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버무려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수없이 많은 선택의 상황에 직면한다. 어디에서 어떤 커피를 얼마나 주고 마실지, 남은 시간에 도서관에 갈지 서점에서 책을 구경할지, 어떤 학교에 가고 어떤 전공을 들을지,인터넷에서 시킬지 직접 가서 살지, 휴학하고 등록금을 벌지 대출을 받고 학업을 계속할지, 카페에서 일할지 편의점에서 일할지ㅡ처럼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그것은 “어떤 자원을 얼마나 많이 어디에 사용해서 무엇을 할지”가 이 사회를 작동시키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조현아 부사장이 회항을 지시했을 때, ‘백화점 모녀’가 무릎 꿇고 사과하기를 요구했을 때, 을이 가장 먼저 직면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다. 자존심과 권리를 포기하면서 무릎을 꿇고 돈을 계속 벌지, (어떤 이유에서건) 권리를 지키면서 다른 일자리를 찾아볼지.

[title above=”눈치 챘겠지만” h1=”false” center=”true”]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title]

우리도, 그들도 순진하지 않다. 무릎을 꿇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그곳에서 계속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소송을 걸 수는 있겠지만, 등록금을 벌려고 혹은 생계를 유지하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 중에 변호사 선임비용을 비롯한 온갖 소송 비용들을 감당하면서 긴 소송을 견뎌낼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백화점 모녀의 ‘갑질’에 대한 조기숙 교수의 트위터 발언 이후, 논의는 갑에 대한 을의 개인적 저항, 을의 헌법적 권리, 사회구조의 문제까지 급격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루어진 논의들이 이 일련의 사건들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 그들이 가장 먼저 직면하는 것은 ‘강요된 선택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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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패기, 헌법적 권리, 사회적인 저항 같은 말들이 뜬 구름 같고 순진하게 들리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우리가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것은 그런 말들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의 강요된 선택들이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고객들을 진정시키세요. 아니면 당신을 계속 채용할 수 없어요.
처음부터 시급을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네요. 당신 말고도 일할 사람은 많아요.

같은 말들. 여기에 대고 

 나는 내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만 고객들을 진정시키도록 노력할게요.
이런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저도 당신 편의점 말고도 일할 곳 많아요.

 

와 같이 말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일자리를 기회비용으로 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그들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다.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사회는 끊임없이 영웅을 요구한다.

로자 파크스가 몽고메리 버스에서 “저는 제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I don’t think I should have to stand up.”라고 말했을 때, 마틴 루터 킹이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oday”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현대 민권운동의 영웅이었고 시민사회의 성숙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미 사회가 영웅들에 의해 어느 정도 성숙한 상황에서는 영웅이 없어도 안정적인 시민의식의 재생산이 가능하도록 구조적으로 제도화되어야 한다. 영웅은 그 본질적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두 가지 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첫째, 다른 모든 사람들이 힘들 때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둘째, 본인을 희생해야 한다.

21세기 한국에서, 이미 충분히 세계적으로 많은 영웅들이 의식을 선도하고 제도적으로 거의 정착이 된 이 때에, 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영웅의 희생을 바라야 하는가. 왜 아직도 많은 을들이 갑의 횡포에 시달려야 하고,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포기하고 스스로 희생하며 영웅이 되어야 하는가. 영웅을 바라는 사회는, 특히 그 힘든 사람들이 스스로 영웅이 되기를 강요하는 사회는 얼마나 비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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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어 조 교수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더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 갑질은 새로울 것도 없다만 백화점 알바생 3명이나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
하루 일당 못 받을 각오로 당당히 부당함에 맞설 패기도 없는 젊음. 가난할수록 비굴하지 말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면 좋겠다.

나는 여기서 더 믿기 어려운 것을 본다. 조 교수의 청년 시절부터 있어왔던 갑질이 아직까지도 의식과 제도에 의해서 제재되지 않고 ‘새로울 것도 없을 만큼’ 만연한 것. 그러면서 여전히 스스로 영웅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 나는 그 비참함을 더 믿기 어렵다.

제도와 의식이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유 시장에 기업을 풀어놓으면, 을에게는 선택이 강요될 수밖에 없다. 제재할 수단은 없이 서비스 이용자건 기업이건 그들만의 리그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기 때문이다. 강요된 선택의 상황에서 참고 일하는 사람, 나오는 사람, 맞서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다른 것을 선택하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들은 이미,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패기도 없는 젊음이 되거나 영웅이 되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언도 법리도 시위도 아니다.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그런 강요받는 선택에 직면하지 않도록 미리 제재할 수 있는 제도, 그리고 그 제도가 재생산하는 사회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