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 사랑과 영혼

얼마 전에 케이블TV에서 틀어준 <사랑과 영혼>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 시리즈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사랑과 영혼>이 얼마나 좋은 영화였는지를 이 영화를 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 꼭 설명하고 싶었거든.

<사랑과 영혼>은 걸작으로 분류되거나 영화사에 실릴 만한 위대한 영화는 아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복수를 한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거나 하는 내용의 서사는 딱히 영화가 아니더라도 민담 수준으로 전 세계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뻔한 이야기고, 유령을 표현한 CG나 마네킹 제작 기술도 요즘 보면 조잡하다.

하지만 흥행 부분만 따지고 보면, <사랑과 영혼>이 흥행 통계에서 사라지는 날보다 지구가 멸망하는 날이 더 먼저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메가 히트를 기록했다. 전 세계 수입 2억 달러를 넘어 1990년 개봉작 중 <귀여운 여인>, <배트맨 2>를 모두 제치고 흥행 1위를 차지하기도 했고, 한국에서도 168만 명으로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우기도 할 만큼 전 세계적 인기를 누렸다.

과연 <사랑과 영혼>의 매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1.무엇보다도 주연 배우들의 ‘잘생김’에 있었다!

주연을 맡은 패트릭 스웨이지는 당대 최고의 미남이었다. 화제작 <더티 댄싱>의 미남 댄서 역으로 인기몰이 중이었다. <풋 루즈>로 시작해 <토요일 밤의 열기>를 거쳐 내려온 춤 영화 계보의 막차를 탄 보람이 있었다.

그에 비해 여주인공인 데미 무어의 커리어는 형편없었다. 데미 무어가 예쁜 것은 다들 알았지만, 코카인 경험에 결혼까지 몇 차례 했고, 성공작은 전무한 배우였다. 전작인 <세븐 사인>도 대차게 말아 먹은 상황. 유일하게 이슈가 될 만한 것은 <다이 하드>로 이미 전 세계가 알고 있는 브루스 윌리스의 아내라는 것뿐이었다.

새옹지마랄까. 데미 무어는 이 영화로 브루스 윌리스가 <다이 하드>에서 기록한 흥행 스코어를 두 배 이상 기록했다. 전 세계적인 흥행이자 세계의 연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데미 무어의 ‘인생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아마 짧은 머리가 가장 잘 어울리는 여배우 투표를 한다며 데미 무어가 그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지 않을까. <사랑과 영혼>이나 <어퓨굿맨>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짧은 머리의 데미 무어는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깊게 아름답다.

2. 90년대 여성 트렌드

<사랑과 영혼> 속 데미 무어가 연기한 ‘몰리’라는 캐릭터는 2015년인 지금에 봐도 좀 남다른 데가 있다. 그녀는 매우 적극적이다. 남자처럼 자른 짧게 자른 헤어 스타일이나 남자들이 주로 입는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적극적인 면을 강조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여성이 등장하는 90년대의 흐름을 보여준다.

함께 살 집을 고칠 때는 같이 슬레지 해머를 들고 벽을 부수고, 먼저 남자친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먼저 결혼하자고 말하는 여자, 몰리.

남자 주인공은 좀 한심하다. 남자는 몰리가 사랑한다고 하면 그제야 ‘동감’(ditto)이라고 하고 몰리의 청혼에 한숨을 내쉬고 몰리와 동거를 시작한 것 때문에 생각이 많아져 괴로워서 잠을 못 이루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뿐이라면 그냥 소심한 남자겠지만 같이 연극 <멕베드>를 보러 가서 코를 골며 자고 몰리의 작품이 전시된 갤러리에 뉴욕타임스가 취재를 온다는 얘기를 듣고 <뉴욕타임스>를 비하하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찌질해보이기까지 한다.

그 시대의 남자상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한데, “여자는 땅, 남자는 하늘!”이라는 구호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라면 더더욱 그런 패트릭 스웨이지에의 꼰대적인 모습에 몰입하지 않았을까.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전 세계적인 흥행을 했다. 마초 꼰대를 지향하는 건 전세계 공통이다.

‘더 사랑하는 여자와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남자의 후회’라는 서사는 2000년대에 들어 <이프 온리>로 변주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제작자가 여배우 본인인지라 <이프 온리>는 사랑하는 남자에 포인트를 두지 않고, 사랑받는 여자에 포인트를 둔다. 이 영화는 남자들은 싫어하고 여자들은 좋아하는 영화로 탈바꿈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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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니퍼 러브 휴이트의 원맨쇼 <이프 온리>

3. 잘 짜여진 복수극 서사

영화가 시작되고 10분간 이 영화 제목이 왜 ‘GHOST’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10분에는 그 유명한 ‘언체인드 멜로디’ 신, 일명 ‘오~ 마이 러브’ 장면이 나온다

‘언체인드 멜로디’ 신은 로맨틱하기보다는 섹시하다. 짧은 머리의 데미 무어가 자기 사이즈보다 큰 셔츠 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 일명 남자친구 셔츠 모에를 보여주며 맨살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드러낸다. 이 장면 하나로 몰리는 죽어서도 지켜야 하는 여자 친구의 자리에 단박에 올라선다. 그렇다.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는 첫째, 데미 무어 때문이다.

결국 패트릭 스웨이지가 죽는 것은 20분이 지나서다. ‘사랑과 영혼’이라는 한국판 제목 역시 좋은 작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앞부분 20분은 ‘사랑’ 파트고 뒷부분은 ‘영혼’ 파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화의 설정만 따지고 보면 구멍투성이다. 애초에 샘이 천국에 가는 이유에 대해서 아무도 대답할 수 없다. 악역들이야 사람을 죽였으니까 지옥에 끌려가는 게 당연하다 쳐도 샘은 왜 천국행인 거지? 무려 영혼 상태로 사람을 두 명이나 죽였는데?!

물리력을 행사하는 걸 배우기 전부터 의자에 앉아 있는다든가 머리를 부딪친다든가 하는 물리 규칙에 충실한 것도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지만 아무리 귀신이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쳐도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해도 될 만큼 사후세계의 질서란 허술한가를 생각하면 역시 좋은 사후세계 판타지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90년대 최고 히트곡이었던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의 가사를 떠올리게 할 만큼 친구한테 뒤통수 맞고 목숨까지 잃은 데다가 ‘엄청 예쁜’ 여자친구까지 빼앗길 뻔한 남자의 억울함이 절절하게 그려지는 치정 복수극이라고 생각하면 생각 외로 흥미진진한 스토리 플롯이다. 특히 패트릭 스웨이지의 ‘내가 더 나쁜 놈이야’라는 듯한 주인공치고는 비열해 보이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과연 이것이 권선징악 스토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내 친구를 믿었기에 난 아무런 의심 없이 내 친구를 소개시켜줬고….

이런 허술한 설정을 잘 봉합시켜 주는 것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이 영화로 수상했다)에 빛나는 우피 골드버그의 존재다. 우피 골드버그는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소리만 지르는 남자 주인공과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 말고는 하는 것 없는 여자 주인공 사이에서 유머와 감동, 그리고 스토리 진행에서까지 가장 입체감 넘치는 캐릭터로 극을 이끌어 간다. 당시의 TV 프로그램에서는 그녀의 캐릭터를 패러디하며 한국 개그우먼들이 얼굴에 먹칠을 한 모습으로 출연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을 만큼 한국에서도 대인기였다. 지금에 와서 그런 패러디를 하면 흑인 인종 차별 논란을 불러왔겠지만 그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90년대였다.

 

2013-09-27 011

<사랑과 영혼>에서 우피 골드버그가 맡은 오다 매 브라운은 수녀들에게 400만 달러를 기부하게 되는데 그 은공 덕인지 그녀의 주연으로서의 대표작은 <시스터 액트> 시리즈가 된다. 본격 심 봉사 공양미에 눈 뜨는 이야기.

<B side>

B 사이드는 그 해의 가장 주목할 작품은 아니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작품을 꼽아본다.

1990년의 B 사이드는 <귀여운 여인>으로 택했다.

1990년의 흥행 퀸은 데미 무어였지만 1990년의 여우주연을 이야기하라면 줄리아 로버츠를 꼽을 만하다. <사랑과 영혼> 이후에도 골든라즈베리상 여우주연상 단골 후보로 연기적인 면에서 좋은 평을 듣지 못한 데미 무어와는 달리 줄리아 로버츠는 흥행성과 연기력 모두 인정을 받으며 90년대 최고 여배우로 자리매김했고 결국 2000년 <에린 브로코비치>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타낸다. 그 첫 번째 주연으로서의 시작이 <귀여운 여인>의 빅 히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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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여인>의 스토리는 그렇게 신선한 소재는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고전이나 마찬가지인 신데렐라 스토리였고(오드리 헵번 주연 <마이 페어 레이디>의 오마주가 눈에 띈다), 한국에서는 검열의 시기인 1980년대 유행하던 영화가 성매매 여성들이 주연을 맡은 호스티스 무비였기 때문이었다. 권선징악적 결말로 호스티스를 파멸시키는 결말에 익숙해 있는 한국 관객들에게 <귀여운 여인>속 콜걸의 해피엔딩만큼은 놀라웠을지도 모르겠다.

두 영화는 비슷한 점이 있다.

<사랑과 영혼>에 ‘언체인드 멜로디’ 가 있다면 <귀여운 여인>에는 ‘프리티 워먼’이 있다.

<사랑과 영혼>에 슬레지 해머를 든 몰리가 있었다면 <귀여운 여인>에는 직접 스포츠카를 모는 비비안이 있다.

<사랑과 영혼>에 ‘도자기’ 신이 있다면 <귀여운 여인>에는 ‘피아노 섹스’ 신이 있다.

두 영화 다 주체적이고 남성과 동등한 역할을 가진 것 같지만 경제적으로나 지위적으로 남성에 매여 있는 한계를 가진, 적당히 주체적인 여성을 주연으로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1990년 당시 미국의 성 평등 의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수준도 한국에서 받아들이기에는 정말 문화적 충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 한국에서는 직업을 가진 현대 여성이 주연인 작품들이 드디어 등장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