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프렌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시즌 2의 15번째 에피소드에서 조이와 챈들러가 꿈에 그리던 가죽의자를 사는 장면이다. 이 가죽의자는 천국 같은 푹신함을 제공할 뿐 아니라, 레버를 내리면 등받이가 거의 수평으로 내려가면서 발받침이 올라와 발 뻗고 누울 수 있는 그런 의자다. 침대가 부럽지 않은, 아니 드러누워 TV를 보기에 가장 적합하니 침대보다도 훨씬 위대한 게으름뱅이 잇-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의자 앞에서 챈들러와 조이는 비장한 눈빛을 주고 받는다. “준비 됐니?(do we dare?)” “응.(we dare.)”

1

아이 좋아

마침내 꿈에 그리던 의자에 앉은 그들은 황홀경에 젖어 외친다. 오오오오예에에에.

2

어흡흛컯큭

그리고 레버를 내리며 다시 한 번 외친다. 어어어우우우예에에에에쓰!!!!!

나에게도 이런 아이템이 있다.

바로 극세사 침구류다.

Untitled-1

극세사 담요를 깐 침대에 누우면서 오오오예에에. 그 위에 극세사 담요를 다시 한 번 덮으면서 어어어우우예에에에쓰!!!!! CC by 이베딩

극세사 담요에 파묻혀 나는 쓰네

극세사(microfiber)란 굵기가 0.5데니어 이하인 실을 이르는 말이다. 머리카락이 보통 60~80데니어 정도 된다니까 그보다 100배 이상 가느다란 셈이다. 참고로 1데니어는 9km의 실이 1g의 무게를 가질 때의 굵기를 이른다. 그러니까 0.5데니어 이하의 극세사 실 18km를 늘어 놓으면 그 무게가 1g 정도 된다는 뜻이다.

네이버 지도로 찍어 봤더니 홍대역에서 이대역까지 직선거리가 1.8km 정도였다. 실 한 가닥으로 그 거리를 10번 왔다 갔다 하는 동안 1g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실의 굵기가 바로 극세사의 굵기다.

요기서 요기까지 10번 왕복해도 1g인 실=극세사

요기서 요기까지 10번 왕복해도 1g인 실=극세사

이렇게 가는 실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 실의 공정을 보면 폴리에스테르와 나일론을 약 7대 3 비율로 섞어 가늘게 뽑은 뒤 기계로 정교하게 8분할해서 만든다.”-극세사 [極細絲] (등산상식사전, 2010.10.7, 해냄)

극세사는 다양한 곳에 활용되는데, 주로 청소와 단열에 많이 쓰인다. 8배로 가늘다 보니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나서다. 운동 하고 나서 땀 흡수가 잘 되는 스포츠타월, 수영장이나 바다에서 몸을 닦으면 금세 마르는 비치타월, 안경이나 카메라 렌즈를 닦는 수건 등이 극세사로 만들어진다.

극세사의 청소 원리. 아래는 일반 면사. CC by Wikipedia

8분할을 이용한 극세사의 청소 원리. 아래는 일반 면. CC by Wikipedia

물론 내가 좋아하는 극세사는 이런 게 아니다.

오오오예에에 CC by 이베딩

오오오예에에 CC by 이베딩

어어어우예에에에에쓰

어어어우예에에에에쓰 CC by 이베딩

바로 이런 거다. 

모 SPA 브랜드에서 파는 ‘후리스’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모’ 원단과 흡사한 모습 때문에 헷갈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간단히 개념을 정리하고 가는 게 좋겠다. 물론 이런 거 몰라도 극세사 침구류에 푹 빠져서 행복하게 허우적거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시간 많으신 분만 읽으시길.

  •  극세사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폴리에스테르 100% 혹은 폴리에스테르와 나일론의 합성 섬유를 분할하여 만든 0.5데니어 정도의 가느다란 실을 말한다. 극세사가 가늘고 흡수성이 좋기 때문에 아토피나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가장 좋은 실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극세사 자체가 폴리에스테르 등 인공소재이기 때문에, 아토피 관련 자극은 천연재질인 순면이 가장 덜할 수도 있다.

    이런 거 말고요... 너무 아무데나 쓰면 섬뜩한 표현이 됩니다. 머리카락 100분의 1굵기의 다리.... 으음...

    이런 거 말고요… 너무 아무데나 쓰면 섬뜩한 표현이 됩니다. 머리카락 100분의 1굵기의 각선미… 으음…

  •  ‘후리스’ = Fleece = 폴라 플리스
    일본에서 온 모 SPA 브랜드가 ‘후리스’ 라고 부르는 재질은 아마도 플리스, 그 중에서도 폴라 플리스를 말하는 것 같다. 폴라 플리스는 1979년 미국의 말덴 밀즈사가 개발한 폴리에스테르 계열의 직물을 말한다. 즉 극세사는 실이고, 폴라 플리스는 원단이다. 가볍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세탁하기 편하며 빨리 마른다. 폴라 플리스를 발명한 말덴 밀즈사의 당시 CEO는 장점이 많은 이 원단이 세계적으로 널리, 싸게 보급될 수 있도록 일부러 특허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플리스는 양 한 마리에서 나온 양털을 의미하는 단어다. 이아곤이 아르고스호를 타고 찾으러 떠난 보물이 황금양털, Golden Fleece다. CC by Alex, Flickr

    원래 플리스는 양 한 마리에서 나온 양털을 의미하는 단어다. 이아곤이 아르고스호를 타고 찾으러 떠난 보물이 황금양털, Golden Fleece다. CC by Alex, Flickr

  •  기모
    기모는 영어로는 napping, 즉 직물 가공법의 한 종류다. 섬유를 긁거나 뽑아서 천의 표면에 보풀을 만들어서 부드럽고 두껍게 만드는 기법이다.

3줄 요약. 극세사는 실. 폴라 플리스는 천. 기모는 천 가공 방법. 세 가지의 공통점은 내가 사랑하는 부드럽고 실용적인 겨울나기 섬유재질들이라는 것.

그 중에서 이번 겨울에 내가 특히 꽂힌 아이템을 소개하고 싶다.

최근 트위터에서 한 극세사 이불 브랜드에 대한 광풍 같은 입소문이 돌았다. 한 트위터리안이 A 모 초극세사 항균 담요를 ‘아초항담’이라는 기묘한 신조어로 표현하면서 너도 나도 그게 뭐냐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무엇의 약자인지 궁금한 사람은 네이버에 검색해 보시길.

  • 참고로 ‘초극세사’라는 용어는 엄밀한 사전적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다. 일반적인 극세사보다 더 가늘고 좋은 실을 의미하기 위해서 업계에서 마케팅의 일환으로 만들어 낸 말인 듯 하다. 아초항담 제조사에 직접 전화로 확인해 본 결과, 같은 회사에서 만든 ‘노르딕 극세사 담요’와 ‘초극세사 항균 담요’의 차이는 실의 굵기가 아닌 실의 길이였다. 초극세사 담요가 극세사보다 좀 더 실이 ‘짧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이런 평가를 얻을 정도로 나름대로의 신드롬이 된 것이다.


라고 신조어를 만들어 낸 당사자는 트윗하기도… 이 글로 비트코인 쌓아 가지시면 정말 좋을텐데…

아초항담의 영업 요지는 가성비가 좋은 극세사라는 것이다.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할인도 많이 하고 1+1 이벤트도 많이 한다. 160cmX195cm 담요 1장에 2만원 선에서 살 수 있다. 솜이 들어간 방한용 침구의 평균 가격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저렴한 가격이다. 직접 이용해 본 사람으로서 아초항담이 솜이불보다 더 따뜻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와 별개로 뛰어난 보온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솜이불처럼 두껍지 않기에 여러 겹을 겹쳐 덮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무엇보다, 극세사 특유의 실로 만든 크림 같은 촉감은 누구라도 함락시킨다.

이런 느낌…

특히 고양이를 키운다면 아초항담은 거의 고양이 자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트윗 리뷰는 아초항담의 가장 큰 장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나 역시 아초항담을 산 이후 온수매트의 사용 시점이 예년에 비해 한 달 가량 미뤄지고 있다. 난방비가 두려워 온수매트를 샀으나, 이제는 전기세가 두려워진 가난한 자취인에게는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아초항담은 2013년에 나온 버전 1이 있고 2014년에 나온 버전 2가 있는데, 제공되는 담요 색깔 이외에 이 둘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 트윗이 완벽하게 설명해 놓았다.

트위터에서는 ‘아초항담’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즐길 수 있는 좋은 정보도 공유되고 있다.

아초항담의 단점이라면 생각보다 보풀이 빠진다는 점과, 온기만큼이나 각종 먼지나 동물의 털을 잘 흡수한다는 점이다. 방 안에서 입는 후줄근한 옷을 입고 아초항담 속을 헤엄칠 때는 별로 문제가 없다. 하지만 검은 스키니를 입고 외출준비를 마친 다음, 10분 정도 시간이 남아서 잠시 몸을 데우려 아초항담에 누웠다가는… 끔찍한 보풀 공격에 순식간에 스키니를 잃을 수 있다. 특히 고양이를 키운다면 결과는 더욱 처참할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누구도 외출 10분 전에 침대 위를 뒹굴거릴 만큼 게으르지는 않겠지만… 그냥… 개인적인 경험담이다.

그래요… 전 그런 사람이에요…

당신이 아초항담의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 그것은 나에게로 와서…

사실 극세사 이불을 파는 곳은 많다. 당장이라도 코스트코에 가면 수많은 종류의 극세사 담요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는 아초항담 보다 저렴한 것도 분명히 많을 것이다. 어쩌면 더 가격도 싸고 품질도 좋아 훌륭한 가성비를 뽐내는 것도 있을지 모른다. 나만 해도 촉감 자체는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극세사 이불의 감촉이 아초항담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초항담이 트위터에서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뭘까?

오히려 극세사 침구류의 종류가 너무 많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재질은 비슷하고, 며칠 몸을 덮어 보기 전까지는 성능의 큰 차이를 딱히 알 수도 없는데, 가격과 브랜드는 천차만별인 극세사 침구류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들은 풍요 속의 빈곤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트위터를 잉여롭게 서핑하다, 뭔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아초항담’이라는 이름 네 글자가 뇌리에 달라붙어 버리면, 선택은 훨씬 간단해 지는 것이다. 사진과 함께 트위터에 쏟아지는 간증은 이 선택이 옳은 것이라는 확인까지 제공해 준다.

너무 큰 기대를 하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처음 들어보는 사자성어 같은 이름이 재밌고 마음에 들어서 샀다면 손해볼 것은 없다. 이것이 어떤 유행이라고 느꼈다면 그 자체를 즐기면 그만이다. 단순히 가성비가 좋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극세사 담요를 원했다면 아초항담을 산 사람은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부지런한 삶을 미덕으로 알았던 사람들은 죽도록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 글의 맨 첫머리에 말했듯이, 이것은 게으름뱅이들의 잇-아이템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25절기 중 하나라고 말했던 ‘수능 한파’가 닥칠 때쯤, 그리하여 아무리 좁은 방에 누워도 코 위의 공기가 물처럼 차가워질 때쯤이 되면, 나처럼 1+1 세일을 잡아서 아초항담 2개를 산 다음 하나는 깔고 하나는 덮고 누워 있는 행위는 절대로 절대로 추천하지 않는다. 그 밖으로 나가려면 작심 4일째에 헬스클럽에 가는 것보다도 더 큰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침대를 나갔다간 나와 담요 사이에 형성된 라포(rapport)가 깨져버릴 것이야

어느 정도냐 하면, 나는 아초항담을 사기 전까지만 해도 애인의 품이 그리워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그런 거 없다. 애인의 품 속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게 이 세상에 단 한 개 있다면 그건 위 아래 아초항담 풀세팅 침대다. 그 곳을 박차고 나가 세상의 추운 바람 속에서 부지런히 씻고, 사람 꼴을 갖추고, 운동을 하고,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아아,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아초항담을 사면 매일 밤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대신 매일 아침 천국을 제 발로 박차고 나오는 경험 역시 반복해야 한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겨울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