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브’(Curve)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야구에서 투수가 던지는 변화구도 있고, 좌회전 우회전 급커브도 있다. 머리글자 C의 생김새처럼 커-브라는 발음 자체가 커다란 굴곡을 그리는 느낌이 드는, 외래어라기에 너무나 친숙한 단어다.

하지만 그 단어에서 파생된 ‘커비’(Curvy)라는 형용사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지 않는다. 네이버 사전에 치면 ‘굴곡이 많은’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사람의 몸매와 관련해서 특히 많이 쓰이는 단어다. 단순히 ‘빼빼 마른(skinny)’의 반대말로 ‘통통한’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뭔가 아쉬운, 굴곡진, 곡선이 많은, 풍만한, 뭐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딱 알맞은 찰진 한국어 번역이 떠오르지 않아서, 이 글에서는 ‘커비’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겠다.

사용 예시를 보자. 천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나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 미국 드라마 <프렌즈>에 이 단어와 관련된 명장면이 있다. 시즌 10의 5번째 에피소드에서는 크리스티나 애플게이트가 레이첼의 여동생으로 카메오 출연한다. 그녀는 외모가 관심사의 전부인 철없고 싸가지 없는 금발 미녀 캐릭터인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치즈와 페퍼로니로 범벅된 피자를 먹으려는 조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Friends - [10x05] - The One Where Rachel's Sister Babysits.mkv_20150310_161946.377

“그거 정말 먹고 싶니?(Sure you wanna eat that?)”

그러자 우리의 귀염둥이 조이는 피자를 턱 내려놓고, 허리에 손을 척 얹고, 당당하게 외친다.

Friends - [10x05] - The One Where Rachel's Sister Babysits.mkv_20150310_162015.222 Friends - [10x05] - The One Where Rachel's Sister Babysits.mkv_20150310_162110.243 Friends - [10x05] - The One Where Rachel's Sister Babysits.mkv_20150310_162121.571

“난 ‘커비’하고, 난 그게 좋아!(I’m Curvy, and I like it!)”

사실 프렌즈 팬들 중에 이 장면을 ‘명장면’으로 꼽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스키니’해 본 적이 없는 ‘커비 걸’에게만큼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명장면 명대사였다. 이 장면을 본 이후로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속으로 외친다. “그래 씨발, 내 몸은 존나 울퉁불퉁하고 곡선이 많지. 그리고 난 그게 좋아!”

Curvy Girl을 탄압하지 말라

세상에는 참 나쁘지 않은데 나쁘게 쓰이는 말들이 많다. 그 말을 나쁘게 쓰는 한국 사회가 나쁜 걸지도 모른다. ‘통통하다’는 말도 그렇다. 단어 자체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전혀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많은 사람들은 ‘너 뚱뚱하다’고 하면 따귀 맞을까봐 살짝 순화된 ‘통통하다’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을.

내 주변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여자애들이 이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본다. 여성의 몸매를 뚱뚱-통통-보통-날씬-마름의 5단계 스케일로 파악한다고 치면, 뚱뚱하다는 표현은 여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금기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혹은 연예인에 대해서만 쓰는 단어다. 내 주변 여자들은 나에 대해서는 통통하거나 보통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보다 훨씬 마른 자신은 뚱뚱하다고 한다. 참 신기한 현상이다. 언제부터인가 ‘통통하다’는 말도 썩 기분 좋은 칭찬은 아니게 되었다.

‘덩치’라는 단어도 그렇다. 한 친구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데, 라고 말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전혀 비만이 아닌 친구였기 때문이다. 통통하다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우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 덩치 크다는 소리를 요새 너무 많이 들어서…”

다이어트 필요성이 전혀 없는 아리따운 여성을 이렇게 고민하게 만드는 데 사용되다니, 참으로 나쁜 언어 사용이 아닌가! 자매품으로는 ‘등빨’, ‘떡대’ 등이 있다.

이 모든 단어는 ‘커비 걸’들을 탄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오직 ‘스키니’한 몸매, 마른 몸매, 젓가락 같은 몸매가 최고인 것처럼 전제해 놓고, 그 나머지는 다 뚱뚱, 통통, 덩치, 등빨, 떡대쯤으로 치부한다.

‘커비’처럼 스키니의 반대지만 절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단어가 없는 것 자체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한 때는 인터넷에서 파는 옷들이 죄다 가슴은 끼고 몸은 부해 보이는 임산복st. A라인 투성이기도 했다. 그래 놓고 뻔뻔하게 ‘프리 사이즈’라고 쓰여진 걸 보면 화가 났다. 그 옷 속에서 내 가슴과 허벅지는 결코 프리할 수 없었다.

참고 영상 : Buzzfeed 11 Struggles Curvy Girls Know Too Well. 이 영상에 공감한다면 당신도 Curvy Girl! 근데 양인 언니들의 커브 각도를 보니 난 명함도 못 내밀겠다…

만국의 Curvy Girl이여 단결하라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 웨이트, 스트레칭, 요가, 필라테스. 운동을 하면 몸의 ‘커브’를 더 굴곡지게 만들어 주는 점도 좋고, 스스로 신체의 유연성과 힘을 유지하고 발달시킨다는 점에서 자신감과 성취감도 느낀다. 그래서 운동법 같은 것을 자주 찾아보는데, 꼭 빠지지 않는 댓글이 있다. “이거 하면 덩치 커지는 거 아닌가요?“ “이거 하면 허벅지 커지는 거 아닌가요?”

그래,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 새처럼 얇게 드러난 견갑골, 가느다란 허벅지, 젓가락 같은 종아리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 여성스러운 것, 섹시한 것은 아니다. 육덕진 커비 걸의 매력을 무시하지 마라. 허벅지 커진다고 큰일나는 거 아니다. 개인적으로 허리의 군살도 섹시한 요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오직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사용해 신분 상승을 꿈꾸는 여종 귀녀의 몸매를 묘사할 때는 그녀의 ‘절구통 같은 굵은 허리통’이 항상 언급된다. 몸의 면적이 크면 큰 것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다.

말은 쉽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태어나 주변 사람들이 내 몸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코멘트를 다는 것을 피할 재간은 없다. 웃기는 일이다. 웃기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더라도, 광고 속 뮤직비디오 속의 콜라병 같은 미녀들을 내 얼굴보다 더 자주 보다가 문득 샤워실 거울 속 나의 몸을 보게 되면, 무의식 중에서라도 비교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HWE_0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이 지지 않으면 된다. 내가 내 몸을 탄압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누구도 말려주거나 보호해 줄 수 없다. 덩치가 큰 게 고민이라며 한숨 쉬던 친구, 하루라도 체중계에 올라가서 몸무게를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할 때가 있었다던 다른 친구, 치마를 입으면 누가 자신의 다리를 보고 욕할까 무섭다던 또 다른 친구… 거울과 체중계를 보는 스스로의 시선이 잔혹해질 때마다, 나는 친구들이 나와 함께 조이의 당당한 외침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I’m Curvy, and I like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