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잘 다니는 것 같이 보였던 대기업을 때려치고 분당에 한우 가게를 연 지 벌써 9년이 됐단다. 가물가물하게 올해가 9년째인 줄은 알았는데, 오늘이 정확히 9주년.

아빠는 누구나 쉬이 알 만한 신용카드 회사에 다녔다.

영업부에서, 또 인재교육원에서, 지사에서, 어디로 발령을 받아도 꾸준히 좋은 성과를 냈던 아빠는 인재교육원 시절이 가장 좋았다고 회상한다. 그 때 아빠가 신입 연수를 시킨 후배 직원들과는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그렇게 자랑을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한 부서에서 다른 부서로, 아빠는 계속해서 옮겨 다녔다. 좋은 연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꼬맹이 시절의 나와 동생 얼굴을 한 달에 두어 번 보면서 지사에서 근무하고, 좋은 실적을 만들어 간 게 오히려 그를 힘들게 한 걸까?  회사는 그에게 오래 머무를 자리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 사직서를 내고 나와 고등학교 선배들과 함께 고깃집을 차렸다.

처음에 아빠는 혼자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선후배들은 함께 초기 투자금을 출자해 제법 번듯한 가게를 차렸다. 하지만 그 후부터는 역시나 고생의 연속. 먹어보기만 먹어 봤지, 실제로 밥을 차리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던 넥타이 부대였던 탓에 결국 ‘사장님’은 평소에도 엄마 만만찮게 요리를 잘 했던 아빠가 떠맡았다. 그리고 다들 ‘품위’ 따위를 이유로 고기 손질을 하지 않으니 고기 손질도 시작했다. 마치 정육점 사장님처럼, 아빠는 9년 전부터 가게 카운터에서 매일 들어오는 고기들을 부위별로 손질하고 썰어 손님 상에 고기를 올린다.

갓 문을 연 고깃집의 자리는 분당이었고, 우리 집은 그때는 연남동이었다. 8년간을 살면서 집에 애착이 붙은 엄마 아빠는 집의 이곳 저곳을 수리하고, 때빼고 광을 냈다. 하지만 매일 새벽에 나가서 12시 경 집에 들어오는 아빠는 눈에 띄게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살기를 여섯 달, 엄마와 아빠는 결국 연남동 집을 팔고 10평 작은 분당의 아파트를 대출을 끼어서 샀다. 그게 지금의 우리집. 엄마는 지금도 연남동 집의 깔끔하고 넓었던 주방과 커다란 오븐을 그리워한다.

중학교 3학년, 분당으로 이사를 가면서 처음 전학이란 걸 경험했던 때부터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나는 아빠의 직업을 이야기 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웠다. 다른 애들은 어버이날이랑 아빠 생일에 넥타이고 넥타이핀이고 커프스와 손수건을 사는데 나는 사 봤자 아빠가 입을 일이 없어서 늘 선물을 고민하는 게 짜증났다. 같은 고등학교의 같은 반 친구들의 아빠는 툭 하면 ‘사’자 돌림에, 아이들이 직업 탐방을 가고 싶다고 하면 손쉽게 대기업 인맥을 이어 주는 ‘멋있는 아빠들’이었다. 난 그게 안 되는 게 부끄러웠다. 또, 아빠가 대기업을 때려치고 나온 것도 아까웠다. 그 때는 물론 몰라서 그랬지만, 그래도 아까웠다.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과 저녁이 있는 다른 아빠들의 삶이 질투도 났었다.

아빠가 고깃집 사장님이다, 그리고 가면 그를 언제나 입구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는 데에 나는 5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지금에야 아빠가 고깃집 사장이라 맨날 맛있는 거 먹고, 고3때 이틀 걸러 하루 한우 먹고 다닌 걸 자랑하고 다니지만 5년 동안 나는 아빠의 직업을 이야기할 때 꼭 설명을 덧붙이곤 했다. ‘야, 우리 아빠도 OO카드 다니다 나와서 일찍 제2의 인생을 찾은 거거든?’ 안 그러면 그냥 억울했다.

‘사장님’ 타이틀이 좋아 보여도, 요식업은 어디까지나 굉장히 고단한 서비스업이다.

오픈은 오전 열 시, 마감은 오후 열 시. 고기를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서 9년 동안 카운터에서 고기를 썬 아빠의 손엔 굳은 살이 잡혔고, 아빠의 무릎은 이미 성하지 않고, 여름이면 가뜩이나 땀도 많은데 에어컨 바람은 쐐도 쐐도 덥고, 겨울이면 입구의 외풍이 아빠의 등허리를 자꾸 철썩 때린다. 아빠는 데스크 앞에서 만년 승진에 좌절당하는 모욕보다 때로는 자신보다 못한 인격의 손님들이 ‘손님이 왕’이라며 그에게 주는 모욕을 견디는 쪽을 택했다. ‘고기나 썰고 있는 사장 나부랭이’가 다른 이들에겐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고 그가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었는지, 이른바 ‘화이트칼라’ 시절에 얼마나 잘 나가는 본부장님이고 과장님이고 인재교육원 파트장이었는지는 모두 한 순간에 쓸모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9년을 버틴 아빠 옆에서 몸이 아픈 엄마도 손이 모자라면 서빙과 주방을 도우러 가게를 나간다. 비싼 고기여서 고기가 얹혀지는 그릇이 하나 하나 다 엄청 무거운 도자기 그릇인데, 그걸 들고 나르는 엄마를 보기 싫어서 한창 엄마가 가게 일을 도울 때는 가게 근처에도 안 갔었다. 월화수목금토일. 식당은 쉬는 날이 없었다. 대기업 사옥 옆에 위치한 아빠 가게는 평일이면 직장인들로, 주말이면 주말을 즐기려는 가족들로 붐볐다. 그렇게 아빠는 개업 8주년 전까지 단 하루를 쉬지 못했다. 심지어 연휴 기간에도 가족 예약 문의가 너무 많아서 쉬지 못했다. 작년, 개업 8주년 때부터 아빠는 처음으로 일요일을 쉬고 있다. 일요일을 점령하고 느긋하게 점심과 저녁에 엄마랑 맛집 순례를 다니는 아빠를 드디어 볼 수 있다.

아빠는 고단하다.

9년을 가게에서 버티면서 나는 자라고, 내 동생도 자라고, 우리는 지금 돈은 못 벌지만 부모님 등골은 빼먹지 않을 수 없는 등골브레이커 1, 2가 되어 아빠의 퇴직을 방해중이다. 그 9년 동안 아빠가 묻었을 수많은 화와 부끄러움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부둥켜 안고 수고하셨다고, 축하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이 가게가 우리 식구 다 먹여 살렸는데.” 아빠는 오늘도 통화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9주년이라서 오늘은 더 바쁜 아빠는 기어코 짬을 내서 나에게 전화를 건다. 9주년을 자랑하고 싶었다고 했다. 9년 동안 아빠는 식도락 본부장님에서 어엿한 사장님이 됐다. 9년 동안 엄마는가게의 주방과 시설 위치를 훤히 꿴 ‘사모님’이 됐다.

아빠의 9주년을 축하하고 싶은데, 그렇게 버텨온 9년의 세월이 새삼 묵직하게 다가오는 탓에 무어라 어떻게 아빠랑 엄마에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 지 모르겠어서, 대신,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공개적으로 우리 아빠 가게 자랑이나 해야겠다. 우리 아빠 가게, 많이들 오라고. 고기가 참 맛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