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정신분석이라고 불리우는 정신과 상담치료를 시작한 것은

스무 살 때였다. 그 당시만 해도 핸드폰에 뜨는 엄마라는 두 글자가 일상을 마비시킬만큼 그녀는 공포의 존재였고 지난 20년간 그래왔듯 말도 안되는 이유로 나를 학대하던 때였다. 정신과 선생은 내게 가출을 지시했고 드디어 나에게도 광명이! 라는 환희와 함께 집을 뛰쳐나와 할아버지와 둘이서 오손도손 살게 되었다 (왜 진작에 나오지 않았냐고 한다면 묶어 놓고 계속해서 전기고문을 당하던 강아지가 개가 되어 목줄을 풀어줘도 도망치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되겠다).

남으로부터 만들어진 불안이지만, 결국 그것을 해갈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사진/CC by Marlana Zanatta, Flickr

남으로부터 만들어진 불안이지만, 결국 그것을 풀어내야 할 사람은 나였다. 사진/CC by Marlana Zanatta, Flickr

처음으로 느껴보는 자유는 달콤했지만 여전히 언제 엄마가 찾아와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지옥에서 탈출했다고 믿고 싶었지만 그건 안타깝게도 사실이 아니었다. 불안은 물리적으로 도망칠 수 있는 것이아니었다. 불안의 기원은 가해자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불안이라는 방어기제는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나는 거의 7년 동안 섭식장애에 시달렸다.

중학교 3학년 때 시작된 거식증은 고등학교 내내 날 괴롭혔고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폭식증이 부메랑처럼 날아왔다. 식이장애는 우울증의 다른 이름이다. 어떤 대상으로부터 발생한 분노가 유발대상과의 적절한 협의점을 찾지 못하고 왜곡되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우울증이고 식이장애 역시 해결하지 못한 분노가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다. 결국 우울증이나 식이장애 모두 죽을 것 같으니 나를 좀 돌봐달라는 표현의 다른 모습인 셈이다.

섭식장애, 폭식장애, 그리고 또 섭식장애.  사진/CC by Collective nouns, Flickr

섭식장애, 폭식장애, 그리고 또 섭식장애.
사진/CC by Collective nouns, Flickr

식이장애의 근원에는 매우 낮은 자존감이 자리하고 있다. 나의 경우 십대 이전부터 늘 비난과 위협에 시달렸고, 갖은 욕을 먹으며 스스로가 하찮고 불결하며 쓸모없는 존재임을 각인당했다. 자존감은 인정과 애정, 칭찬을 기반으로 다져지는데 어린시절 형성되지 못한 자존감을 후일 스스로 구축하기란 정말 더럽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감 자가 구축의 과정은 대략 이렇다.

일단 쓸데없이 비난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어떤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데서 자존감 재구축이 시작된다.

세뇌란 깊게 패인 낙인과 같은 것이어서 레이저 같은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을 여러번 거쳐야 그 융기가 희미해지는데 문제의 원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 역시 끊임없이 되새김질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 단계는 본인이 지닌 재능과 가치와 장점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자존감을 스스로 구축하는 과정은 힘들다. 힘들 수 밖에 없다.

자존감을 스스로 구축하는 과정은 힘들다. 힘들 수 밖에 없다.

이 단계에서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장점을 칭찬하고 발견해 줄 누군가가 있으면 매우 좋겠지만 그건 행운이 따를 경우이니 스스로라도 자신의 장점을 샅샅이 찾아내어 되뇌고 되뇐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환하게 웃어주고 아름다워보이는 점들을 칭찬한다. 물론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자존감이 평균이상인 이들은 오글거린다고 하겠지만 나에겐 아무리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거식증이 그렇다. 거지같아 보이는 나를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기 위해 가장 쉽게 컨트롤 할 수 있고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몸이기 때문에 타인이나 사회가 주장하는 기준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슬프게도 거식증 감염자에게 완벽의 기준은 없다. 그 기준이 애초에 모호하며 제시자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멸할 때까지 살을 빼다 죽어버리는 경우가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어쨌든 거식증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하다는 질타도, 뭐하는 짓이냐는 꾸짖음도, 당장 살을 찌우라는 협박도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존중하는 사랑 뿐이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 말이다. 하지만 주위에 그런 사랑을 주는 경우 역시 희박하니 당신은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

당신 잘못이 아닌 것을 아니라고 확인하고 당신의 장점들을 열심히 찾아내보았다면 이제 당신이 좋아하거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운동을 하거나 영화를 봐도 좋다. 피해를 주는 게 아닌데도 누군가 비난을 한다면 깔끔하게 무시하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그게 살길이다.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시작해도 좋다. 당신 마음의 소리에 따르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봉사활동이나 각종 “착한”일을 해보는 것도 좋다. 당신이 그만큼 애정이가득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 역시 자존감 구축에 도움이 된다. 다만 그것이 당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

조금 에너지가 쌓였고 전보다는 그래도 세상이 살만해졌다면 당신을 괴롭혔던 것들에 대해 글로 쓰는 것을 시도해본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쌍욕을 잔뜩써도 좋고 저주를 해도 좋고 뭐든 좋으니 일단 쓰는 것을 시작해본다. 글을 쓰는 일이 별로라면 말을 하는 것도 좋다.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사람이 없는 곳을 걸으며 혼잣말을 해도 된다. 미칠듯한 분노가 끓어오를때 바로 화를 내지 말고 대상이 있는 것처럼 혼자 화를 내거나 욕을한다. 직접 싸우는 것보다 제 2의 죄책감이나 후폭풍을 예방할 수 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이나 글을 쓰는 것이 어색하다면 예상 청자나 독자를 두고 스피치나 글을 쓰면 정리가 더 잘 되는 경우도 있다. 실제 나는 익명처리되는 온라인 공간에 무작위 독자를 향해 글을 쓴다.

문제의 원인을 다층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여러가지 관점의 공부를 하는 것도 좋다.

내 몸은 누가 평가하는가?

내 몸은 누가 평가하는가?

당신이 겪은 문제가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나 인식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여성의 몸에 대한 평가는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남성중심의 사고로부터 이뤄진다. 내 몸에 대한 판단 기준이 내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딩신은 자유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것들의 반추는 당신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명이고 당신의 가치를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당신이 자존감을 회복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때로는 사무치도록 외로워지고 그만두고 생을 마김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때가 있을 것이다.

삶은 절대 혼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늘 경쟁에 시달리느라 이기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강박에 약점을 숨기느라 급급하다면 그것은 당신을 살리는 일이 아니다.

당신의 약점과 상처는 절대 당신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의 삶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삶의 모든 문제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즉 당신이 겪고 괴로워하는 문제가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며 당신이 약점을 먼저 드러내는 용기를 보였을 때 나도 그렇다며 말을 거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당신의 수치를 드러낼 때 비로소 당신은 치유에 가까워질 수 있으며 다른 이를 치유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내가 할아버지와 살면서는 행복했을까?

그렇지 않다. 나는 심각한 우울증과 늘 힘께했던 사람이었고 그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노를 제대로 해소해야했다. 부모에 대한 분노를 표현할 수 있기 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가 언젠가는 나를 사랑해주겠지, 언젠간 나를 안아주겠지라는 이 멍청한 기대 때문에 나는 착한 아이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녀가 나를 미워한다는 사실이 끝없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화를 내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가장 통쾌했던 순간은 스물두살, 그녀에게 욕을 했을 때였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당한 그대로 물리적 폭력도 행사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이런 일을 행하는 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든다. 대신 폭력을 행사하는 상상은 꽤 도움이 된다. 과거에 당신이 당하기만 했던 기억을 재구성 해보는 것이다. 상상 속에선 극단으로 가도 괜찮다. 사람이 다치지 않는 곳에서 물건을 깨부숴도 좋다.

치유  사진/CC by Adam, Flickr

치유는 결국 애도 후에 가능하다. 
사진/CC by Adam, Flickr

잊으려고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슬퍼하고 싶은 만큼 슬퍼하는 과정,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애도의 과정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다. 사춘기에 보통 애들이 부모한테 대드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나는 체화된 피학 때문에 겪지 못했고 나중에 어렵게 그 과정을 밟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20년 이상 쌓인 분노가 몇번의 폭발로 해소될 순 없는 노릇이었고 나는 여전히 분노의 이면에 숨길 수 없는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 불안의 근원이었다.

그 불안은 폭력에 대한 저항을 불가하게 만든 이유였고 지옥같은 시간을 견디며 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끝없이 갉아먹고 그들의 사랑에 의존적인 나약한 존재로 만드는 것도 불안이었다. 내가 그 불안을 극복하게 된 것은 그 두 사람들이 앞으로도 절대 내가 원하는 안정적인 사랑과 신뢰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확인함과 동시에, 결국 나의 빈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보다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남자친구든 여자친구든 할아버지든 선생님이든 그 누구도 나를 온전히 만족시키고 충만하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온몸으로 깨달았다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은 아니나 의존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내가 할아버지 집에서 살게 되었을 때 나는 할아버지가 나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끝없는 사랑과 이해를 받을거라 믿었다. 정신과 선생 역시 마친가지였다. 나는 나에게 최적화된 공감을 원했고 그것을 정신과 선생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그건 독심술이 가능하거나 신이 아닌 이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성장하고 있는 페이스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을 말이다. 당신이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안위와 건강과 미래를 살뜰히 챙기고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당신을 안전하고 편안하고 즐겁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당신이라는 말이다. 주위에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당신이 받고 싶은 사랑을 그들에게 주면 그들은 응답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응답률은 절대 100%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든 당신을 챙길 수 있는 것은 당신 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불안이 나를 덮쳤을 때 나는 숨쉬기 조차 힘들었다.

1초에 맥막이 두 번씩 뛰고 밀폐된 공간에 있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누군가의 사랑을 끝없이 갈구하고 나를 불안에서부터 벗어나도록 도울 사람을 찾아 해메이며 나는 괴로워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나 스스로에게 해주고 나를 칭찬하고 소중히 여기면 되는 것을 말이다.

불안장애를 위한 약물은 나에게 듣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뜨려 나를 더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우울증 약은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데 효과가 있었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읺은 채 복용하는 약물의 한계는 분명했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다.  사진/CC by digitalplmp, flickr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다.
사진/CC by digitalplmp, flickr

나는 고군분투했다.

몸이 고통을 느낄 때만 겨우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앞이 깜깜한 날들만이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신이 있다면 내 당신을 죽여버리고 말겠다고 생각했던 날들을 지나 나는 이곳에 도착했다. 세상에 고통은 정말 백화점의 옷가지 수 만큼이나 많다. 부끄러운 자식이 되지 않기 위해 성적에 목숨걸어야 하고 그 성적이 곧 나의 자아가 되는 삶, 성숙하지 못한 부모가 내뱉는 칼날같은 단어들, 어쩌면 이성을 잃어버린 손찌검들. 혹은 낯선이가 당신의 몸을 더듬고 수치심과 모욕감에 온 몸을 불사르고 싶을 만큼 괴로운 순간들. 그 때에, 부디 당신을 미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이겨내고 스스로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특별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자살하면 다음 생애에 똑같은 괴로움을 또 당한다는 말을 나는 어디선가 들었다. 끔찍하지 않은가? 후생이 있다면 그 생은 행복할 수 있도록 이번엔 착하게 살아보려는 것이 내 삶의 목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업보청산. 나는 종교가 없지만 각종 종교를 짬뽕한 기이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해두자.

내가 잘 살길 바라는 만큼 나는 당신이 잘 살길 바란다. 당신을 스스로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그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