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를 TV 앞에 붙잡아둔 애니메이션이 있다.

“긴 머리 높이 묶고~ 요술봉 휘두르며~ 빨주노초파남보 동그라미 풍선~”

이 노랫말의 뒷부분을 따라 부를 수 있다면 아마 당신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행복 나눠주는 천사소녀 네티! 학교 다녀와서 가방을 내팽개치고 TV 앞에 앉던 게 생각난다. 천사소녀 네티가 방영된 시기가 1996년~1997년도라고 하니 그즈음에 적어도 초딩이었던 분들만 이 글에 공감할 수도 있겠다.

귀밑머리 빼기의 시조가 네티. 실제로 저렇게까지 귀밑머리를 빼면 수염으로 오해 받을 확률이 더 크다.

네티는 활동용 닉네임(?)이고 그녀의 진짜 이름은 셀리. 일본 사람인 듯 일본 사람 아닌 일본 사람 같은 셀리는, 보리밭에 바람부는 듯한 황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다. 얼핏 보면 뜀틀이나 좀 잘 넘는 중학생 여자애지만, 이 애 범상치 않다. 아빠는 마술사에 엄마는 전직 괴도. 애완동물이랑 친구도 범상치 않다. 그녀의 괴도 행각을 돕는 귀여운 고슴도치에, 도둑질 잘 하고 오라고 매일 밤 기도해주는 수녀 친구 세인트까지. 세인트는 이렇게 매번 기도를 올린다.

“주님, 정의로운 도둑(세인트..이래도 되는거야…?)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저희가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힘을 주세요”

기도빨인지 엄마의 적성을 물려받아서인지, 아니면 아빠에게서 마술을 잘 배워서인지 어쨌든 네티는 이름난 ‘대도’가 된다.

“오늘도 네티가 무사히 도둑질을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녀의 적수, 셜록스

‘대도 네티’는 고전물로 보자면 홍길동 같은 존재다. 의로운 도적. 그녀는 물건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나쁜 사람에게서 뺏어서 원주인에게 돌려준다. 열심히 향수를 개발한 중소 사업자를 등쳐먹는 부자를 혼내주기도 하고, 추억의 하모니카를 되찾아주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순순히 진행되면 재미가 없으므로, 네티를 방해하는 악당이 하나 등장한다. 악당이라기엔 너무 귀엽다.

바로 셜록스!

이름도 좀 멋지다. 한국판 이름 셜록스는 아마 ‘셜록 홈즈’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게 아닐까 싶은데, 그는 꼬마 탐정이다. 안타깝게도 김전일이나 코난 류는 아니다. 그랬다면 진즉 사람이 여럿 죽어나갔겠지만… 아버지 아스카 형사를 따라 셜록스 또한 형사를 꿈꾼다. 그의 아빠 아스카는 네티 엄마가 처녀적, 괴도로 이름을 날릴 때의 적수였다. 부전자전 모전여전이라고 도둑질도 형사질도 대를 이어 하고 다닌다.

초딩 때 내 지갑 속엔 항상 셜록스의 사진이 있었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빠순이질’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큰 눈(아주 큰 눈)에 검고 윤기나는 머리, 하얀 피부도 매력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셜록스의 정의감과 대책 없이(!) 착한 심성이 날 사로잡았다. 허당끼가 있는 셜록스는 어이없는 이유로 매번 네티를 놓친다.

나름 아빠 빽으로 임시수사권(?) 같은 것도 받았다.

네티에게 미쳐있는 허당 신사

한 번은 매번 허탕만 치던 셜록스가 거의 네티를 잡을 뻔한 적이 있었다. 무슨 에피소드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항상 거대 풍선을 타고 도망가는 네티의 발목을 그 날은 셜록스가 꽉 잡아버렸다. ‘드디어 네티가 잡히는 것인가’ 손에 땀을 쥐며 나는 TV 앞에 바짝 다가갔다. 미리 말해두자면, 셜록스는 그 전까지 꽤나 네티를 잡기위해 고생을 해온 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미친놈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1) 네티의 도주로를 끊기 위해 연막탄을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2) 가끔 그물도 던지고
3) 함정 수사도 하고

여튼 꽤나 열성적이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제야 겨우 네티의 발목을 잡은 순간이었는데 그는 네티의 한 마디에 바로 네티를 놓고 공중에서 떨어진다.

“올려다보지마!!! 나….나…. 치마 입었단 말이야!!!!”

널….놓치지 않겠어!!!! (라고 말하는 셜록스…. 아이고 부질없다 부질없어…)

아…. 이 어찌 신사가 아닐쏘냐. 도둑이라고 할지라도 숙녀의 치마 속을 보는 것은 금기. 네티도 부끄. 셜록스도 부끄. 나도 부끄. 생각해보면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네티에게 셜록스가 그렇게까지 매달렸다면, 한 번즘 네티의 반스타킹이 벗겨졌을 만도 한데 (허허) 이상한 일이다. (후후..작가는 철저히 나의 동심을 지켜주었지만 어차피 이렇게 물들어버린 것을…)

셜록스는 결국 형형색색의 풍선에 파묻혀 저 아래로 떨어지고 만다. 코난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동거인에게 수면침을 쏴대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추리력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셜록스가 네티를 계속 못잡은 이유는 사실 인정 넘치는 품성과 ‘안면인식장애’ 탓이다.

셀리? 네티?  – 이거 뭐야 뭐야 누가 누구야 이거

셀리와 셜록스는 학급 친구다. 매일 학교에서 티격태격하는 셀리와 셜록스. 마술사 아버지를 둔 셸 리가 마술이라도 할라치면 셜록스는 “그런 건 다 속임수야. 과학적이지 않아.”라며 잘난 척을 한다. 얼굴을 3CM 앞에 맞대고 말싸움을 하는데…. 왜 과학적인 우리 셜록스는 네티를 알아보질 못하니…..

대체 어디가 다른 거니

세일러문,카드캡터체리,웨딩피치에 이어 아내의 유혹까지 이어지는 ‘안면인식장애’의 비극. 셜록스는 네티와 셀리를 구분하지 못한다. (대체 왜! 포니테일만 했을 뿐인데…) 한 에피소드에서는 상대방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진실의 거울’이 나온다. 네티가 그 거울 앞에 섰을 때, 거울 속 모습을 셜록스가 보게 된다. 거울 속 모습은 그의 학급 친구 셀리. 셜록스는 눈을 비비고 의심하지만 ‘아냐 내가 잘못 봤을 거야’라며 호구짓을 하기 시작하는데… 셀리는 셜록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학교에서 운동도 못하는 척, 네티가 아닌 척 하기 위해 애쓴다. 이쯤되면 그냥 알아챌 만도 한데 우리의 셜록스는 왜 눈을 뜨고도 네티를 못 보니… 이게 코난이었으면 벌써 경찰차가 오고도 남았을 것을… (뚜루뚜루…뚜루뚜루루루 범인은 너야! 이 음악 나오면서..)

내가 사랑하는 명장면 크으 –

각설하고, 내가 가장 감동받았던 장면은 셜록스가 셀리에게 고백을 하는 장면이다. 중간에 쿵떡쿵떡 쌸라쌸라 셜록스를 좋아하는 여자애와 네티를 좋아하는 남자애들이 끼어들면서 이야기가 복잡해지는데 그건 생략하자. 셜록스는 (제 3자의 덕으로) 다 잡을 뻔한 네티를 놓치고 나서 ‘후후…네티를 잡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나였으면 좋겠어…’ 이런 헛소리를 하면서 난간에 기대 비를 맞는다.

느끼느끼

해가 지고 해가 뜨고 비가 그쳐 무지개가 뜨도록 비를 맞던 셜록스는 길거리에 서서 노숙을 하게 되고, 비몽사몽 무지개를 향해 걸어간다. 그런데 똬앟! 그 무지개 끝에 셀 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셜록스는 헤롱헤롱 열이 나 뜨거운 몸으로 셀리에게 안기며 ‘널 조하…조하행…’하는데…. 킁….킁ㅋ으.ㅋ으ㅡ….. 왜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장면을 떠올리며 설레는지 모를 일이다.

애들 애니메이션답지 않게 천사소녀 네티의 결말은 ‘행복한 결혼’으로 끝난다. 어른이 된 셀리와 셜록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행복했던 엔딩. 셀리와 셜록스의 자식은 어떤 모습일까? 딸은 셀리 닮아 대도가 되었을까? 그럼 아들은 자기 누이를 잡으러 다니나…

-끝-

보너스컷.

셀리가 네티인 걸 알게된 후 안아주는 셜록스

 

보너스영상.

 

뒷이야기:  이 글을 읽은 미스핏츠 필진들의 반응.jpg

1. 난 셜록스보다 샤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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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성 공감류 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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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심파괴 음란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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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셜록스 안면인식장애 확진설

홍시의 발견 1

 – 진짜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