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의 시작을 동남아로 정했다. 그런데 바로 베트남으로 가는 것 보다 필리핀을 거쳐서 가는 것이 비행기가 더 싸게 나왔다. 딱히 가려고 한 곳은 아니었다. 세계일주의 처음이니 앞으로의 여행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필리핀 내에서 일정 부담은 갖기 싫었다.

드디어 마닐라에 도착! 뜻밖의 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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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의 나이아 국제공항.

2월 10일 밤에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 도착했다. 도착했을 때의 시간은 약 새벽 2시, 필리핀은 한국보다 1시간 느리니까, 1시다. 입국심사를 난생 처음으로 받아보고 짐을 찾아서 나왔다. 마닐라 시내까지 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다. 대중교통은 없고 필리핀의 밤 시간이 썩 안전하지는 않다. 세계일주의 시작은 노숙이 되었다.

세계일주를 나왔다고 생각하니 너무 긴장되고 무서웠다. 그동안 쭉 기다려왔던 순간이다. 아무리 고대하던 시간이더라도, 집 떠나와서 누가 마음이 편하겠는가? 괜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내 짐을 훔쳐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항 한구석에 벤치가 보였다.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이내 그 사람은 일어서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이제 벤치에 누울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충분했다. 보조배낭은 머리에 베고 메인 배낭은 다리 밑에 깔고 잤다. 처음에는 외국이라 생긴 불안함 때문에 잠을 설쳤다. 그러다가 곧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깨우는 것 같다. 잠에 깨서 정신 없는데 어떤 아주머니께서 나를 쳐다보며 뭐라고 말하신다. 아주머니 옆에는 아까 벤치에 앉아있던 그 남자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다른 곳에 가서 자라고 하신다.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이 미관상 안 좋으니 구석에 가서 자라고 하는 건 알겠는데 옆에 있는 남자는 뭐지? 알고보니 벤치에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 남자의 가방이 있었다. 아예 자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가방을 두고 잠깐 화장실 같은 곳에 다녀온 모양이다. 그 자리를 내가 점령해서 가방을 가져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세계일주 시작부터 현지인에게 민폐부터 끼쳤다. ㅋㅋㅋ

 

마닐라.. 나쁘다가 좋다가?

아무리 필리핀에 올 생각이 없었다지만 전혀 구경도 안 해볼 수는 없으니까! 미리 알아본 숙소까지 가기 위해 드디어 공항을 나섰다. 아차… 난 추운 한국에 있다가 지금 열대지방에 있다. 내 옷차림은 완전 한겨울이다. 공항 안에 있을 땐 별로 못 느꼈지만,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더운 공기가 나를 덮쳤다. 게다가 섬나라라서 그런지 공기도 습하다. 좁은 도로에 차가 많이 다녀서 공기도 상당히 탁했다ㅜㅜ. 딱히 오고 싶었던 곳은 아니지만, 첫인상은 별로다.

마닐라의 완전 유흥가에 위치한 우리 숙소! 우리나라의 유흥가에 가도 그렇듯이 뒷골목 세계에서 일할 것 같은 무서운 아저씨나 아가씨들이 호객행위를 한다. 세계일주 시작이라 완전 긴장되는데 그런 무서운 사람들이 있으니 괜히 조심하게 된다. 그리고 필리핀은 실내로 들어갈 때 경찰들이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를 한다. 난 당연히 무기나 마약은 없지만 긴장된 채로 경찰을 마주하니 불안함이 약간이나마 생기긴 한다. 즐거운 세계일주를 목표로 나왔는데 마음 상태가 영 아니다.ㅠㅠ

하루는 영선이와 마닐라 시내를 돌아다녔다.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호세 리잘이 처형되었던 리잘 공원에서 사진을 찍으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어떤 남자아이가 특이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영선이랑 내 카메라를 보고서 찍어달라는 의미로 포즈를 취한 모양이다. 멀리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러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 아이는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면서 친한 척을 해줬다. 잠깐이지만 같이 대화도 하면서 함께 사진도 찍었다.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와준 현지인 덕분에 외국이라 생기는 긴장감이 많이 해소되었다. 아주 잠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내 여행의 질이 높아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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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소년입니다.

그래서 마닐라는 어때?

고작 3박 4일 머물렀던 마닐라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날씨는 덥고 습해서 불쾌지수가 높았고 매연이 심했다. 현지인들도 대체로 친절한 느낌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호객꾼들이 많고 뜬금없이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멋지고 압도적인 볼거리도 없었다.

마닐라에는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 편의점 등도 있지만 현지식사를 파는 음식점도 있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들어가서 먹어봤다. 밥과 함께 돼지고기 장조림 비슷한 메뉴가 나왔다. 그런데 이건…? 도저히 못 먹을 맛이었다.ㅠㅠ 소위 날리는 쌀로 지은 밥이라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고 돼지고기는 엄청 짜면서 신맛까지 같이 났다. 돼지고기를 절인 그 간장 비슷한 액체가 문제인 것 같다. 맛은 없지만 억지로 다 먹었다. 분명 앞으로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을 많이 먹을 텐데 벌써부터 힘들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때 이 음식이 세계일주 중 제일 맛없던 음식이었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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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식의 이름은 ‘시식’

 

좋은 점을 찾아보자면 물가가 싸고 열대과일이 정말 맛있었다는 것!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마다 근처 대형마트에서 망고 쉐이크 슈퍼그란데 사이즈를 사마시고서 하루를 시작했다. 필리핀에서 망고에 중독되어 다른 열대지방 나라에서도 망고를 많이 사먹었다. 하지만 그 어디도 필리핀의 맛을 따라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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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과일은 역시 필리핀!!

마닐라 바닷가에 가면 가난하고 복잡한 빈민촌이 나타난다. 정체 모를 물건들을 팔면서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거기서 차로 불과 10분 거리에 으리으리하게 높은 빌딩들이 서있다.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옆에서 잘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이래서 마닐라에서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56

한국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 숙소 근처 대형마트에는 메로나, 붕어싸만코 같은 한국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노래방의 노래 목록에는 한국 대중가요들이 있었고 길거리에 한국 식당들도 보였다. 한국이 그리울 때는 아니었지만 외국이 아직 낯설고 두려울 때였다. 그래서 더 반갑게 여겨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저런 한국의 모습은 보통 한인 타운이나 한국인 여행객이 많이 오는 지역에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긴 그런 곳도 아닌데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필리핀에 한류가 어마어마한 건가?

필리핀의 다른 여행지는?

많은 여행자들은 마닐라보다는 세부나 보라카이 같은 섬에 많이 방문한다. 동남아의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도 있고 휴양지로도 갈 수 있는 곳이다. 숙박이나 언어, 여행정보 등 여행 인프라도 마닐라보다 훨씬 좋은 편이다. 세계일주 할 때는 돈도 없고 필리핀에 관심도 없어서 가보지 못했다. 나중에 돈과 여유가 생기면 필리핀이 아니더라도 동남아의 아름다운 섬에서 휴양을 할 기회를 가져보고 싶다.

잠깐, 필리핀은 어떤 곳이야?약 7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필리핀! 과거에 미국과 스페인의 침략을 받아서 언어나 문화에 그 잔재가 남아있다. 열대권에 위치한 나라여서 2월에도 덥고 습하다. 타갈로그어라는 현지 언어가 있지만 영어도 공용어로 사용한다. 영어를 할 줄 알면 필리핀에서 말이 안 통해서 고생하지는 않는다. 음식이 상하기 쉬운 열대지방이라 그런지 굽거나 튀긴 음식이 많고 양념이 매우 강하다. 도로 사정이 매우 복잡한 편이다. 차들이 보행자들을 배려해주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때문에 무단횡단을 많이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