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원 아저씨가 결국 죽었다.

‘돌아가셨다’라고 엄숙하고 정중하게 표현하기에는 그의 죽음은 비참하다. 적어도 그는 누군가의 인격 모독에 의해 ‘죽었다’. 내 아버지뻘 되시는 분은, 내 또래의 2명의 자식과 내 어머니뻘 되시는 아내분을 남기신 채 그렇게 가셨다. 그분의 동료들과 그분의 사정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슬픔에 눈물을 훔쳤다. 방금 기사 하나를 봤는데, 그 아파트의 나머지 경비원분들도 계약해지 될 위기에 처하셨단다.

‘현대판 노예’로 불리는 아파트 경비원들은 내년 임금인상을 앞두고 대량 해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아마 이번 사건을 두고 용역업체와 아파트 사이에 재계약이 체결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 분을 알지도 못하고, 그 아파트에 살 권리를 구매하기도 힘든 사람이지만 이 사건이 유독 슬프게 다가왔다.

외할아버지는 경비원이셨다

외할아버지는 경비원이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경비원을 하셨고, 태어난 후에도 꽤 오랫동안 경비원으로 일을 하셨다. 아파트에서 일반 건물까지 할아버지의 불룩 튀어나온 뱃살처럼 직장도 다사다난하게 바뀌셨다.

옛날 옛적부터 잘 풀린 친가와 달리 외가는 삶이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할아버지 역시몇 번의 사업 성공과 실패를 거치며 결국 경비원에 직을 두셨다. 지금은 은퇴하시고 팩소주하시면서 담배를 피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배불뚝이 할아버지지만, 그때는 경비실에 놀러간 손주를 다른 경비원들에게 소개시켜주러 다니는 활기찬 할아버지셨다.

자세히 기억은 안나지만 어릴 때 놀어간 할아버지의 일터에선 소단지 아파트가 주를 이뤘던 거 같다. 아마 적지 않은 나이에서 경비를 하셔서 그런지, 대단지 아파트보다는 적은 단지 수의 아파트에서 일을 많이 하신 거 같다. 내 추측인데, 대단지 아파트보다는 돈을 덜 주지만 할 일이 덜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닐까 싶다. 사람이 많을 수록 일은 많고 진상도 많으니까.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경비원들의 처우는 크게 향상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 역시 이번에 돌아가신 경비아저씨처럼 몇 번의 모욕을 당하셨지 싶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사건이 남의 일만으론 느껴지지 않더라. 할아버지는 경비원 시절 말년에 건물 경비를 주로 맡으셨다. 난 아마 중3인가 고3인가 그랬는데, 명절을 맞아 할아버지를 뵈러 갔다. 건물이나 아파트나 경비실은 허름하다. 화장실이나, 잠을 잘 곳, 밥 먹을 곳이 따로 있지 않다. 1~2평 만한 공간에, CCTV와 누울 수 있는 자그마한 소파가 자리잡고 있다.

할아버지는 아마 1일 24시간을 일하고, 그 다음 날을 쉬는 그런 패턴으로 일하신 거 같다. 2교대라는 표현이 맞으려나? 같은 반 친구의 할아버지는 나이 먹고 편하게 계실텐데, 우리 할아버지만 늙어서까지 고생하는 듯한 모습에 분노와 슬픔이 몰려들었다. 집에 가는 차안에서 펑펑 울면서 “내가 우리 외할아버지 호강시켜 줄 거야”라는 패기 어린 다짐을 했지만, 여전히 경제능력은 전무하지 싶다.

경비원은 경비원이 아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딘가의 노동자는 한 사람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이자 남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모든 이야기를 ‘계약’이라는 서슬 퍼런 두 글자로 치부해 버린다. 노동이라는 게 참 인간적이지만 참 무섭다. 노동은 사람의 인생을 목도리 짜듯이 짜지만, 그 와중에 개인의 이야기는 소외된다.

가장 땀냄새 나는 단어가 현실에선 가장 비정하다. ‘계약’, ‘법률’로 이뤄지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에서 우리의 인성은 너무나 쉽게 파괴된다. 아니, 계약상에도 없는 인성거래가 왜 현실에는 있을까 싶다. 왜 ‘고용인’, ‘사용자’ 라는 감투만 얻으면 우리는 ‘피고용인’, ‘노동자’에게 잔인해질까. 대체 왜 그럴까. 멀쩡한 사람이 국회만 가면 국민들을 호구로 보는 것처럼, 우리도 왜 ‘돈’만 있으면 사람들을 ‘물건’으로 볼까.

우리는 그들의 능력과 우리의 돈을 거래한 건데, 마치 능력과 인성 심지어 인생 자체를 소유한 것처럼 대한다. “싫으면 관두든가”라는 잔인한 말 한 마디로 노동자들의 불만을 퉁친다. 아파트 주민부터, 위정자까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몇몇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지 싶다. 글을 쓰는 본인도 저 의식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의문이다.

“공(노동현장)과 사(개인 존중)를 구분해야지”라는 말은 여기서 쓰이면 안 된다. 노동영역은 공과 사로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노동은 인간을 구성하는 커다란 요소라서, 노동현장에서의 취급과 개인의 자존감을 분리시켜 대하자는 건 말이 안 된다.

“남 사정 봐주다가는 아무 것도 못한다” 이 말도 틀린 말이다. 남 사정은 봐주라고 있는 거다. 60억 개의 외로움이 있듯이 60억 개의 사정이 있다면 우린 그 사정을 고려하면서 일을 해야 한다. “다 먹고 살기 위해” 한다는 말처럼, 우리도 ‘잘’ 먹고 살고 남들도 ‘잘’ 먹고 살기 위한 사회구성의 첫 시작은 노동자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일이다.

압구정 경비원 분신 사건은 분명히 노동현장에서의 ‘인간성 소외’로 일어난 문제다. 그리고 그 인간성 소외의 주체는 ‘돈’이자, ‘소비자’이자, ‘우리’다. ‘손님’이 왕이 아니듯이, 돈을 가진 자로서 누군가를 고용한다고 왕이 되는 건 아니다.

왜 우리는 더 잔혹해지기만 할까

윗사람한테는 굽신거려야 하고, 아랫사람한테는 떵떵거리는 게 ‘당연한 마냥’ 취급하는 수준이 미개한 거 아니면 뭐냐. 혹자는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만, 잔인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그렇다. 구조를 무시하면 안 된다. 자본주의의 구조, 아니 한국의 환경은 남을 군림하라고 권장하지, 남과 협력하라 권장하지 않는다. “저 사람들과 함꼐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저 사람처럼 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저 문제를 해결하자”가 아니라 “저 문제의 꼭대기에 서있자”라고 이야기한다. 분명히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이 권력관계를 ‘욕망하게끔’ 만든다.

압구정이라는 한국 부의 상징에서, 한 피고용인의 죽음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꼭대기’의 누군가가 아래 층의 ‘누군가’를 ‘비인간적’으로 대해도 쉬쉬하는 상황. 그 상황이 너무 무섭더라. 대체 우리는 ‘권력관계’에서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을까. 알량한 권력과 알량한 돈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구매하려고 드는 걸까. 나는 노동시장에서 나의 얼마만큼을 팔아야 하는가, 나는 알바생들에게 어느 정도의 친절을 기대하는 걸까. 그 친절은 내가 지불하는 가격에 포함되어 있는가. 그들은 정당한 임금을 받을까. 내가 그들의 인격을 침범하지는 않을까.


왜 약자는 더 초라한 약자 앞에서 강해지는 걸까. 정치는 못 가진 사람들한테 더 잔혹해지고, 우리는 우리보다 약자 앞에서 강자 행세를 하며 위로를 받는다. 알량한 권력에 우리는 취하고, 인성은 더러워지고 그들은 아프다. 아, 기분 더러운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