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으면 딸기, 싫으면 포도. 어느 쪽이야?” 친구가 소개팅을 한다기에 끝나고 결과를 물었다. 처절한 외침이 돌아왔다. 거봉! 거봉!”

거!!!봉!!! 튼실한!!!! 거봉!!!!!!

날씨는 좋고 연애는 하고 싶은데 주변에 마땅한 사람은 없을 때, 사람들은 소개팅에 나간다. 그러다 보면 가끔씩, 원하는 것보다는 자주, ‘거봉’을 만날 때도 있다. 꽃단장을 하고 비장의 원피스를 살랑이며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집을 나섰다가, 발 아프게 신고 돌아다녔던 구두를 집어 던지고 싶은 기분으로 지하철에 구겨져서 돌아올 때가 있는 것이다. 나도 그런 적이 있고, 내 친구들도 그런 적이 있다. 소개팅을 해 본 여자라면, 분명히 당신도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나와 내 친구들의 소개팅 상대는 주로 남성이었던 까닭에, 서로의 경험들을 모아보다 보면 몇 가지 종류의 남성들이 눈에 띈다. 그 중에 특히 안타까운 사례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여성 동지들은 혹여 소개팅에서 이런 남성을 만나면 시간낭비 마시고 바로 패스하시길 추천 드리며, 남성 동지들은 혹시 내가 이런 사람은 아닌지 점검해 보거나, 아니면 ‘난 적어도 이런 사람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는 안도를 하시면 되겠다.

난 그들을 수박남이라고 부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나서 수박 겉 핥는 대화만 계속 하기 때문이다. 수박 겉 핥는 남자, 수박남.

먼저 누구나 다 아는 소개팅이라는 것의 본질을 상기해보자. 소개팅은 영어로 blind date, 그야말로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하는 데이트다. 누군가의 소개로 만나서 우리에게 연애 가능성이 있는지 어떤지 살피는 자리다. 그러니까 소개팅은

  • 생판 모르는 사람 두 명이
  • 데이트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안타깝게도 수박남들은 이러한 기본 중의 기본을 모르거나,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다.

그들의 행동에는 몇 가지 공통적인 패턴이 드러난다.

1. 네버엔딩 노관심 스토리

소개팅이 잘 풀리려면 상대방이 하는 말과 내가 하는 말의 비율이 6:4 정도면 된다는 말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아마 정해진 공식이라기보다는 적당히 비율을 맞추되, 상대의 말을 조금 더 많이 들어주려는 태도를 보이라는 뜻에서 누군가 퍼뜨린 말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리 있는 취지다.

왜 속살을 먹지를 못하니!!!!!!

수박남들과 상대방의 대화 비율은 9:1이다. 안타깝게도 수박남들은 혀가 빠지도록 수박 겉을 핥느라 소위 말하는 대화의 ‘황금 비율’이 난장판이 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첫 번째 만남에서 너무 말을 많이 한 것 같으면, 집에 가서 반성하고 이후 만남에서는 좀 자제해야 그나마 수습이라도 가능할 텐데, 내가 만난 수박남은 다섯 번 만나는 동안 계속 그랬다. 수박 껍질이 그렇게도 맛있었는지… 이제 와서 궁예질을 해 보자면, 아마 내가 애프터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 소개팅이 되게 잘 풀리고 있다고 착각했던 게 아닐까 싶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난 그저 그 사람이 궁금했기 때문에 다섯 번이나 만난 거였다. 그 사람의 알쏭달쏭한 매력에 호기심이 일어나고 더 알고 싶은 ‘긍정적인 궁금함’을 의미하는 게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무리 만나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4시간, 5시간을 대화해도 조금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렵게 잡은 소개팅이 아까워서 한번 더, 한번 더 우리 사이에 기회를 주다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난 ‘당신’이 궁금했는데!

수박남과의 만남의 특징이 그거다. 이게 잘 되고 있는 건지, 잘 안 되고 있는 건지 처음에는 알쏭달쏭하다. (물론 수박남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만한 진상짓은 그래도 하지 않았고, 사람은 착한 거 같아 보였던 점도 한몫 했다. 사실 수박남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수박남과의 만남은 맹물과 같았다.

아무리 만나도 조금도 우리 둘 사이가 가까워지지 않았다. 한 번 만나나, 다섯 번 만나나 그냥 이름이랑 신상 정보만 좀 알고 있을 뿐, 모르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만의 특징이나 매력을 전혀 엿볼 수 없었다. 나는 처음에는 한 번밖에 안 만나봐서 그런 줄 알았고, 그 다음에는 세 번밖에 안 만나봐서 그런 줄 알았고… 그러다 다섯 번이나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한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다.) 이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수박남의 발화 내용이 정말…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였다는 것에 있었다. 아무런 영양가도, 아무런 맛도 없는 겉도는 이야기들. 예시를 하나 들어 보겠다.

(처음부터 연상인 수박남은 말을 놨고 나는 존댓말을 썼다)

나 : 오빠, 무슨 전공이에요?

수박남 : 00과. (조금 특이한 과) 특이하지?

나: 네, 처음 들었어요.

수박남 : 과에 학생도 별로 없고 교수님도 별로 없어. 그런데 지난번에 그 중에 한 교수님이…. 블라블라 (교수님이 짜증나게 했던 이야기와 수업의 재미없음에 관한 이야기)

나 : 음, 그래도 그 학문이 좋아서 들어간 거 아니에요?

수박남 : 아니. 별 생각 없었어.

나 : 아… 들어가보니까 어때요?

수박남 : 뭐, 아무튼 그 교수님 말고는 그럭저럭 괜찮아.

렉시언니의 (유일한) 명곡.jpg

이런 식이다. 정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내용도 없고… 수박남과 나에 대해서는 1%의 정보도 알 수가 없는 대신 만날 일도 없는 타 대학의 어떤 교수님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 수 있다. 나는 “네, 처음 들었어요.” 이후에 뭔가 자기 과와 관련된 영화나 소설 등의 이야기를 한다든지, 아니면 예를 들어 우린 이런 걸 배운다고 간단히 설명이라도 한다든지, 과에는 흥미 없지만 동아리는 이런 데 관심이 있다든지, 정 더 할 말이 없으면 반대로 내 전공이나 대학생활을 물어본다든지, 그렇게 좀 더 이야기가 진행될 줄 알았다. 참고로 수박남은 그날 끝끝내 나의 전공을 물어보지 않았다. 수박남은 기본적으로 질문을 잘 안 한다.

물론 이런 식의 영양가 없는 대화를 어색하고 대화가 끊길 시점에 한두 번 정도 나눈다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 종일 만나서 하는 얘기가 이런 얘기라면, 집에 가는 길에 내 시간이 아깝고 허무하기만 하다면, 친구가 소개팅남 어떠냐고 물어봤는데 잘 모르겠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면… 이때는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여러분의 정신이 멍해질 다른 예시.txt

또 다른 예시를 보자.

(두 번째인가 세 번째 만남에 홍대 노리타에서 파스타를 먹었음)

나 : 방학 때 뭐하셨어요? (당시 8월)

수박남 : 친구들이랑 캠핑 갔어. 그 친구들이 다 친한 친구들인데, 한 7~8명 돼. 그런데 엄청 웃긴 애들이야. 아무튼 정말 웃겨. 누구누구는 운전을 맡았는데 걔가 완전 웃긴 애인데… 블라블라(그 사람이 얼마나 웃긴지 설명함)

나 : 주변에 활발한 스타일의 친구들이 많으신가 봐요?

수박남 : 걔네 7명만 그래. 아니, 그 중에서도 4명? 운전하는 걔하고 또 걔가 소개시켜 준 친구하고 또… (웃긴 친구들 소개 나열) 그래서 걔가 운전을 하고 가는데 갑자기 네비게이션이 말을 안 들었는데… 블라블라

나 :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 말을 자르며) 오빠는 평소에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많이 하는 타입이에요?

수박남 : 아니? 별로 안 그런데? 그래서 걔가…..

나 : (포기. 영업용 미소 장착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파스타에 집중)

이 정도 되면 내가 정말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난 정말 최선을 다했다. 수박남이 3박 4일 동안에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의 캠핑 얘기를 떠들며 열심히 수박 겉을 핥는 것을 멈춰주려고 옆에서 박수를 치며 주의를 환기시켜 “저기요! 우린 수다 떠는 친구 사이 아니고 소개팅 하러 만난 사이거든요?! 정신차리고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고요!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요!”라고 소리쳤다. 물론, 이 내용을 아직 잘 모르는 사이에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상황에 맞는 예의를 갖춘 버전으로 전달하려 갖은 애를 썼다.

오빠 파스타 식어요(…)

하지만 수박남은 모두 튕겨내고 열심히 수박 겉만 핥았다. 세 시간만 지나도 잊혀질 이야기를 파스타가 식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떠들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사람이 앞에서 말을 하고 있어도 듣는 척하며 듣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박남은 아웃포커싱 되고 음식점의 우아한 배경음악과 나와 파스타만 남아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최근 내 30대 후반 지인은 40대 초반의 남자와 소개팅을 했는데, 마치 내가 만난 수박남이 스무 살을 고대~로 더 먹으면 그렇게 될 것 같은 그려 놓은 듯한 수박남이었다. 그 수박남은 장장 6시간 동안 자신의 가족관계, 부모님과 나누는 대화(주로 결혼과 관련된…), 주선자 친구와 겪었던 에피소드를 쉬지 않고 떠들었다고 한다.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는 주제 자체로도 소개팅 첫 만남에서는 적절치 않다. 그런데 수박남들의 안타까운 특징은 단순히 민감한 주제를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난 솔직히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아요. 우리 나이 정도 되면 그런가 봐요. 난 거기에 대해 이러이러하게 생각하고, 이러이러한 느낌을 받아요. 00씨는 어때요?”

라거나,

“00씨는 혹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나요? (대답을 듣고) 나는 어쩌고저쩌고”

이런 식으로 주제에 대해 핵심을 꺼내 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물론 굳이 이런 식으로 결혼 이야기를 소개팅 첫 만남에 해야 할 이유 또한 어디에도 없다.) 수박남들은 끊임없이 겉돈다. 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본심도 말하지 않고, 상대의 생각도 물어보지 않는다.

자기 주변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 그들의 경험,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더라고요, 식의 이야기만 늘어 놓는다. 그 주제에 대한 자기 생각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이 든다.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6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며 그 남자는 단 한 번도 내 지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2. 전반적인 센스 없음

말로는 수박 겉핥기식 대화만 하다 왔더라도, 행동에서 매너와 배려를 보여줬다면 나는 수박남에게 호감을 키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좀 수다스러운 타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니까. 하지만 수박남은, 다른 많은 소개팅에 서툰 남자들처럼, 주변을 잘 살피지 못했다.

항상 주위를 경계할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에게 주의를 기울여 줄 수는 있쟈나여….

한 번도 무거운 유리문을 열어주거나 잡아주지도 않았고, 물컵에 물이 없거나 피클이 떨어졌을 때 웨이터를 불러주지도 않았다. 물컵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키가 180 가까이 되는 곰 같은 덩치의 남자가 내가 낑낑대고 문을 열 때까지 뒤에서 기다리면 쓰냔 말이다. 나한테 호감이 없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서 애프터는 꼬박꼬박 하면, 아,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거나 굉장히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구나, 라는 결론에 이르게 마련이다. 어느 쪽이든 호감은 쭉쭉 줄어든다.

내 지인이 만난 수박남은 너무 자신의 이야기에 홀로 집중한 나머지, 음식을 다 먹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자리에 앉아서 계~속 끊임없이 수박 겉핥는 소리를 냈다고 한다. 두 번의 저녁과 한 번의 커피, 한 번의 술자리에서 영원과도 같은 이야기의 끝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재빨리 “일어날까요?”를 밀어 넣는 것은 항상 지인의 몫이었다.

3. 혼자서 달아버린 연애의 부스터

그런데도 이상하게 수박남들은 자신의 소개팅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나는 마지막 만남에서 오늘 데이트가 나에게 좀 별로였다는 점을 상냥하게 어필하고 싶어서, 수박남이 지하철역 앞으로 데려다 주는 길에 “오늘 어땠어요?”라고 물어봤었다. 내 시나리오는 이랬다.

나 : 오늘 어땠어요?

수박남 : 난 재밌었어. 너는?

나 : 아직 오빠에 대한 얘기를 많이 못 들은 것 같아요. 오빠 친구들 얘기만 듣고요. 하하하. 다음 번엔 본인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해 주세요.

수박남 : 그랬나? 알았어. ㅎㅎ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아니 수박남이 그렇게 생각처럼만 술술 잘 풀리는 건 아니다.

나 : 오늘 어땠어요?

수박남 : 재밌었어. 잘가~

ㅎㅎㅎ… 나는 잘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서히 연락을 끊었다. 수박남은 5번을 만났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특별한 사이나 되었다고 착각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좋은 사람 만나세요~” 같은 말도 남기지 않고 그저 바쁘다는 핑계로 서서히 연락을 줄여 간 당시의 내 방식이 너무 서툴렀는지도 모른다. 한 달이 좀 넘게 지난 어느 날, 동네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치맥과 함께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망작 <레드 라이딩 후드>를 보려던 야심한 시각에 그는 문자를 보냈다. “…자니?”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 문자로 그의 번호는 영원히 내 핸드폰에서 추방되었다.

두 글자로 불러보는 구남친의 악몽: 자니

지인에게도 물어봤다. “그 수박남, 이제 연락 안 오지?” 지인은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좋겠냐는 투로 말했다. “아니… 계속 와.”

이러한 현상에서 유추할 수 있는 수박남들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다.

1. 자신을 드러낼 줄 모른다.

수박남들은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는 건 고사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 일부마저도 보여줄 줄 모른다. 그들은 쉼 없이 얘기를 하지만 주어는 자신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는 이렇게 느꼈어, 나는 이런 걸 좋아해,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그들은 말할 줄 모른다. 그들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는데…

내 친구가 진짜 웃기는 애가 있거든. 걔가…

제 친구들은 저보고 저러저러하다고 하던데…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보통 그러그러하다고들 하는데…

이런 말을 늘어 놓을 뿐이다. 잠깐 어색하거나 얘깃거리가 없을 때야 그런 말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화의 80% 이상이 저런 종류의 얘기라면 문제가 있는 거다. 계속 듣다 보면 필연적으로 이런 문장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인가?

 

여기서 소개팅의 핵심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

  • 생판 모르는 사람 두 명이

만나는 것, 그것이 소개팅이다. 친한 친구들끼리나 가족들끼리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3만큼만 말해도 나머지 7만큼을 다 알아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방은 그렇지 않다. 당신이 말하는 만큼 당신에 대해서 알아간다.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방식도 당신에 대해서 말해준다. 아무래도 우리의 안타까운 수박남들은 이걸 모르는 것 같다.

나는 사실 수박남에게 호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허우대가 멀쩡하고, 성질이 온순해 보여서 첫인상은 딱히 마이너스가 없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어떤 개성이 있는지, 어떤 장점이 있는지, 어떤 취향이 있는지 아주 조금씩이라도 만남과 대화 속에서 알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수박남은 다섯 번의 만남 동안 혼자 실컷 떠들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적어도 만남을 유지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2.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다.

그렇다. 사실 이게 핵심이다. 수박남들은 자신의 속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붉을지도 모르는 속살, 향기로울지도 모르는 속살, 달콤할지도 모르는 속살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다. 그들이 관심 있는 건 오직 수박의 겉이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매끈매끈한 수박 겉!

“너는?” 그 한 마디를 못해…(주륵)

내가 위에 적어 놓은 수박남과의 대화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아, 저기서 자신의 노잼 스토리를 늘어 놓는 대신에, 너는?” 이라고 한 번만, 단 한 번만 반문했더라면 이렇게 안타깝지는 않았을 텐데. 6대 4의 황금비율은 결국 “너는?”에서 나오는 법이거늘.

수박남은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대화는 ‘내 질문->수박남 답변->내가 알아서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먼저 나에게도 “너는?”하고 물어봐 주기를 작정하고 기다려 본 적도 있는데, 그랬더니 대화는 끊겼고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내가 다시 질문을 던질 때까지. 그가 먼저 질문했던 건, “덥지 않아?” “지하철 타, 버스 타?” 문자로 만나는 약속을 잡을 때하고, “…자니?” 그 정도?

나와 지인은 수박남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며 우리가 같은 기분을 느끼고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 사람은 그저 ‘여자친구(지인의 경우 미래의 아내)라는 것’을 원해서 나왔구나. 그냥 여자라면 누구든지 만나고 싶었던 거구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관심사를 갖고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구나. 적어도 먼저 물어 볼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구나.

그것은 아주 불쾌한 기분이었다.

3. 관심이 없으니 배려도 없다.

이제 그들의 무(無)매너가 못돼 처먹었거나 상대방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저 상대방한테 인간적인 관심이 없어서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대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볼지, 상대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관심이 있고 궁금하다면, 절대 상대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갈 때까지 멀뚱히 서 있거나 “일어날까요?”라는 말을 먼저 꺼낼 때까지 쉬지 않고 떠들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 데이트를 하는 것

또한 소개팅의 본질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조금의 떨림도, 조금의 로맨스도, 조금의 나중에 떠올렸을 때 미소 지을 만한 언행도 찾을 수 없다면 왜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겠는가? 로맨틱한 배려는 약간의 긴장을 동반할 수도 있다. 평소엔 안 하던 짓이나 말을 하려면 조금은 어색할 수도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특별해질 가능성이 싹트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전반적인 편안함과 따스함 속에서 약간의 어색함과 긴장을 느끼는 순간에 튀는 스파크가 ‘케미’인 것이다.

케미덩어리는 아니라도 케미 조각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수박남들은 그것을 놓친다. 지인은 자신이 만난 수박남이 소개팅 특유의 어색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쉴새 없이 떠드는 게 아닐까, 라는 느낌도 들어서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차라리 조금 긴장해서 허둥지둥하면 귀엽기라도 하겠다. 수박남들은 너무 자기 혼자 편안~하게 소개팅을 하려고 한다. 자신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할 때 필연적으로 느끼는 어색함도 없이, 상대에 대한 궁금증도, 배려도, 눈치도, 긴장도 없이.

나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안 믿는다.

그래서 소개팅도 꼭 보자마자 매력 있다, 없다, 흑백논리로 결정 나는 한 판의 도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소개팅은, 약간의 호감을 전제로, 어색하고 조심스럽지만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한 번 만났을 때보다는 두 번 만났을 때, 두 번보다는 세 번 만났을 때,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친해지다가, 서서히 ‘케미’가 고조되어서 친한 지인에서 머물 것인지 그보다 더 깊은 사이가 되어 볼지 결정하는 ‘결정의 순간’에 다다르는 그런 과정의 전반적으로 달달하고 블링블링하고 가슴 설레는 데이팅 프로세스다.

그런 점에서 수박남은 나에게 있어 최악의 소개팅 상대였다.

진짜 제가… 안타까워서 이 글 쓴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박남들에게 악감정이 전혀 없다. 그냥 한없이 안타깝다. 부디 연애 경험이 별로 없는, 언젠가 소개팅에 나설 예정인 남자들이 이 글을 읽으며 곰곰이 자기 모습을 돌아보길 바란다. 혹시라도 가을 바람에 마음이 살랑거려 나도 어디서 꿀리진 않어~ 흥얼거리며 나선 소개팅 자리에 나가서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호박에 아무리 줄 그어봤자 수박 겉만 핥다 들어올 거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덧붙이고 싶은 말 : 혹시나 수박남과 비슷한 남자에 대한 경험담이 있거나, 혹은 수박녀(!) 목격담이 있다면 궁금하니까 댓글로 달아 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