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벚꽃이 핀 캠퍼스를 함께 거니는 것, 시험기간 언저리에 도서관에서 데이트를 하는 것, 학교 내의 데이트 명소 등을 손을 꼭 잡고 돌아다니는 것, 이런 캠퍼스 커플(일명 CC)의 로망은 어느 학교 어느 학생들한테나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별로 그런 것들이 현실감 있진 않았다. 왜냐면 내가 교내에서 그런 짓을 하면 그냥 걸어다니는 커밍아웃이 될 테니까.

하지만 교내에도 우리는 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할 뿐–조심성이 없는 커플이라면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그만큼 보통의 이성애자들은 주변에 동성과 연애하는 사람이 많다는 자각이 별로 없다. 캠퍼스 언덕길에서 마치 옷장을 입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숨기고 다니는 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좀 아무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연애담이나 풀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민낯이라는 전체 타이틀에는 이게 좀 더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슬슬 다시 나 개인의 이야기를 좀 털어놓을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너무 일반적이거나 편견 깨기, 정보 위주의 이야기를 하면 나 스스로도 쓰기가 재미없는걸. 반응을 보니 읽는이들 역시 재미없어 하는 것 같고. 그리고 이런 거 쓰면 나름 CC를 꿈꾸는 새내기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사실 하지 않도록 마음먹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 없는 1%의 희망을 품어 봅니다.

어디서 만났나요

사실 성 소수자 커플이 만날 구석이 그렇게 많진 않다. 인터넷이 가장 흔한 경로다. 하지만 나는 정말 우연히도 친한 친구, 내가 먼저 커밍아웃을 했던 친구가 얼마 안 있어 내게도 커밍아웃했던 것이다.

사실 그 때 내 머릿속에는, ‘아, 언젠가 이 애랑 무슨 일이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에 친구라고 부를 사람들은 대부분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그 애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오히려 호감 가는 사람이었다. 지적이었고, 논리적이며, 잘 화를 내지 않았다. 취미도 맞는 듯하고, 외모도 딱히 못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나한테 약간 과분할 만큼 잘 생겼다. 그 애가 내게 사실을 말하고, 내가 약간 힘든 시기를 거치자마자 나는 연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썸을 만들기는 쉬웠다. 원래 친한 친구였기에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이전에도 적지 않았다. 다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술을 같이 먹는 것에서 영화를 보거나 커피를 마시는 일로 옮겨간 정도였고, 그건 정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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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점에 그가 나에게 정말 호감인 사람으로, 애정의 대상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그러나 약간 삐딱한 시점으로 바라보자면, 주변에서 사람을 구할 수 없고, 인터넷으로 만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 줄어들기 시작할때쯤 이미 어느 정도 신뢰가 형성된 친구가 나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어떻게든’ 연애를 하고자 목숨을 걸었던 내가 내 마음을 속여서 ‘너는 쟤를 좋아해. 연애해.’라고 조종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든다. ‘아무랑 대충 사귈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건 아닐까 하고 반성하게 되는 시간이 종종 있다.

뭐 그건 그거고, 고백은 여전히 어려웠다. 몇 번을 해봐도 고백은 진짜 어렵다. 어느 정도 넘어왔다고 생각해도 사람 마음은 계산할 수 없는 여지가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먼저 말하다가 거절당할 것이 두렵다. 하지만 아무튼 고백하고, 하루를 넘겨 대답을 들었다. 그렇게 CC가 시작됐다.

예상과 현실의 차이를 겪는 시간

많은 CC가 그렇지만,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은 CC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그리고 그건 내게는 정말 장점 같은 단점으로 다가왔다. 난 어느 정도 집착이 있어서 연락이 안 되는 것도 답답하고, 보고 싶은데 못 보는 것도 싫다. CC를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값은 어느 정도 그런 점과 상통해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보고 싶을 때 (그리고 거의 항상) 만날 수 있겠구나. 또 소문으로만 듣던 도서관 데이트, 캠퍼스 나지막한 오솔길 같이 걷기, 기타 등등 머리에 쌓여가던 판타지들.

사실 친구에서 애인이 되면 생기는 ‘굴레’가 있다. 오늘 안 씻고 나와서 만나기 싫다거나, 너무 피곤해서 보기 힘들다는 말이 맨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됐다. 친구일 때는 그것이 아무런 불편함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이 애랑 사귀기 너무 힘들다, 고 말할 건 아니었지만… 아니야. 힘들었다. 솔직히 매우 보고 싶은데 안 씻어서 못 보겠다니. 친구일 땐 안 씻은 얼굴도 백만 번은 보았는데.

기대했던 교내 데이트는 우리 둘 다 남자인 이상 예상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 옆자리를 예약하면 뭐하나, 손도 잡을 수 없고, 꽁냥꽁냥 할 수도 없다. 도서관은 이상하게 커플로 가면 오픈된 장소로 탈바꿈한다. 그렇다고 정말 파란 하늘 밑의 캠퍼스로 나왔을 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살피면서 손을 잡아야 했다. 결국 둘만 있는 장소를 찾아가려니 학교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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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아는 친구는 필연적으로 많아서, 데이트 장소는 캠퍼스에서 떠나갔다. 이건 뭐, CC의 로망을 기대했더니 그런 건 쥐뿔도 없었다. 교내의 명소–그러니까 사람 잘 안 오고 으슥한 곳–에는 먼저 온 이성애 커플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맞불작전을 치르기엔 우리는 학교를 다닐 나날이 다닌 나날보다 훨씬 길었다.

결국 우리가 만나는 곳은 으슥한 과방이었다. 제발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빌었던 시간만 수십 시간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풋풋한 TV드라마를 기대했지만 음침하고 어두운 분위기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CC는 공개연애일때나 새콤달콤하기에, 우리는 누릴 수조차 없엇다.

It’s a terrible love when I’m walking with spi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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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애는 한 번도 100일을 찍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번엔 그 절반조차 걸리지 않았다. 그 계기는 굳이 따지자면 부담감 문제였다. 그는 무려 부모님한테 커밍아웃을 했다. 그 때 그 애를 딱 한 번 ‘뭐지 이 병신은’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분들은 자식의 연애를 걱정했고, 내 남친을 소위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 노력하셨다. 당연히 나는 의심받지 않기 위해 친구인 척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찍 들어오던 막내아들이 자주 늦자 부모님들은 누구랑 그렇게 노냐고 물었고, 요령 없던 그 아이는 내 이름을 가장 많이 말했다. 그리고 들켰다.

고백만큼이나 헤어지는 걸 선언하는 것도 참 항상 어렵다. 내가 먼저 사귀자고 해 놓고,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다. 거기까지 이르는 데에는 많은 고민을 했지만, 같이 있는 것이 괴로움처럼 느껴지게 된 순간 난 더 오래 연애를 지속할 수 없었다. 친구인 그는 내게 빛이 났지만 연인인 그는 나의 쥐덫이었다. 나를 해치는 것은 연애일 수 없는데, 우린 서로의 발목을 잡고만 있었다.

헤어지는 건 보통의 커플들과 같았다. 다만 조금 더 힘들었던 건, 우리가 기본적으로 비밀연애였다는 사실이다. 사귀는 당시엔 몇몇 친구들이 약간씩 눈치를 채긴 했지만 당연히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좋게 헤어진 게 아니었기에 나는 당연히 그를 마주쳐도 모른 체, 그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사실 그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부터가 내게 너무 기피하고픈 일이었다.

둘을 함께 아는 친구들은 내게 말했다. “그렇게 친하더니 왜?” 하긴 내가 그를 기피하고 있는 장면은 그와 사귀고 헤어진 사실을 모르면 굉장히 어색해 보였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난 속시원하게 “응 사귀고 안 좋게 깨져서 보기 싫어”라고 대답은 못하고, 그냥 좀 그래, 싸웠어 정도로만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다르지 않은 것, 다른 것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뭐라고 감상할까. 어쩌면 누군가는 엄청 다른 내용을 상상하고 이 글을 읽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뭔가 독특한 이야기를 하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래를 향한 고뇌가 푹 담겨 있거나, 소수자의 설움을 둘이 같이 반감하는 연애를 하지 않았을까 기대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전혀 아닙니다. 우리도 20대 초반의 연애는 정말로 평범한 어린 연애로 시작해서 어린 연애로 끝이 났어요. 우리는 의도적으로 미래가 우리에게 어떤 힘듦을 가져다줄지 무시했고, 20대 초반의 연애가 많은 경우 영원할 수 없고, 서로를 평생의 파트너로 맞이할 자신은 없었기에 언젠가 당연히 헤어지게 될 것처럼 사귀었습니다. 다른 걸 기대했다면, 고작 우리가 몇몇 장소에서 대놓고 데이트하기 힘들었던–남녀 사이에서도 그러한–비밀연애의 고충밖에 없을 겁니다. 왜냐면 우리도 결국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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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쉬우니까 무언가 이성애자 남성과 내 경우가 정말 다른 것 하나를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그 친구는 헤어진 바로 다음 학기에 군대를 갔다. 덕분에 마음 졸이며 학교 다닐 필요가 없었다. 이제 봄학기에 그가 복학하면 학교 어떻게 다니지… 그리고 난 친구들한테 어쩔 수 없이 전애인은 1년 교환 갔는데 거기가 좋다고 1년 더 눌러앉았다고 말하고 다닌다. 말할 때마다 나라나 지방이 대충대충 달라지는 건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