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글이 어렵다는 말과 평이하다는 말을 동시에 듣고 정신분열을 일으킬 뻔했다.

이토록 두터운 미스핏츠의 독자층에 경의를!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에는 재미와 교양을 한번에 잡아보겠다는 불가능한 다짐을 하고 단골 까페에 책을 한바가지 싸들고 와서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이번엔 쉬운 책을 가지고 좀 복잡한 얘기를 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이번엔  아주 짧은 소설이다.

목소리 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2010, 바다출판사

이번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 먼저 이야기해야 할 사람이 있다.

저자? 아니다. 삽화가? 아니다. 이 책을 기획한 기획자다. 그리고 더불어 이런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포스트모던 문학의 시작이자 정점, 작가와 철학자들의 작가, 세계의 모든 지식을 도서관 하나에 집어넣고, 끝없이 갈라지는 정원을 만들어낸 마술사, 노벨상을 받지 못한것이 노벨상의 수치가 되어버린 거장 중에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당신이 만약 문학적 소양이 가득한 사람들의 파티에 초대됐을 때그런게 실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할말이 없다면 ‘보르헤스 재밌지 않아요? ’ 라고 운을 떼어도 좋다. 교수님들도 좋아하고 작가들도 좋아하고 철학자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한다. 응? 사실, 내가 보르헤스가 근무하던 도서관 보려고 아르헨티나까지 갔다온 사람이다. 말도 안 통하는데 한국어로 된 책 들고가서 사진찍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빠심도 드러낼 겸 잠시 보르헤스 소개를 좀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알아두면 다 피가되고 살이되고 리포트가 되는 내용이니 알아두자.

피에르 메나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어느날, ‘돈키호테’를 쓰려고 마음먹는다. 돈키호테? 이미 있는 소설을 또 쓴다고? 그러나 그의 꿈은 원대하고 원대했다. 그는 말 그대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몇백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써보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는 세르반테스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세르반테스와는 좀 다르게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드디어 소설을 완성한다. 그런데 그 글은 결국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토시 하나 틀리지 않았다. 어? 베낀 거야?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말 피에르 메나르는 돈키호테를 ‘쓰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한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신기하게도 세르반테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오묘하고, 훨씬 더 풍요로운 맛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의 줄거리다.

교수님들은 이 소설 하나 가지고 몇주간 이야기할 거리가 있겠지만 우리는 우선 차분하게 이 이야기에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엄청 신기한 일 아닌가?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그런일이 실제 가능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다’.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니 글자가 똑같아도 뭔가 더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게 사람이란 말이다.

보르헤스의 단편은 거의 이런식이다.

세상에서 제일 정확한 지도를 만들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지도가 지구만 하더라는 얘기-그렇다면 지도가 결국 지구일까? 아니면 지구와 유사한 지도일까?-라던가 세상 모든 지식을 담아둔 책-하지만 그 책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어느 페이지를 집어도 그 사이에 무한한 페이지가 있다-이라던가. 보르헤스의 소설은 믿을 수 없는 일을 믿도록 하게 만든다. 오직 문학만으로.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다.

사실 보르헤스 책으로 바로 입성하기는 좀 어렵다. 단편들 등장인물, 논문, 책 등등이 다 얽혀있는데, 뭐가 어떻게 얽혔는지 공부 없이 읽어서는 재미가 반감된다. 그래서 보르헤스를 좀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바로 보르헤스 세계문학 전집을 읽는 것이다.

1973년, 보르헤스는 이탈리아의 어떤 출판사로부터 제의를 받게 된다. ‘저희가 이번에 세계문학 선집을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기획 좀 해주시죠. 좋아하시는 작가 서른 명쯤 뽑아주세요.’ 보르헤스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스물 아홉의 단편을 모아 시리즈로 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보르헤스 세계문학 선집,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다.

이 시리즈의 장점은…우선 들고다니면서 읽기 딱 좋은 사이즈다. 길어도 200페이지 안팎인 데다가 판형이 작아서 아이패드가 들어갈만한 공간이면 어디든 들어간다. 가방에 항상 넣어두고 있다가 아무때나 꺼내서 한손으로 들고 읽기엔 이만한 책도 없다. 게다가 전부 단편이라 왠만큼 게으르게 읽지 않는 이상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꽤 이쁘다. 책 표지는 툴리오 페리콜리라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인데 취향에만 맞으면 초현실주의적이다 일부러 사람들 잘 보이는 곳에서 책을 꺼내드는 자신을 볼 수 있다.

물론 장점만 있는 시리즈는 아니다.

출판사가 말하는 작품 설명을 살펴보자.

‘무엇보다 이 컬렉션은 천편일률적인 작품 일색인 세계문학 전집과 거의 중첩되지 않는 개성적인 문제작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감이 오시는지? 거의 중첩되지 않는 개성적인 문제작…이라고 표현했지만, 쉽게 말해 꽤나 마이너한 취향의 단편들이 대부분이다. 이정도 짧은 책이면 일년 안에 다 읽어봐야지 라는 굳은 생각을 가지고 전집 완독을 시도했다가 몇권 못읽고 방구석에 장식품이 되어버린 케이스도 몇번 본 적 있다.

일례로, ‘요재지이’같은 경우엔 우리가 재밌다고 생각할만한 단편(예를 들어 천녀유혼)은 다 빼고 외국인이 좋아할 법한 미묘한 귀신나오는 단편같은것만 실려있다. 체스터턴(브라운 신부로 유명한 소설 작가)이나 카프카도 비슷한 상황. 보르헤스가 써둔 해제가 맛깔나긴 한데, 막상 본편을 읽다보면 이 양반이 뭘 보고 이런 해제를 썼는가 의심스러운 경우가 좀 있다. 역시 거장의 생각은 범인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가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시리즈에서 제일 읽기 쉬운 작품(물론 내가 읽은 작품 중에)을 골라봤다.

적어도 문장과 문장이 이어지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닐 것이다.

‘목소리 섬’ 의 저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아마 여러분이 최소 두권 정도는 작품을 읽어봤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냐면…

  1. 보물섬
  2.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그렇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이젠 이중인격=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공식이 붙을 만큼 유명한  세계문학이지만 처음 나온 1886년에는 말 그대로 폭탄같은 소설이었다. 그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나온지 2년 뒤, 런던에 잭 더 리퍼 사건이 터지면서 ‘진짜 아니냐’ 라는 헛소문이 떠돌만큼 유명세를 떨쳤다. 현대적으로 어레인지된 작품들에 대해서는 말할것도 없을 것이다. 뮤지컬, 영화, 연극, 드라마…

스티븐슨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서 태평양의 섬에서 죽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그의 소설은 모험적이거나 기괴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이야기꾼의 재주를 드러낸 것도 있고, 사람의 이중성을 깊게 탐구한 현대적인 것도 있다. 책에 실린 네개의 단편도 그렇다. ‘목소리 섬’과 ‘병 속의 악마’는, 천일야화의 한 부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괴한 이야기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니까 생략. 그리고 네개의 소설 중 제일 뛰어나다고 할 만한 ‘마크하임’은 지금 읽어도 최신 소설같은 세련됨이 묻어나오는 소설이다. 원작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기억나지 않는 분이라면, 이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좀 절약해봐도 좋겠다.

사실 이번 시리즈를 선택한 이유는, 보르헤스를 좋아해서만도 책이 짧고 읽기 쉬워서만도 아니다. 책을 골라보는 즐거움을 주고 싶어서다. 책을 안 읽다가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은 으레 ‘누가 봐도 좋은 책’ 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책은 결국 제일 맘에드는 책 한권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표지를 보고 예뻐보이는 것을 고르거나, 비교적 쉬워보이는 것을 고르거나, 친숙한 작가를 고르는 것 등 무엇이라도 좋다. 사실 이 말을 더 하고 싶었다. 모든 사람과의 만남이 즐겁거나, 행복하거나 의미있을 수 없는 것처럼 책도 마찬가지다. 그냥 만나고, 실망하고, 다시 만나고 행복하고. 그렇게, 가볍게 책을 골라보는 경험을 해보길 바란다.

추가 1 : 해제를 보고 보르헤스가 좀 매력적으로 보인다면, 불한당들의 세계사부터 읽어보자. 한국에 나온 시리즈중에는 제일 무난하다(좀 별거 없어보일 수도 있다). 그의 환상적인 분위기가 좋다면 이탈로 칼비노 선집도 추천한다. 얼마전에 새로 출간됐는데 꽤 예쁘게 나왔다. 아무 생각없이 픽션들 같은것부터 집어들면 책임 못진다

추가 2 :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중 추천할 만한 다른 책은..우선 본 것중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포송령의 요재지이, 잭 런던의 미다스의 노예들 정도. 물론,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구미에 맞춰 고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