 기사에서 가정된 상황 자체가 여성혐오 프레임 생성입니다.  따라서 상황 자체에 대한 분석은 무의미할 가능성이 훨씬 크죠.
  2. 지켜본다의 글은 ‘한겨레는 조선일보다 이 좆같은 신문사야’ 라는 논조였다기보다는 ‘한국 사회 여성혐오 생성이라는 측면에서 한겨레 역시 (기자, 데스크가 그냥 기사를 내보냈기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 측면에선 한겨레나 조선일보나 또이또이’라는 주장이죠.
  3. 조선일보랑 미스핏츠를 동급에 놓아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