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이야기 – 최인호의 ‘깊고 푸른 밤’깊고푸른밤

선정의 변

– 지난 설 연휴에 할 일이 없어서 한국 영화 데이터베이스를 뒤적이며 볼만한 고전 영화가 없나 찾아보다가 안성기와 장미희 주연의 ‘깊고 푸른 밤’ 이라는 영화를 감상하게 되었다(합법 스트리밍, 결제 500원). 간통죄 위헌 판결과 맞물리는 아주 흥미진진한 영화였다. 그리하여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최인호의 ‘깊고 푸른 밤’에 닿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와 소설은 흰금과 파검의 차이처럼 확연하게 달랐다.images3429DTAK

– 영화와 소설 중에 어떠한 것이 더 좋았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둘 다 좋았다. 소설에서 인상 깊은 점은 ‘끝까지 간다’는 점이다. 대마초를 피운 죄로 한국에서 쫓겨난 가수와 까닭을 알 수 없는 분노를 가지고 도망치듯이 미국으로 온 소설가의 미국 여행기로 정리 할 수 있다.

여행에 가서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첫 문장

– 그는 약속대로 오전 여덟 시에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뻣뻣한 팔을 굽혀 손목시계를 보았다. 정각 아침 여덟 시였다. 누가 깨워준 것도 아닐 텐데 그처럼 곤한 잠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동물적인 본능이 그를 정확한 시간에 자명종 소리를 내워 깨워준 셈이었다.

달콤한 문장

– 뭔가 강렬한 인상을 머릿속에 접목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여행을 떠나고 나서 줄곧 머릿속을 지배해 온 일관된 흐름이었다. 마치 책을 읽다 인상적인 구절이 나오면 귀찮더라도 붉은 색연필로 언더라인을 그어서 표시해 놓듯이. 그래야만 책을 다 읽은 후 책장을 펄럭펄럭이며 대충 훑어보아도 인상적인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여행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 먼 후일에라도 머릿속에 각인 시켜 둔 풍경과 많은 기억을 떠올리려면 뭐든 집중력을 가지고 봐두어야 할 것이다. / 소설가인 ‘그’가 하룻밤 묶었던 집을 떠나며 하는 생각이다. 아무리 오랜 기간 여행을 했더라도 시간이 몇 주, 몇 달, 지나고 나면 여행지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들 중에 몇몇 장면들만 기억에 남는다. 사진으로 포착한 순간도 극히 일부일 뿐이다. 기억이 여행의 의미가 아니라면 집중력을 가지고 보는 시간이 여행의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씁쓸한 문장

– 그들은 형과 골치 아픈 정치 얘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었어. 그들은 그저 즐기기 위해서 정치 얘기를 꺼낸 것 뿐이었어. 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궁정동 파티 때 여배우 누구누구가 앉아 있었다는 화제를 꺼내고 그걸 즐기기 위해서 되풀이하는 것 뿐이야./ 티비에서 정치에 대한 풍자가 아예 사라진 현실에서 즐기기 위해서 정치 얘기를 꺼낼 수 없는 사회가 된 건 아닌지 지독한 씁쓸함에 젖어들게 된다.

정리하는 문장

– 방황도 하려면 미국에서.

보태는 문장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서 안성기와 장미희가 나오는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을 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때깔도 좋고 생각할 거리도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