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모든 것은 제 이름을 따라가게 되어있는 모양이다. KBS의 새 예능 ‘투명인간’은 말 그대로 투명인간이 되어 사라지고, SBS의 ‘즐거운 가’는 출연자와 제작진 스스로에게 즐겁냐고 되물어야 할 처지에서 폐지가 결정됐다. 술자리에서 친구는 한심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바보야, 정답은 가족예능이야.”

실제로 지금까지 등장했던 가족 예능은 조기 폐지된 것 없이 순항 중이다. 심지어 ‘아빠를 부탁해’는 타 방송사의 주말 드라마를 상대로 6.9%의 시청률을 보이며 무난하게 출발하기도 했다. 나는 친구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대꾸했다. ‘야, 근데 따지고 보면 즐거운가도 가족 이야기 아니냐.’ 친구는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호프집의 TV에서는 또 다른 새 예능 ‘용감한 가족’이 방영되고 있었다. 윤문식이 아빠, 심혜진이 엄마, 그리고 딸 하나, 아들 하나. 친구의 손가락이 TV 화면을 향했다. ‘저런 게 가족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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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게 가족이지’?

‘용감한 가족’의 구성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PD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바로 그런 가계도였을 것이다. 부모와 아들 딸 한명씩, 거기에 에라! 인심 썼다, 동생 부부 하나까지. 아예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내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다른 형태의 가족이 들어갈 기회는 없었다. 그렇게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하나의 가족이 완성된다. 그들의 모습은 자연스레 ‘정상 가족 신화’를 만들어 낸다.

신화화하는 것은 곧 기존 이미지가 가지던 의미에서 이미지 자체를 도둑질 해 와, 새로운 의미 속에서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족 예능이 만들어내고 있는 ‘정상 가족 신화’도 동일한 과정을 따른다. 아버지는 사회적 압박을 통해 그 유능함을 지속적으로 증명할 것을 요청 받고, 어머니에게는 자연스러운 마더링이 요구된다. 그러한 희생 속에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주체로서의 자식이 등장한다.

이토록 피곤한 가족의 초상이 자리잡기까지의 역사는 이미지 속에서 사라진다. 가부장제도, 노동자의 재생산도, 이미지 속에 남지 못한다. 그래서 ‘용감한 가족’에서 이문식은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심혜진은 집에 남아 저녁을 준비한다. 아들 민혁은 어머니에게 사랑을 듬뿍 쏟으며, 딸 설현은 싹싹하고 애교가 많다. 결국에 남은 것은 화목하고 단란한 ‘정상적인 가족’일 뿐.

비단 ‘용감한 가족’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아빠를 부탁해’에도, ‘슈퍼맨이 돌아왔다’에도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 외에 다른 형태의 가족은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이 틀에 맞추지 못하면 너희는 정상적인 가족이 아니야! 너흰 행복할 수 없어.’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혹은 ‘이 틀에 맞는 가족이라면 너희는 화목해야만 해. 그게 정상이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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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흰 행복해야만 해!

그러나 우리는 가족예능을 보면서 이런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바로 신화가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특별한 방식 때문이다. 신화의 의도는 파악되는 순간 그 힘을 잃는다. 너무 직접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의도가 파악되지 못하는 순간에는 무용해질 것임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신화는 다른 차원의 방식을 취해야 한다.

 

당연한 거니까, 어물쩍 넘어가는 그 순간

그것이 바로 명확히 설명되지는 않으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방법이다. 보편적이거나 영구적이지 않은 것을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다는 의미다. 수많은 가족예능을 접하는 동안 우리는 그 속에 등장하는 가족의 형태가 당연한 것임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식으로. ‘즐거운 가’의 경우 여러 가지 다른 문제들도 있었겠지만 이와 비슷한 느낌의 가족을 다루는 ‘룸메이트’가 가족예능의 축에 끼지 못하고 부진한 성적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시청자들의 눈에 그들은 잠시 동거하다 흩어질 출연자일 뿐, 친밀감을 가진 가족이 아닌 것이다. 자연히 몰입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maxresdefault (1)지금까지 보편성을 확보한 것처럼 눈속임한 ‘정상 가족’은 그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계속해서 신화를 창조해낸다. SBS의 새 예능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는 또 그래서 우려스럽다. 물론 아직 그 실체가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기획 의도에서부터 그렇다. 부모와 자녀가 갖고 있는 갈등을 소통을 통해 해결한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갈등이 방송 출연을 통해 해소되고 그들이 다시 화목한 가정으로 결합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유일한 해결방법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지 않겠는가. ‘그래도 부모잖니. 부모님이 계신 건 행복한 거야.’ 이 말이 폭력으로 다가오는 청소년의 수는 짐작할 수도 없이 많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는 괜찮지 않은 이들에게 괜찮음을 강요하는 프로그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정상적인 가족도 사실은 비정상적이다. 모든 ‘정상성’은 그 안으로 들어가면 괴물 같은 속내를 보인다. 우리가 바로 이런 점을 눈속임하려 들 때, 가족은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간다.

“인간이 더 이상 현실을 이미지 속에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변형시키기 위해 이야기하는 곳은 어디에서나, 인간이 자신의 언어활동을 사물들의 제조에 연결하는 곳은 어디에서나, 메타 언어활동은 대상 언어활동으로 되돌아가고 신화는 불가능하다.”

좌파의 신화에 관한 롤랑 바르트의 문장이다. 어쩌면 ‘용감한 가족’은 세계 곳곳의 다양한 가족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을 용기라고 불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짜 용기는 신화를 깨고 나와 변화를 외칠 때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화를 다른 신화로 대체하는 예능을 넘어, 텍스트를 통해 실재에 다가가려는 그러한 예능을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그 전까지는 삼둥이네의 행복한 모습도, 이휘재의 일하는 아내 문정원의 모습도, 진짜 내 삶이 될 수 없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