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 미져리

91년 최고의 흥행작이자 전 세계적으로 이슈였던 작품은 케빈 코스트너의 감독 데뷔작 <늑대와 춤을>이었다. ‘주먹 쥐고 일어서’, ‘열 마리의 곰’, ‘머릿속의 바람’ 같은 인디언식 이름을 짓는 것을 유행시킬 정도였고 흥행과 비평 양쪽 모두 성공을 거뒀다. 아카데미에서도 그 열풍은 이어져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해 아카데미 7개 부문을 수상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과 점령군인 미군의 갈등과 우정을 그린 영화로 케빈 코스트너가 눈을 감고 팔을 벌린 채로 전쟁통 한복판을 말로 달리는 장면이 유명하다. 그러나…

내가 선정한 91년의 영화는 <미져리> 되시겠다. <미저리> 아니고 <미져리>다. 한국에서 외국영화 개봉하면 꼭 ‘ㅓ’를 ‘ㅕ’로 표기하는 경향이 있다. 딱히 90년대에만 그랬다고 보기도 힘든 게 최근 마블 영화인 <어벤져스>역시 어벤저스가 아니라 <어벤져스>로 표기했다. 외래어표기법도 어벤저스가 맞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암튼 <늑대와 춤을>도 참 좋은 영화긴 하지만 ‘아카데미가 좋아하는 느낌으로’ 감동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면 <미져리>는 사람의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고립된 공간에 광적인 행동을 보이는 정신이상자와 단 둘이 있어야 한다면? 이라는 생각만 해도 섬뜩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다. 아카데미를 위한 영화는 매년 만들어지지만, 이만큼 짜릿한 스릴러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misery1

<미져리>의 매력 1. 스티븐 킹의 원작

<미져리>는 세계 최고의 스토리 텔러라고 이름을 붙여도 될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의 원작을 영화화해서 대박을 친 영화들이 많다. <쇼생크 탈출>, <스탠 바이 미>, <그린 마일>, <미스트> 등등. 그 성공작들 외에도 스티븐 킹은 50편 이상의 장편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단편을 썼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단 영화는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모든 영화가 다 걸작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스티븐 킹 원작 영화라고 꼭 재미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명심해야 한다. X레기 같은 영화라고 욕 나올 만한 영화도 있다. (여기서 X는 기가 아니다)

<미져리>와 비슷한 느낌의 영화가 하나 있다. 역시 스티븐 킹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이다. “Here’s johnny!”라는 대사와 잭 니콜슨의 광기 어린 연기로 유명한데, 고립된 공간, 광기 어린 악당, 겨울, 그리고 소설가라는 직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심지어 두 소설 및 영화는 실제로도 연결이 되어 있는데 <미져리> 소설에 윗동네에 있는 오버룩 호텔에 폭발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오버룩 호텔은 바로 <샤이닝>의 배경이 되었던 호텔이다.

약 10년의 차이를 둔 두 영화는 감독과 배우의 역량이 충분히 발휘됨으로써 스티븐 킹 특유의 공포와 스릴로 관객들을 숨 막히게 하고 숨죽이게 만든다. 각각 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스릴러·공포 영화가 되었다.

<미져리>의 매력 2. 캐시 베이츠

<미져리>의 악역이자 주연인 애니 윌크스 역(미져리 역할이 아니다!)을 맡아 문자 그대로 소름 끼치는 열연을 펼쳤다. 캐시 베이츠는 <미져리> 이전까지만 해도 연기력 좋은 연극 배우출신 배우였지, TV나 영화로는 크게 주목받는 배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져리>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탄 이후로부터는 주연, 조연을 가리지 않고 얼마든지 좋은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됐다. 내가 <미져리>를 보게 된 것은 1991년의 겨울이었다. 난 꼬꼬마 초등학생이었고,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인 <미져리>를 극장 가서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려면, 방학 때 할머니네 놀러 가서 성인인 고모가 빌려주는 비디오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 당시 할머니네 있던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는 TV와 일체형인 비디오 비전이었다. 요새는 VTR은커녕 DVD플레이어도 사라져 가는 시대니까 비디오 비전 같은 건 구경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많겠지만,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장치였다.

암튼 무섭다는 말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영화를 틀었는데, 진짜 무서웠다. <사탄의 인형>시리즈나 <그렘린>시리즈를 보면서도 무서워한 적 없을 만큼 공포영화에 대한 내성은 좀 있는 편이었는데 <미져리>는 진짜 무서웠다. 클로즈업이라는 건 정말 미남미녀 배우 같은 잘생기고 멋있는 사람들한테만 해야지, 무서운 사람한테 클로즈업을 하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캐시 베이츠의 연기였다. 특히나 콧구멍이 그렇게 무서울 줄이야!nose

나의 공포는 단순히 나만의 것은 아니었던 게 ‘미저리’라는 말은 한동안 무서운 여자, 미친 여자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유통되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스토킹이나 스토커라는 표현이 널리 퍼지지 않은 터라 누군가에게 집착하거나 하는 행위를 주로 ‘미저리 같다’고 표현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의 악역은 ‘미저리’가 아니라 애니 윌크스다.

<미져리>의 매력 3. 소설가의 마음이란?

영화가 개봉할 당시에는 소설가와 그의 광적인 팬의 집착 정도로 인식됐지만, 지금에 와서 애니 윌크스와 소설가 폴 셸던 캐릭터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애니 윌크스는 단순히 광적인 팬이 아니라 폴 셸던을 만나기 전부터 영아 살해, 자기보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 살해, 부모 및 남편 살해의 혐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요즘의 말로 하면 사이코패스다. 특히 구원자적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이코패스로 볼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을 위기에 빠뜨리는 마치 경제를 살리기 위해 경제를 죽이는 누구 같은 캐릭터였던 것이다.

또 재미있는 것은 폴 셸던이 보여주는 복수극 서사다. 단순히 지옥 같은 애니 윌크스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마지막 폴 셸던의 복수는 상당히 잘 짜여 있다. 마치 이렇게 복수해야지라고 진작부터 마음 먹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폴 셸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일주일 내내 밤을 새워가며 과제를 끝마쳤는데 누가 그 파일이 담긴 USB를 ‘일부러’ 포맷해버렸다고 해보자. 그리고 상대의 USB를 내가 가지게 되었다면?!

revenge

아마도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폴 셸던이 그 후에도 성공을 죽 성공을 이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미저리 시리즈를 다시 또 쓰게 됐는지, 안 됐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시리즈로 성공한 작가는 다음 작품이 그만큼의 메가 히트를 기록하지 못하는 데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니까. 예를 들어, <해리포터> 시리즈의 J.K 롤링처럼.

스티븐 킹은 <미져리>의 미저리가 자신을 붙잡고 있었던 알코올 중독을 형상화시킨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미져리>에서 느끼는 공포는 단순히 미친 여자에게 납치된 것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남아 있는 나쁜 습관을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우리 안의 나쁜 습관들이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불태우기 전에 먼저 그것들을 떨쳐내야 한다는 교훈적인 결말을 남기고 총총.

<B-side>

전설의 시작, <나홀로 집에>homealone

해리 포터 시리즈에게 자리를 빼앗기기 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크리스마스 영화는 <나홀로 집에>였다. 재밌는 사실은 <나홀로 집에>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의 감독이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는 바로 크리스 콜럼버스. 이쯤 되면 크리스마스의 사나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나홀로 집에>의 히어로는 단연 맥컬리 컬킨이지만, 도둑 역을 맡은 조 페시와 다니엘 스턴도 빼놓을 수 없다.joe

1991년의 한국에서 조 페시는 <나홀로 집에>의 도둑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1991년은 조 페시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해이기도 하다. 로버트 드 니로, 레이 리오타와 함께 출연한 <좋은 친구들>의 토미 역할로서였다. 조 페시가 <좋은 친구들>에서 맡았던 역할은 기분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광적인 조증을 보이는 갱 역할이었는데, 그가 <나홀로 집에>에서는 머리에 불이 나서 소리 지르는 도둑 역할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없다. 게다가 <좋은 친구들>은 갱스터와 누아르, 마틴 스콜세지의 팬들이나 챙겨 보는 영화로 남았지만, <나홀로 집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중성을 확보했으니 이것 역시 아이러니다. 어찌 보면 케빈 코스트너, 캐시 베이츠, 맥컬리 컬킨에 못지않은 1991년의 승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