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 by 안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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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저 개새끼들 때문에…”

광화문 정부청사 옆을 지나고 있을 때, 한 경찰이 말했다. 모자를 눌러쓴 중년의 사내였다. 그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가 말한 개새끼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4월 11일 토요일 저녁, <대통령령(정부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인양 촉구 ‘총력행동’>은 해가 진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약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세월호 특별법을 무력화하는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인양 구호를 외쳤다. 대오는 청와대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버스로 차벽을 세우고 병력을 동원해 행진을 가로막았다. 이미 2011년, 경찰차벽으로 시위를 차단하고 시민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일은 위헌 판결을 받았으나 5년째 변한 것은 없었다.

“여러분 때문에 심각한 교통 정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즉시 해산하십시오.”

종로서 경비과장이 방송 마이크를 잡았다. 세월호를 단순 교통사고라고 묻어버리고 싶어하던 정권, 시도 때도 없이 경찰 병력으로 도로를 무단 점거하는 정권은 삼백 명의 죽음 앞에서 다시금 교통을 말했다. 광화문에서 경복궁으로 향하는 길은 경찰에 의해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CC by 이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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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과 시민들은 반대 방향으로 우회해 행진을 지속했다. 종각, 을지로, 시청. 사복 경찰들이 무전기를 들고 바삐 달라붙었다.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도 등장했다. 하루 전이었던 10일, 국무총리 이완구는 유가족들에게 면담을 약속했지만 유가족들을 맞이한 것은 이완구가 아닌 경찰이었다. 구조 작업에서 보인 무능함, 지켜지지 못한 약속, 남겨진 사람들을 짓밟는 공권력 앞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CC by 김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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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오는 광화문으로 돌아와 청와대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대치는 격화되었다. 경찰은 철과 플라스틱으로 된 폴리스라인을 설치했다. 한 참가자가 폴리스라인에 틴트로 세월호를 인양하라는 문구를 썼다. 수천의 경찰이 광화문에 깔렸다.

CC by 이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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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병력이면 우리 아이들 구했을 텐데.”

단원고 희생자인 오영석 씨 어머니가 울부짖었다. 경찰과 시민들의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우리 병력들, 차분하게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경비과장은 방송을 계속했다. 그는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현행범으로 체포 혹은 연행될 수 있다며, 위협적으로 해산 명령을 반복했다. 최루액이 등장했다. 최루액은 폴리스라인을 넘어 하늘에서도 쏟아졌고, 때로는 눈높이에서 직선으로 날아들기도 했다.

심지어 경비과장은 일부 집회 참가자들에게 최루액을 조준할 것을 요구했다. 명백한 불법이었다. 눈도 뜨지 못한 채 뒤편으로 물러난 사람들의 머리는 최루액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서기만 해도 얼굴이 따가웠다.

“우리 유가족들에게는 최루액 쏘지 마세요.”

놀랍게도 경비과장의 말이었다. 우리 병력, 우리 유가족. 경찰이 우리 유가족이라는 말을 썼다. 저들의 머리속이 분명해졌다. 경비과장은 깃발을 든 사람들과 마이크를 잡고 자유발언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채증하여 사법조치 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순수한 피해자’ 유가족과 ‘전문 시위꾼’의 견고한 이분법. 유가족은 순진한 피해자일 따름인데, 마이크 잡고 깃발 잡고 그들을 선동한 소위 반정부, 종북 세력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 저들은 수많은 인명의 손실과 지난 1년간의 행보에 대하여, 청와대와 정부, 구조와 체제에 직접 책임을 묻겠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와 공분이 가능하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CC by 이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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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연대 여러분, 경찰을 향해 물병을 던지는 등의 행위는 경찰의 실명을 유발할 수 있으며, 이는 폭력…”

“그걸 아는 새끼들이 캡사이신을 뿌려!”

그러거나 말거나 노란 옷을 맞춰입고 노란 우산을 든 세월호 유가족들은 대오의 제일 앞으로 나아갔다. 위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우산을 포기한 이후, 그들 역시 경찰의 무자비한 최루액 세례와 폭행을 그대로 당해야만 했다.

시간이 갈수록 경찰 폭력의 피해자는 늘어만 갔다. 세월호 유가족 네 명을 포함한 시민들이 연행되었다. 학생들도 있었다. 성공회대 총학생회장을 비롯, 국민대, 서울대 등에서도 연행자가 발생했다. 서울대 학생 한 명은 경찰에게 배를 걷어차이고 경찰 기동화에 밟혀야만 했다. 그는 수 시간이 지난 후에도 어지럼증과 구토감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폭력 진압은 멈추지 않았다. 설령 미신고될 집회일지언정 무조건 해산명령을 내리거나 참여자를 연행하는 등의 해산 시도는 불법이라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 시민들이 연행자 석방을 외쳤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오로지 유가족들만이 풀려났고, 나머지 연행자들은 경찰서로 호송되었다.

CC by 이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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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분노를 뒤로 하고,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1주년을 맞이하는 날, 박근혜는 콜롬비아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