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뜻을 관철하지 못해 죄송하지만 (……) 국민의 뜻을 반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국민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고 믿으며 국민의 마음, 국민의 입장에서 국민과의 소통에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겠다
-이완구 신임총리

 (임명동의안 처리를 통해) 새정치연합이 더 변화하고 단합해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최선을 다할 것
-양승조 새정치민주연합 신임 사무총장

가장 최근 이슈인 이완구 총리 취임 이후 나온 말들을 갈무리해봤다. 한 줄 짜리 짧은 인용 세 번에 나온 ‘국민’이라는 단어만 7번이다.

멀리 볼 것 없이 대통령, 총리, 장관 등 각계 인사의 취임사 및 연설, 국회의원의 발언만 살펴봐도 ‘국민’이 얼마나 다양하고 쉽게 많이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담배 값이 올라서 고통을 받는 것도 국민이고, 담배를 펴서 건강이 나빠지는 것도 국민이고, 부자 감세에 부담이 느는 것도, 복지가 부족해 신음하는 것도, 점점 가난해지는 것도, 세금 부담이 심해지는 것도, 총리 인준을 반대하는 것도, 찬성하는 것도, 사법부를 신뢰하지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모두가 국민, 국민, 국민이다. 국민이라는 말은 얼마나 쉽고 간편한지. 국민3.0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WCO_034

‘국민’이 정치인이나 언론 등에 의해 쓰이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1. 정치적 발언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국민의 뜻으로 바꾸어 표현하면서 자신의 발언을 강화하는 경우
  2. 여론조사 등을 통해 얻어진 통계를 분석해 임의적으로 구현해낸 실체가 국민으로 표현되는 경우다.

두 가지 경우가 정치적 발언이나 평가에서 개별적으로 작동한다기 보다는, 후자를 기반으로 설정된 ‘국민’을 전자의 경우에서 발언ㆍ평가의 맥락과 엮어 표현하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작동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예를 들어 “기업은 더 부자가 되어 가는데 국민은 가난해진다”는 발언을 보라. 여기서 ‘국민’은 ‘서민’을 의미하지만, 정치적으로 국민이라고 표현하면서 발언에 힘을 실어준다. 한편 이 발언의 배경에는 국제수지와 근로자실질소득 통계가 ‘국민’이라는 표현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것을 ‘국민의 함정’이라 부르고자 한다

어디서든 국민, 국민 하는 말을 들으면 ‘나’ 혹은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을 생각하고 우리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들이 생각하는 건 통계의 결과를 정치적으로 구현해낸 허구적 실체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흡연자이고, 취업이 힘들며, 동성애자를 지지하고, 세월호 인양을 반대하는데 매 이슈마다 나는 국민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는 것. 한 번도 여론조사에 참여한 적 없고, 한 거라곤 선거밖에 없는데, 나는 어떻게 국민이 되었다가 안 되었다가 하는지. 국민인 듯, 국민이 아니고, 국민인, 도대체 난 누군가?

GettyImagesBank_88366752_M

한국 여·야당 간 가장 큰 차이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의석 수라고 대답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여·야당은 차이가 없는 반면 공통점은 많다. 핵심 의제가 전 국민적, 국가적 의제로 설정되어있는 한편, 그만큼 다른 갈등(균열)에는 무관심하다.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고 국민의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겠다며 복지, 경제 등에는 크게 눈을 돌리지만, 정작 노동자, 자영업자, 종교 등 다른 이익 집단 등이 연관된 갈등 문제, 성 소수자, 사회취약계층, 청년 문제 등에 있어서 지역 정당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두 정당 모두 가만히 서로의 눈치만 보면서 있으면 둘 다 아무도 잃지 않는데, 한 쪽이 나서면 둘 다 한 지지층을 얻고 다른 한쪽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초에 예컨대 자영업자에게 지지 받는 정당이란 없다. 대형마트가 무분별하게 생겨나 자영업자들이 반발하는 이슈가 떠올랐을 때 누가 언론을 통해 이슈를 먼저 선점하는 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현재 한국 정당 정치를 과점 정치라고 할 수 있다면, 나는 이를 정당의 담합이라고 부르겠다. 이렇게 모든 정치 구성원들은 하나의 회색 지대, ‘국민’으로 통합되어 버린다.

모든 곳에서 나를 대표하려고 하지만, 결국 어느 곳에서도 나는 대표되지 않는 상황. 지금 한국 민주 정치가 처한 현실이 이렇다. 가장 다양한 갈등이 발생하고 다양한 이익이 대표 되는 것이 민주주의고 민주 정치여야 하는데, 대통령과 각 정당은 저 작은 균열들에는 눈을 돌리지도 않고 국민 통합을 외치면서 국민이라는 큰 개념으로 봉합부터 해 놓으려 한다. 그렇게 저 통합의 정치로부터, 나는 유리되어 간다.

AA052360

몇 년 전부터 소통이 화두였지만, 중요한 건 소통이 아니다. 아무도 곰 인형에 대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을 소통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남자친구를 앉혀 놓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도 소통이라고 하지 않는다. ‘국민과 소통하며’는 그래서 의미 없이 허공에 울리는 말에 불과하다. 대상인 ‘국민’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와 소통하려 하는가? 누구의 지지를 어떻게 얻고 싶은가? 결국, 누구를 대표하고 싶은가?

더 이상 국민, 국민 하지 말라. 국민은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