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극장가에 화제가 됐던 영화가 있다. 아카데미 화제작 개봉 시즌인 2~3월에 아카데미 주요 부문 4관왕을 차지한 <버드맨>보다, 그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보이후드>보다 더 주목을 받았던 영화, 바로 <위플래쉬>다.movie_image (15)

<위플래쉬>는 영화에서 보여준 훌륭한 음악이나 배우들의 열연 같은 장점보다 오히려 서사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영화 외적으로 듀나, 황진미 등의 영화 평론가들 간의 논쟁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여러 가지 논점이 있었지만, 대개는 <위플래쉬>의 선생 역할인 플레처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훈육 방식이 예술을 위해서라면, 혹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당화될 수 있는가영화에서 그것을 긍정하고 있는 것인가가 논쟁이었다. 결론은 영화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든, 한국의 많은 관객들은 분명히 그 영화를 목표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부어야 하고 그렇게 쏟아붓도록 만드는 스승은 긍정할 만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소비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본 서사인데?!!

바로 1993년 임권택 감독의 대표작이자, 한국영화 첫 100만 관객 돌파 영화인 <서편제>다. 이청준의 단편 소설을 주연 배우인 김명곤이 각색했다. <서편제>의 유봉은 떠돌이 소리꾼인데, 부모를 잃은 여자아이를 소리꾼으로 키우기 위해 데리고 다닌다. 그 아이가 바로 유봉의 양딸 송화다.

movie_image (3)이미 전통 판소리와 창극이 엔카와 서양 음악에 밀려 소리로 먹고살기도 쉽지 않은 시대인 1950~60년대, 유봉은 소리꾼의 일념으로 송화를 혹독하게 가르쳐 ‘득음’의 경지에 오르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이가 든 유봉, 성인이 된 송화. 동생이 떠나고 상심해 소리를 그만둔 송화에게 유봉은 눈을 멀게 하는 약을 먹이고야 마는데…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송화의 제자인 ‘세월네’의 말을 빌리자면,

“딸 소리 좋게 헐라고 부친이 멀게 했다는 소문도 있고 자식이 도망갈까 봐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소리도 있고.”

“아무리 외롭기로서니 자식을 곁에 둘라고 눈을 뺏은 애비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겄는가. 좋은 소리를 헐라면 소리를 허는 사람 가슴에다 말 못할 한을 심어 줘야 하기 때문에 그랬다고요 허지만 그것도 어디 믿을 말이오”라는데…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로 그것도 어디 믿을 말인가…)movie_image (2)

유봉은 사실 플레처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괴팍하기 끝이 없다. 오랜만에 만난 판소리 동기들을 만나서도 독설을 내뱉고 싸움질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술자리에 송화를 데리고 가 소리를 시키지만 소리꾼을 무시하는 모습에 화가 나서 판을 뒤집는다. 예술적 수준에 대한 요구는 쓸데없이 높아서 겨우 약장사를 위해 호객꾼 노릇을 할 때조차도 북을 제대로 못 친다며 판을 뒤엎고 고수인 동호를 때린다. 영화 전반부 내내 유봉이 하는 것이라고는 소리하고 술 먹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고는 결국 최종적으로 딸의 득음을 위해서(라고 쓰고 딸이 득음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자신을 위해서라고 읽는다) 딸에게 눈이 머는 약을 먹이는 엄청난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다. 유봉은 플레처보다 제자(이자 딸)를 사랑했지만, 플레처보다 더 폭력적이었다.

이쯤 되면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인 각색자, 감독, 제작자의 머릿속에 가부장이란 어떤 의미일까가 궁금해진다. 자녀를 위한다는 명목이 있으면, 자녀의 미래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해도 되는 걸까? 1950~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지만, 90년대에 이 영화를 소비한 그 100만(전국 290만 추정)의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 질문은 과연 어떻게 작용했을까? 어떤 가부장과 스승의 모습(예로부터 우리나라에는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로서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의미의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통용되었다)이 있던 것일까.movie_image (1)

<위플래쉬>도 그렇고 <서편제>도 그렇고 그 영화에서 다루는 음악과 장면 자체만으로도 참 대단한 영화다. 딥 포커스로 처리된 진도 아리랑 장면은 우리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명나는지를 보여주는 한국 영화 속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것은 우리의 가부장적인 전통 속에서만 승계되는 것일까? 눈을 멀게 해야만 얻을 수 있는 ‘득음’의 경지에 오른 송화는 유봉이 말한 것처럼 부귀, 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좋았을까? 판소리하는 장면이 판소리하지 않는 장면보다 더 많게 느껴지는 이 영화의 모든 정서는 송화가 담당한다. 폭력적인 가부장의 서사 속에서 폭력이 내재되어 버린 가정폭력 피해자. 그리고 피해자인 송화가 본인 안에 내재된 폭력마저도 예술혼으로 승화시키는 것. 이것이 영화의 안타까운 정서다. 결국 유봉의 의도대로 눈이 멀고 득음의 경지에 올랐지만 이것은 유봉의 승리가 아니다. 송화의 한이라는 것은 단순히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멀게까지 했어야 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용서였던 것이다. 결국 플레처처럼 되어 버리는 앤드류에 비해 송화의 결말은 훨씬 더 성숙한 결말이고 그래서 더 잔인한 결말이다.

이쯤 되면 <위플래쉬>의 흥행 원인이 해명되는 느낌이다. 무려 22년 전에 예술혼을 불사르기 위해서 눈까지 멀게 해도 한국인의 ‘한’으로 무한 긍정하며, 대통령이며 정부며 방송이며 이것이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전통이라고 떠들어댔다. 그 당시 20~30대였던 이들이 현재의 부모가 되어 있다. 그 부모들은 자녀들이 <위플래쉬>를 보며 그들이 보았던 또 다른 버전의 <서편제>를 느끼게 될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영상자료원에서 서편제를 무료로 유튜브 채널에 풀어놓았으니 이를 통해 다시 보아도 좋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Z-MOMTUcVEc&feature=youtu.be

링크의 댓글을 보면 <위플래시> 평에 달린 댓글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 side <쥬라기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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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노사우르스의 발이 쿵쿵 하고 땅을 울리고 고인 물에 파문을 만들어 낸다. 마침내 티라노사우르스가 그 거대하고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전 세계의 관람객들은 마치 원시인류가 된 것처럼 감당할 수 없을 크기의 공포와 마주해야 했다. 1993년의 <쥬라기 공원>은 할리우드였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였다. 마이클 크라이튼이어서 가능한 소재였다는 점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여서 가능한 긴장감과 짜릿함이었다는 점에서, 루카스아츠와 ILM이어서 가능했던 특수효과라는 점에서 할리우드의 물량과 저력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요즘으로 치면 <어벤져스> 시리즈와 비슷한 느낌이다. <어벤져스>를 비롯한 히어로 장르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물량을 동원한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서브컬처를 존중해 온 탄탄한 문화적 역사다. 이 역시 할리우드에서만 가능한 영화가 아닐까.

<쥬라기 공원>이 나온 이후 한국에는 두 가지 흐름이 생겨났다. 한국영화는 저런 대작 블록버스터는 못 만들 테니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드라마와 코미디를 하자라는 흐름과 우리도 저런 블록버스터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흐름. 하나의 흐름은 그 이후 한국영화의 유행 장르가 된 서정적 멜로 신파물로 이어졌고, 하나의 흐름은 <용가리>, <쉬리>등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는 작품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