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은 바, 벤처는 살인적인 업무강도와 열악한 환경을 꿈과 열정과 비전으로 극복해나가는 열정노동의 근거지라 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대기업의 딱딱한 사내문화와는 다른 인간적이며 유연한 근무조건을 위해 월급을 희생하는 곳이라고도 한다. 물론 필요 이상의 과장이며 억울한 벤처가 많겠지만, 뭐 또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가 일했던 곳은 벤처라기에는 좀 황송한 곳이었다. 대기업 사내벤처였다가 전략적으로 팀이 떨어져 나온 회사였다. 그래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갓 졸업한 대학생들이 모인 그런 조직은 아니었다. 벤처라기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대기업 자회사에 가까웠다.

일장일단이 있었다

장점은 우선 돈. 지원해주는 곳이 있으니 벤처기업에서 흔히 겪을 법한 돈 부족이 별로 없었다. 월급 꼬박꼬박 받았고, 장비가 필요하다 하면 재깍재깍 사왔으며 복지비까지 빵빵하게 나왔다. 당시 복지비는 지금의 2배 이상의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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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은, 당연히 모기업의 입김을 탈 수밖에 없다는 것. 잘 나갈때는 별 말 없지만, 전체적인 사업 경기가 안좋아지면서 수익률이 문제가 됐다. 벤처답게 우리 사업구조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돈이 안되는 사업’이었고, 언젠가는 잘 되겠지 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하고 있기엔 업계 전체가 겨울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하필 내가 입사한 바로 그 순간이 그렇게 돈이 서서히 마르는 시기였다. 회사에 거의 막차로 들어왔다고나 할까.

실제로 입사하고 두세달 있다보니 ‘도대체 이 회사는 어떻게 돈을 벌 생각인거지?’ 라는 질문이 머리속을 떠나질 않았다. 나 뿐만이 아니라 선배들도 몰랐다. 가끔 회의 때 대표님이 그 포부를 공유하긴 했다. 하지만 구현방법이 생각이 안났다. 이리저리 머리 쥐어짜봤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라는 확신만 강해졌다.

아참,  내 ‘공식적’ 업무는 쉽게 말해 HRD(Human Resource Development)와 공사판 십장을 잘 섞어놓은 거였다. 업종 특성상 비정규직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을 많이 쓰는데, 그들을 관리(…)하고 교육(…)하는 업무였다. 새로운 사람 들어오면 신규교육 시키고, 일 잘 하도록 어떻게 잘 시키고, 그만둔다고 하면 잘 어르고 갑자기 쉰다고 하면 새로운 사람 채워넣는…아 그냥 십장이네.

처음부터 그 일을 하도록 정해져있던 것은 아니었고, 회사에서도 ‘대충 그런 일을 하지 않을까?’ 라는 느낌으로 뽑았던 것 같다. 내 선임자가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한다, 라는 가이드도 딱히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 출근해서 한 일주일 정도는 일없이 있었다. 했던 건 컴퓨터를 뒤져서 그간 진행했던 기획서 좀 읽어보고 사이트 좀 둘러보고, 분위기 파악하려 회의 좀 참석하고 그랬다. 그러다가..

언제부터 바빠졌는지 기억이 안 난다

분명, 분명 할일이 없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서비스가 하나 오픈하고, 나도 몰랐지만 서비스 담당자가 나였고, 그리고 서비스 오픈 이후부터는 뭔가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시키고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원래 하기로 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고 별 상관 없다고 여겨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는 세달동안 네이버 한번을 못들어가볼 정도로 바쁜 상황이 되어 있었고, 해당 서비스를 제일 잘 아는 실무자가 되어 있었다. 회의에서 말이 청산유수로 나왔다. 어쩌다보니 기획자가 되어있었고 어쩌다보니 운영자가 되어있었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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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은, 당시엔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많은 정도는 또 아니었던 것 같다. 회사의 출퇴근 시간은 텐 투 세븐. 일곱시 퇴근의 장점은 두시간만 야근해도 9시라서 엄청 일을 많이 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 사실 하루에 해야 될 일을 닥닥 긁어모아 빠듯하게 마치면 보통 여덟시는 넘어서, 어디가서 많이 일한다고 하기도 뭐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했다. 매일매일 해야되는 일의 납기가 시간단위로 들어왔다. 열한시까지 일 하나. 한시까지 하나. 두시까지 하나. 다섯시까지 일곱. 이런 식으로. 시간 하나는 끝내주게 잘 갔다. 하루하루가 빨랐다. 아주 다이나믹하게.

개인적으로 재미없는 일은 아니었다. 뒤늦게 생각하면 적성에 맞았을지도. 계속 사람들 얼굴 보고, 얘기하고 약속잡고 관리하고 이런 게 영 적성에 안 맞는 것은 아니었고, 내가 들어와서 회사에 공헌한 것이 없지도 않았다. 그런데, 딱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도대체 이 경험을 쌓아서 뭐가 될 수 있을까, 그게 하나도 안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했다

팀은 기획팀에 담당은 HRD와 HRM(Human Resources Management). 들어와서 몇달만에 대기업과 콜라보 프로젝트 수행. 하지만 그 단어와 실제로 하는 일의 차이가 컸다. 내가 보기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후다닥 해치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거 몇 년 해봤자 전문가가 될 거 같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직장생활은 이게 아니었다’ 라고 하면, 너무 철없어 보이겠지만 진짜 그랬다.

마침 타이밍 좋게 회사 사정은 점점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입사 후 네달 뒤 대표가 바뀌고, 인원이 줄어들었다. 때마침 연봉협상을 했던 선배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야 짤릴 일은 없었다. 대부분의 인력감축은 비싼 인간 짤라서 싼 인간이 대신하게 하는 방식이다. 사회 초년생인 나는, 당연히 제일 싼 인력이었고 적어도 입사 2년차까지 고용불안은 없었다.

하지만 미래가 문제였다. 물론 나도 벤처에 일하면서 일확천금을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지표가 회사의 미래가 어둡다고 말하고 있었다. 인원은 줄고, 돈 벌 방법은 없으며, 내손으로 사람 쳐낼 일만 많아졌다. 무엇보다, 회사가 살아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당장 대표가 바뀐 뒤로, 회사에서 재밌게 할 만한 일이 사라졌다. 회사는 처음에 계획했던 아이디어를 거의 접고, 모회사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생존전략을 바꿨다.

사람이 퇴사를 결심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힘들어서, 돈이 안 돼서, 보람이 없어서. 그 어느 것도 비난 받을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경우는 돈이 안돼서, 그리고 보람이 없어서였다. 나는 직장이 개인의 자아실현에 도움이 되거나 적금통장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이 직장은 둘 중 어느곳에도 속하지 않아 보였다. 내 나이와, 연봉과, 내 친구들이 버는 돈과, 회사의 미래를 곰곰히 따져본 뒤, 나는 정확히 6개월하고 보름만에 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