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대충 중도 근처에 세워놓는다.

학교에 오긴 왔는데 잠이 덜 깬다. 졸린 몸을 자판기 앞까지 끌고 간 후 주머니의 동전을 세어 보니 650원이 있다. 잠깐 망설인 후 450원짜리 컨피던스를 뽑았다. 밖에서 살 때는 900원씩 했다. 한 모금 마시니 정신이 좀 든다. 수업이 있는 건물까지는 한참을 더 걸어가야 한다. 날이 차다.

대학 입학 후 가장 많이 마신 음료수는 컨피던스다. 450원이란 가격은 애매하고 90년대 NBA가 연상되는 겉모양은 여전히 안타깝지만. 무려 5종류의 비타민이 들어있다고 한다. 잠은 깨야 하는데 커피는 먹기 싫을 때 특히나 탁월하다. 무엇보다, 이름이 마음에 든다. 자신감이라니. 자신감이라.

이 친구, 다들 한 번은 본 적이 있을 거다.

“난 고등학교 때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고 싶었다.” 고 수업 중 한 교수님은 말했다. 밝은 표정으로, 농을 던지는 듯 웃었지만 빛이 났다. 난 무엇이 하고 싶었을까. 그 때만 해도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것 같다. 분노할 일은 많았으니까.

나는 왜 작은 것에만 분노하느냐 하던 한 시인의 한탄은 이 시대에는 적절치 않다. 사사로운 일에 화를 내면 쩨쩨하다는 평을 듣지만 커다란 일에는 다들 분노한다. 혹은 자조하거나 비웃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못된 일에 분노하며, 지구용사 썬가드처럼 적을 해 치우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적은 없다.

제일 무서운 게 책 한 권만 읽은 놈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을까. 이것저것 공부하고 주워듣는 것이 많아질수록 확신은 사라져갔다. RHCP의 앤서니 키에디스는 The more I see, The less I know라 노래했다.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의 생각이 있다. 많은 지지를 받는 이론들은 그만큼 탄탄하고 동시에 많은 공격을 받아 너덜너덜해져 있다. 그리고 현실은 어떤 이론으로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술에 취한 어느 형을 데려다주며 옳은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갖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형은 무엇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는 답을 했다. 그 형은 여전히 없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한다. 나는 여전히 옳은 것에 대한 자신이 없다.

컨피던스를 흔들어 보니 반쯤 남은 것 같다. 여전히 강의실은 멀다.

중앙도서관 2층 열람실에 들어가서 왼 쪽으로 두 번을 꺾어 들어가면 책상이 창문을 마주하고 놓여 있다. 갈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새내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애용하는 공간이다. 문으로부터의 거리는 꽤 멀다. 전화가 오면 받으러 나가는 동안 전화가 끊긴다. 그럼에도 사람은 은근히 많다.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저들 역시 이 공간에 애착을 갖고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해 보면 왠지 웃음이 날 때도 있다. 다들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테이블 위에 책을 댓 권씩 쌓아놓고 노트에 글을 휘갈겨 쓰고 있거나 찌푸린 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들긴다. 물론 나처럼 한가하게 소설책을 읽고 있는 사람도 있다.

어머니는 고3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기억이 오락가락 한다. 부모님이 이혼한지는 오래 됐다. 이후로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고등학교 시절 하루의 마지막은 야자를 마치고 집에 온 후 술에 뻗어있는 아버지를 방으로 옮기고 집안 여기저기에 있는 오물을 치우는 일이었다. 소변은 쉽게 닦을 수 있었지만 대변의 흔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은 산 밑에 있었다.

이런 느낌의, 여름이면 모기 삼중주가 끝내주는 곳이었다.

바퀴벌레와 개미는 주방과 방을 양분해 점령하고 쥐는 이들의 영역을 무시하는 폭군이었다. 겨울이면 수도관이 얼어 학교로 가서 세수를 했다. 서울에 왔을 때는 따뜻한 물이 잘 나온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갑자기 무슨 신파인가 싶겠지만 딱히 그런 의도는 없다. 당시에도 짜증 이상의 특별한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생활에 익숙해져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때문에 조건이 맞아, 국가에선 나 같이 방황하는 놈팽이에게도 생활비를 지원해 준다. 덕분에 난 지금까지 공부를 할 수 있다. 아니었다면 군대에서 말뚝을 박거나 했겠지. 대학에선 한 술 더 떠 장학금과 함께 학기마다 책값을 지원해 준다. 친구나 중고거래를 통해 책을 구하면 꽤나 많은 금액이 남는다. 아버지의 병원비 역시,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중학교 시절 40분을 걸어서 통학하던 내게 친구 어머님은 자전거를 선물해 주셨다. 고등학교 때 반장질을 하던 나를 담임선생님은 교무실로 부르신 후, 요즘 반 성적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 따위의 생각을 하던 내게 선생님은 귤 한 봉지와 문제집 몇 권을 쥐어주셨다. 둘 모두, 지금과 비슷한 가을날이었다.

혹자는 그걸 민주주의 국민으로써의 권리라 말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조차도 못 하는 국가가 많다. 당장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실시된 지 20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또한 사람들의 호의는 국가의 의무도, 나의 권리도 아니다. 어떻게 설명을 하든, 난 이 사회에 갚아야 할 것이 있다.

하지만 난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확신이 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건물 앞까지 도착했을 때 컨피던스 캔은 텅텅 비어버렸다. 가볍게 찌그러트린 후 쓰레기통에 넣었다.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