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점은 현재로, 이제 내 이야기는 그만 하려 한다. 정리하고자 하는 뜻에서, 내가 이때까지 써 왔던 내 이야기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써 보고 싶다.

<고생이 미덕이 되는 사회>로써 내가 그리고자 했던 사회의 모습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아르바이트에서 부당한 상황을 참아내는 것이나, 입시에서 14시간 공부의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나, 더 나아가 수많은 스펙을 따야 하는 힘겨운 과정을 참아내는 것이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 그 단면들이 부당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도 맞지만, 그것을 ‘미덕’으로 받아들이고, 그 빡센 과정을 재생산해내고 다시 강제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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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가장 큰 원인은 우리가 받아온 교육에 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꼭 점수로 누군가를 누르는 것만이 아니라, 그 기준이 뭐가 되었던 우리는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고 배워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도 아니다. 선생님이 남들을 짓밟으라고 공공연히 떠들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 제도 안에서, 우리가 만든 규칙이고, 우리가 그 안에서 스스로 살아왔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남들보다 우위에 서는 것에서, 좋게 말하면 인정받는 것에서 행복을 느껴 왔다. 일에서든, 공부에서든, 운동에서든, 술 문화에서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자긍심을 느끼고,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상황에서 의미를 찾기 위한 인간적인 반응일 수 있다.

다만, 이 ‘인간적인 반응’에 굳이 태클을 걸고 싶은 이유가 있다면, ‘misfits’, ‘부적응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전혀 그 반응에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난 고생이 미덕이 되는 사회에서, 그 고생을 인내하고 버텨내는 당신에게 박수를 보낸다! 다만, 그 고생을 ‘당연히 해야 할 노력’이라던가, 혹은 ‘미덕’으로 치부하지 말아 달라. 비단 승리자만이 아닌, 모두에게 하는 소리다. 다수에게 맞는 기준은 있어도, 모두에게 맞는 기준이란 당연히 없다. 이 점을 인정하는 순간, 당신은 당신 또한 ‘misfits’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마찬가지고, 현재 우리 20대를 가장 힘들게 하는 취업시장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말일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부적응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한경쟁을 하는 이 시대는, 사회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누군가를 끊임없이 부적응자로 강등시키려는 우리의 태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그 태도는 결국엔 스스로 우리들에게 돌아와, 우리들을 옥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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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적응자’들에 대한 배려도 빼 놓지 말아야 한다. ‘부당한 사회에 짱돌을 들고 일어나라’는 <88만원 세대>의 말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상황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 조금 힘들더라도, 울퉁불퉁한 기준에 자신을 꾸역꾸역 끼워 넣고, 어려운 현실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살아가려 할 뿐이다. 단지 그 울퉁불퉁한 기준이, ‘misfits’보단 ‘조금 더’ 잘 맞는 ‘fits’들일 뿐이다. 그들은 괴물이 아니다, ‘학점충’도, 신자유주의의 자식도, 비인간적인 엘리트도 아니다. 그저 우리 세대를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같은 20대 일 뿐이다.. 그들의 피땀 또한 misfits 못지 않게 존중을 받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간의 대화가 아닐까 싶다. <피로사회>라는 책에서는 ‘면역적 패러다임’의 종말을 고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투쟁하며, 싸움을 걸어 무언가 바뀌던 시대가 지나갔음을 느낀다. 우리를 옥죄는 것이 결국엔 우리의 모습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실마리라고 해야 할까, 우리 모두는 다 조금씩 지쳐 있다. 서로가 서로를 조금 다른 눈빛으로 바라봤으면 한다. 나에게 그 계기가 되는 사건은 학원의 여자아이에서 부대찌개집의 나를 본 사건이었다. 아프다면, 아프다고 말하자,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라도, 누구다 다 겪는 고통이라도, 굳이 꺼내서 말하자, 난 때문에 이 글을 썼다. 다만 그것이 누군가를 향한 질타라거나, 사회를 향한 비난이라던가, 그런 방식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은, 서로를 ‘fits’라던가 ‘misfits’라던가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너와 내가 다를 바 없다는 시선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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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끝내기 전에 여담이지만, ‘노력’과 ‘고생’의 경계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다 같이 고민해봐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학원 강사 일을 하고 있을 때, 고1 남자 녀석들이 단어는 지지리 외우지 못했어도, 롤 챔프 이름이나, 챔피언 별 대응법이나, 아이템빌드 따위를 나보다 정교하게 외우고 있는 것에 놀란 적이 있다. 누구나, 어떤 인간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뇌가 그 능력을 훌륭하게 발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필자도, 대학 수업에 있어서도 ‘대학 영어’, ‘글쓰기’ 따위는 그 강도가 높지 않음에도, 너무 하기 싫어서 F와 C, B의 경계를 오락가락 했던 적이 있다(..) 다만 반대로 관심 있는 수업을 들을 때에는, 굳이 과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레포트를 쓰거나 논문을 찾아보거나 했던 적이 있다.

무슨 말이냐고 ? 노력은 ‘좋아서 하는 것’일 때 그 진가를 발한다. 적당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사람은 자발적으로 노력한다. 반대로, 맞지 않는 기준에서 노력을 강요당할 때, 이 노력은 ‘고통’이 된다. 그 고통을 견뎌내고 적응하는 것이 ‘미덕’이라 칭송받기 때문에, 사실상 지금에 있어서 변화의 가능성은 잘 보이지 않는다… ‘미덕’을 문제 삼는 사람은 ‘낙오자’라던가, ‘부적응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력을 펼쳐 나갈 배경이나 기준은 분명히 사람마다 제각각 다를 것이다. 이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모두가 진정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아는 우리들과, 교육과, 사회와, 시장이 섰을 때에야 misfits와 fits를 나누는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존중하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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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Th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신이시여,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변화시키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Reinhold Niebuhr(1892 ~ 1971) – Serenity prayer(평온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