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펄프 픽션> -‘덕후’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리라.

내가 <펄프 픽션>을 본 것은 1994년이 아니었다. 개봉으로부터 한참 후인 2001년 어느 시청각 도서관이었다. 아마 영어 공부를 하라고 여러 외국 영화 자료를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지만, 나에게는 무료 비디오 가게처럼 느껴졌다. (DVD가 아니라 비디오다) 이름은 알지만 구하기 힘들었던 몇 편의 옛날 영화를 찾아보고 나서 내가 손에 든 것은 <펄프 픽션>이었다. 내가 학생인 시절에도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빌려주던 우리 동네 준비디오에 없어서 보지 못한 영화였다.

집에 있는 TV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모니터와 다른 사람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도록 무겁게 머리를 짓누르는 커다란 헤드폰, 그리고 투박한 모양새에 플라스틱 소리가 틱틱 나는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와 약간 빛바랜 느낌의 표지가 달라붙은 비디오테이프까지, 정말 펄프 픽션(싸구려 종이로 만든 저질 잡지)을 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2시간 후 (원래 영화는 2시간 30분인데, 한국에 들어오며 극장 개봉의 편의를 위해 30분이 잘려 나갔다. 이런 일도 90년대에는 흔한 일이었다) 슬레지 해머나 야구방망이 같은 걸로 머리를 맞은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30분이나 잘라낸 버전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펄프 픽션>의 장점인 서사의 혼란을 심화시켜서 충격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본 후,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남았다.

“아니,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가 있을 수 있다니!!”

그렇다. 지금까지도 내게 가장 재미있는 영화를 꼽으라면 첫손에 꼽는 영화가 바로 <펄프 픽션>이다. 물론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니 폭력과 범죄, 욕설 등에 거부감이 있는 분들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어? 이게 이렇게 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 때의 기분은 정말 짜릿했다. 시네필이라고 할 만하지만 일개 영화 팬인 나조차도 이렇게 충격을 받았는데, 평생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봐 온 1994년의 칸 영화제 심사위원들은 어땠을까? 그들이 받은 충격 역시 가늠해 볼 수 있는데, 겨우 두 번째 장편 영화를 만든 애송이 영화감독은 이 영화로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가 바로 <펄프 픽션>의 감독과 각본을 맡은 쿠엔틴 타란티노다.Untitled-1

타란티노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영화의 가장 앞부분에 사용되는 현란하고 쓸데없어 보이지만 긴장감을 조성하는 대사들이다. <저수지의 개들>의 ‘Like a virgin’의 재해석이라든가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의 란다 대령의 협박 장면이라든가.

<펄프 픽션>의 오프닝 역시 펌킨과 허니바니 두 연인이 은행털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작된다. 시답잖아 보이던 대화를 나누던 두 연인은 갑자기 총을 꺼내들고 강도로 돌변한다. 그 순간 영화는 그 장면에서 멈추고, 왠지 kt 위즈의 이대형 선수나 택시가 생각나는 음악인 Dick Dale & The Del tones의 ‘Misirlou’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마치 영화가 끝난 것처럼 스태프 롤이 올라가기 시작하며 Kool and the gang의 ‘Jungle Boogie’로 노래가 바뀐다. movie_image (10)<펄프 픽션>이 나오기 전까지는 스태프 롤이 영화 앞부분에 등장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음악이 바뀌는 경우는 없었다.(요즘도 거의 없다) ‘응? 뭐지? 왜 영화가 끝난 것처럼 굴어? 두 시간 반이나 남았는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다.

그리고 갑자기 빈센트(존 트라볼타)와 줄스(사무엘 L. 잭슨)가 등장한다. ‘응? 펌킨과 허니바니는? 그 카페에서 강도질하려던 애들은 어떻게 된 거야?’라고 되물어봐야 영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또 시덥잖은 빈센트의 유럽 여행기를 들려준다. 그러다 이야기의 주제는 ‘보스의 아내의 발마사지를 해준 것은 보스를 배신한 것인가, 아닌가’로 이어지고 격렬한 토론이 이어진다. 정말 진지하게 빈센트와 줄스가 각각 배신이냐 아니냐로 갑론을박하는데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고, 펌킨과 허니바니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빈센트와 줄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빈센트와 줄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이후도 마찬가진다. 빈센트와 줄스의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빈센트와 미아(보스의 아내, 우마 서먼)의 이야기가 나오고, 갑자기 은퇴를 앞둔 복서 부치(브루스 윌리스)가 나온다. 순서대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을 기대하던 관객들은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왜 나오는 건지, 어디서 이어지는 건지, 저 캐릭터는 왜 여기서 갑자기 등장하는지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다. 영화가 끝난 이후에야 알쏭달쏭한 의문을 여전히 품은 채로 왠지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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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_끄덕끄덕

타란티노는 기-승-전-결로 보통 설명되는 서사의 기본을 해체하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이야기를 마음대로 배치하고 섞고 흔들고 주무른다. 단지 그것뿐이었으면 <펄프 픽션>이 명작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 각각의 파트마다 잘 쓰여진 대사와 개성 넘치는 캐릭터를 통해 몰입감을 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펄프 픽션>은 이야기가 위로 가든 아래로 향하든 옆으로 빠지든 한 바퀴를 돌든 그저 흐름에 따라 몸을 맡겨도 충분히 짜릿함과 긴장감과 웃음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영화였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렸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짜릿하고 재미 있었는지만 기억하지, 아무도 몇 도 회전으로 몇 바퀴 돌며 몇 미터를 진행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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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힉! 신-난다! 재미난다!

비디오 대여점 직원 생활을 하며 영화를 보는 ‘덕질’로 영화를 배운 ‘덕후’ 타란티노는 어느 시대의 영화든, B급 갱스터 영화든, 홍콩 누아르 영화든, 일본 사무라이 영화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가장 재밌는 스타일을 골라 각각의 서사를 색칠한다. 왕년의 춤 실력을 보여주는 존 트라볼타의 댄스를 보여주다가 갑자기 황당한 탈출극을 보여주기도 하고, 브루스 윌리스가 택시를 타고 도망칠 때는 흑백영화 시절에 쓰던 배경판 스타일을 뻔뻔하게 그대로 보여준다. 한없이 리얼리즘적이다가 어느 순간에는 ‘이거 다 펄프 픽션인 거 아시죠?’ 하고 감독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펄프 픽션>과 타란티노는 하나의 스타일이 됐고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결국 <펄프 픽션>은 고전의 위치에 남을 수 있었고, 서사 뒤틀기로 유명한 <메멘토>의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장르를 마구 섞어내는 <킹스맨>의 매튜 본 같은 감독들의 앞길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B SIDE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movie_image (25)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이 시리즈의 프롤로그에서 다룬 할리우드 직배영화 반대 운동의 선두에 섰던 정지영 감독의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의 오프닝부터 그 당시의 투쟁 장면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할리우드 키드였던 걸까. 사회 참여 감독으로도 유명한 그는 할리우드 영화인들과는 다른 한국 영화인들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movie_image (3)병석(최민수)과 명길(독고영재)은 무슨 이야기든 영화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주연 배우와 감독을 줄줄 쏟아낼 정도로 대단한 영화 덕후다. 하지만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속 주인공들에게는 덕질이 마냥 행복하지마는 않다. 어린 시절의 그들은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봤다는 이유로 유기정학을 받고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고, 단속을 피해 도망치다가 한 명의 친구를 잃기도 한다.(사실 여기서 그려지는 친구들의 모습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친구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음악도 좀 비슷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명길은 3류 감독이 되었고, 병석은 현실을 거부하며 영화 속 환상에 안주하기를 원하다가 어느 사건 이후 실어증에 걸리고 만다. 그 와중에 병석은 명길에게 평생 동안 자기가 써온 시나리오를 건넨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로 명길은 대성공을 거두고 상도 탄다. 뭔가 찜찜한 명길은 병석의 시나리오를 다시 살펴보고 병석의 시나리오가 모두 할리우드 영화의 짜깁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병석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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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펄프 픽션>보다 약 한 달 먼저 개봉했다. 다른 영화의 짜깁기는 아니지만 각종 영화의 스타일을 옮기고 붙여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까지 받은 <펄프 픽션>을 보며 정지영 감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화 덕후의 집착 같은 느낌으로 부정적 소재로 활용된 이야기가 할리우드와 칸에서는 찬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과연 상상했을까? 만일 <펄프 픽션>이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속 세계 안에 존재했다면 명길은 병석에게 화를 내는 대신 스스로의 스타일 없음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덕후와 한국의 덕후의 사이에는 국적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창의성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억지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정해놓은 틀.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덕후가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좌절해야 한다면 그 책임은 바로 그 틀을 규정하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국가든, 사회든, 제도든, 인식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