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취해따

자 이제 새벽 한시 반. 주방에 엄마가 쟁여놓은 소주를 깐다. 엄마는 항상 고기 잴 때 비린내를 없애야 한다며 소주를 사다두시지. 하지만 한 병을 사는 일은 없어. 장바구니에선 소주병이 챵챵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와요. 고기보다 나를 술에 재고 싶은 날이 더 있기 마련이야. 나는 여분의 소주를 깐다!  머그컵에 소주를 따르고 볶은 콩도 깐다! 왜 이러냐고? 그래. 가을이라 그래. 가을이라 그래. 헤어진 니가 또 가을가을하면서, 마음에 떠올라서 그래.

tㅜㄹ줘

주모 여기 술 줘요 술………..흐르륵……..

버스커가 울부짖고 그 소리에 나도 울고

버스커버스커 노래를 듣는 게 아니었어. 왜 장범준은 봄을 장악한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가을까지 씨를 뿌렸는가. ‘처음엔 사랑이란 게’ 이런 노래 들으면 그날 밤 잠 다 잔 거야. “아 가을이니 가을 기분 내볼까~”하면서 이어폰 꽂았지? 그리고 버스에서 까딱까딱 졸다가 창밖을 봤는데 밤풍경이 반짝반짝하니 또 쓸쓸하고 말이야. 버스 내려서 집까지 걷는데 바람이 차. 가을 냄새가 나. ‘처음엔 사랑이란 게 참 쉽게 영원할 거라 그렇게 믿었었는데~ 그렇게 믿었었는데~ 오호~’ 장범준이 울부짖어. 그러면 뭐야? 마음에 금이 쩍 가. 오야. 잠이 안 와. 지난 일인데 자꾸 생각이 나. 그래 그렇게 또 수렁에 빠져.

나야, 갓범준. 잊었던 연인의 망령을 깨우는 소환술을 보여주지.

나야, 갓범준. 잊었던 연인의 망령을 깨우는 소환술을 보여주지.

연애가 뭐라고 이렇게 사람을 괴롭혀. 지나간 사람이, 지나간 추억이 뭐라고 이렇게 또 마음이 찡해. 이불을 끌어당겨 다시 잠을 자려는데 또 자꾸 어둔 눈 앞에 뭐가 아른거리잖아. 노래는 왜 들었을까. 분명히 누군가 생각날 만한 아련한 노래인데 뭐하자고 들었을까 그런 생각 하는 거야. 아, 내일 일찍 일어나야 되는데. 그래서 또 그래. 막 다그쳐.

야-. 이 노래 듣고 우는 사람 얼마나 많겠냐. 이 노래 듣고 우는 사람 수만큼 내 사랑도 그렇게 흔해빠진 그냥 ‘사랑’ 아니겠냐. 그런데 뭘 그리 특출나냐. 뭘 그리 서러워서 아직도 많은 걸 못 잊고 기억하냐.

이렇게 타박해.

픵..

픵.. (사진=asier.quintana, flickr)

괜찮아, 미련이야

아니, 말리지도 말고 굳이 떠올리지도 말고 가만 놔둬봐. 그러면 생각이 막 흘러가. 장면이 막 흘러가면서 뒤죽박죽 생각이 나. 비 오던 놀이터, 첫 데이트 때 네가 후드티를 입었다고 그런 게 다 기억나. 지하철이 철컹철컹 막 지나가는데 소리가 다 없어지고 네가 다가오던 거. 둘 다 우산이 없던 날 놀이터에서 비를 피한 게 다 기억 나. 지지고 볶고 싸우고 너도 나도 성질 못 이겨서 각자 앞에 둔 소주 다 마시고 뻗었던 것도 생각 나. 새벽 4시에 걷던 게 자꾸 그렇게 생각이 나. 그렇게 슬슬 장면들이 흘러가. 생각해보면 나쁜 것보다 좋은 게 더 많았는데 말이야.

참, 그렇대도 아름다운 이별은 못 돼. 그렇지 않아? 이별이 어디가 아름다워. 덜 살아서 그런가 이별이 아름답다는 게 이해가 안 돼. 내가 기억하는 이별은 너무 안 예뻐. 어떤 날은 너무 짰어. 울기는 지지리궁상 아주 팔목 소매 다 젖도록 울어서 그런 이별은 너무 짰다고. 또 어떤 이별은 너무 싱거워. 아무 생각 안 들어. 그냥 나를 쉽게 버리고 떠났던 옛날 그 사람이 아, 이런 마음이어서 날 쉽게 떠났겠구나. 역지사지 이해가 돼. 내 앞에 있는 우는 사람이 눈에 잘 안들어와. 이 사람한텐 내가 짠 이별일 텐데 난 하나도 안 짜구나, 그러고 멀뚱히 쳐다봐. 정들어서 조금 마음은 아파.

맞아. 봄날은 가.

후회로 쌓는 담

그러지 말 걸

이 말을 매 가을 염불하듯이 되뇌이는 거야. 마음 쓸쓸할 때 자꾸 생각이 나는 거야. 돌아볼 때마다 후회를 처덕처덕 한 덩이씩 발러. 그렇게 미장이질을 해서 뭘 완성하는지 알아? ‘후회’의 담이야. 그 담 너머로 나를 좋아해준 한 사람이랑 이쁘고 어리고 마음도 귀여운 내가 저기 쩌어기서 둘이 꽁냥꽁냥하고 있어. 싸우기도 하고, 서로 오지게 상처주기도 하고, 사람 둘이 할 수 있는 마음 나눔은 다 해. 미워하고 경멸하고, 좋아하고, 놀라워하고, 매일 보고 싶어 하다가 다시는 보기 싫다고 남이 되고. 담이 없으면 그게 온전히 사람끼리 마음나눔으로 보일 텐데 그게 안 보여. 덕지덕지 후회를 쳐바른 담 때문에 그게 안 보여.

그래서 이별이 아름답질 못해. 그게 ‘헤어지자’한 때에 그랬던 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이별이 아름답질 못해. 아이고. 그래 사실 이거 다 내가 한 거지. 근데 다들 그래. 다들 이별이 아름답지 ‘못하도록’ 하는 뻘짓들을 해.

이별 뻘짓 1. 자기파괴

사뿐히 어디 한 번 즈려밟고 가보라고 (으득)

뻘짓에도 끕이 있어. 끕이 있다고. 레베루. 클라쓰. 끕! 제일 하끕이 뭔지 알아? 난 알아. 지행합일로 알아. 머리로도 아는데 몸으로도 해봤거든. 김소월 아저씨 (이름만 왜이렇게 이뻐)가 또 이거 전문이야. ‘나를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이 아저씨가 꽃시를 썼어. 마야가 롹큰롤 버전으로 부른 그 진달래꽃이 이 아저씨 꽃시잖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즈려밟고 ‘아이고 미안해라’하고 돌아오라고 저런 시 쓰는 거야. 마야가 왜 그렇게 성대 찢으면서 노래했겠어. ‘즈려밟고 (이 꽉물고) 가시옵소서?’ 협박하는 거야. 가는 사람 괴로우라고, 네가 버린 내가 이렇게 괴롭다,하고 시위하지. 술 먹고 ‘나 이렇게 괴롭다. 왜 전화 안 받니….’ 이런 음성 메시지 남기지 말라고! 돈 든다고! 삐 소리 나기 전부터 요금 나가고 있는 거라고!… 꺼이꺼이꺼이… 새벽 4시 15분에 ‘또 꿈에 니가 나왔다. 나한테 어떻게 이러니’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아고! 말라고! 말라고! 꺼이…꺼이….꺼이…..끅끅….

쿠렉퀙뤡…. 음. 그래. 내가 심하게 말했지? 그래도 상심 하지마. 이런 말 하는 데 다 이유가 있지 않겠니. 하끕에도 끕이 있어. 공부를 못 할 거면 뒤에서라도 꼴찌를 하라는 얘기가 있지? 그래서 나는 자랑스럽게 뒤에서 일등이야. 그러니까 저런 소리 하는 거야. 내가 대장 진달래꽃이야. 그래서 저런 짓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나는 이별 후 자기박해의 살아있는 표본이었거든.

동동주를 다섯 통 먹고 전화 했어. 한 17통 했나. 받을 때까지 했는데 안 받더라고. 그래서 음성 메시지도 많이 남겼어. 난 취한 와중에 집중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음성사서함 주제에 ‘삐-녹음 되었습니다’ 하면서 내 말을 끊더라고. 그래서 또 남기고 또 남기고. 그랬지. 그러고 다니다 다리가 나가서 목발을 했는데, 그러고 집 앞에 찾아간 적도 있어. 보고 가슴이 안 아프면 머리라도 좀 아프라고 죽일 듯이 목발을 휘두르고.

(못 들은 척)

이별 뻘짓 2. 허해서 괜히 모임 나가기

날 사랑하기는 했니

이별 후엔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야. 난 이렇게 니 생각이 많이 나는데 넌 내 생각을 왜 하나도 안 하는 것 같지? 이런 생각이 들면 계속 찔러보고 싶어지는 거야. 넌 정말 내 생각 안 나냐. 나 때문에 가슴 아픈 적 없었냐. 머리라도 아픈 적 없냐. 지금은 어떠냐. 뭐? 아니라고? 이런 거지같….은…………. 너….. 날 사랑하기는 했냐?

이 질문 나오면 끝난 거야. 거울을 봐. 처절한 미저리. 네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올라와 있을 거야. 것봐; 아름다운 이별은 없지?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건 다 홈쇼핑 광고 같은 말이야. 요구르트 제조기 사봐봐. 2개월까진 잘 쓰지? 근데 3개월부터 애물단지야. 할부는 남았는데 이제 반납하고 싶어. 빼도박도 못하지. 니 얼굴 봐봐. 사랑해서 예뻐졌니? 그거 딱 3개월이야. 헤어지고 몰골 좀 봐. 홈쇼핑 물건 이거 반납이 안 돼. 끌어안고 살아야 돼. 방 한 구석에 내버려두고 웅웅 거릴 때마다 죽일 듯이 째려보면서. 그게 사랑이고 그게 이별이야.

그래도 사람이 살아. ‘밥만 잘 먹더라’하는 노래가 괜히 나온 줄 알아? 5키로씩 쪄. 마음이 허한 건데 위가 허한 줄 알고 밥을 먹는다고. 또 뭐가 있는지 알아? 한동안 아무도 안 만나고 싶다가 또 갑자기 사람 욕심이 생겨서 지역을 암행어사급으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 동아리에 출두요! 과에 출두요! 동창모임 출두! 여자친구들 모임 출두!

하.하.하.하. 정말 재밌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니 기분이 좋네! 나 이렇게 잘 살아 봐봐 짜샤. 이런 심리.

이별 뻘짓 3. SNS 뒤지기

SNS를 쥬깁시다 SNS는 우리의 원수

그렇게 사람들 만나서 웃고 울고 술 먹고 밥 먹고 떠들면 집에 올 때 잠깐 마음이 든든하다가 또 금방 쓸쓸해져. 그러면 집에서 밥을 비벼 먹어. 남는 게 뭐야? 내가 헤어지자고 꺼지라고 욕을 해도 안 가는 ‘살’이 남아. 든든하고 아름다운 내 살들. 귀여운 살들.

자기 전에 살들이랑 사이좋게 누워서 뭐하겠어. 페북하겠지. 핸드폰 놓쳐서 코에 떨어뜨리지는 말고. 코 나간다고. 그럼 페북 하면서 뭐해? 조선일보 속보 봐? 위키트리 봐? 미스핏츠 봐?(그건 좋아) 뭐하겠어. 검색하지. 검색창에 이렇게 쳐. 나랑 헤어진 ‘김개tothe샊…’ 그러면 그리운 그 얼굴이 나와. 얼씨구. 프로필 사진을 바꿨네? 환하게 웃어? 절씨구? 나랑 올린 사진 다 지웠네? 최근 게시물이 애들이랑 술 먹은 단체사진이야? 죽여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걔 옆에 누가 있어. 머리가 길어. 얼굴이 불그죽죽한데 입술도 불그죽죽해. 이런 게 술 좀 먹고 내 구남친 옆에 붙어있네? 마음에 쓰나미가- 파도가~ 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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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흡

알아. 아는데 하지마 그거. 어. 그거 하지마. 어허! 하지 말라니까…….에헤이……. 결국 넌 그 여자애를 찾아내. 그리고 걔 페북을 뒤져. 구남친과 주고받은 댓글들을 봐. 의미심장한 게 있는지 봐. 오빠 우리 나중에 또 밥 먹어요~^^ 이런 게 있으면 이제 화가 치밀지. (부들부들…) 사진을 뒤져보면서 ‘별로 이쁘지도 않은데’ 라고 생각하다가 ‘아니야 이쁜가….’라고 생각하고 너의 마음은 번민의 구렁텅이에 스트롸이크! 잘 들어갔쒀! 그럴 줄 알았어!

왜 그래. 그러지마. 괜히 그 여자애랑 사귀는 거 아닌가 맘 졸이지마. 사귀는 거 알면 맘만 더 아프지. 욕할 거리 늘어서 입도 더 아프지. 걔랑 마주칠까봐 이쁜 옷 입고 나가지도 마. 거울 더 보지도 말고. 그래서 뭐해. 예쁘게 하고 마주치면 뭐해. 걔한테 네가 최고로 예뻤던 때는 이미 지났어. 네가 웃기만 해도 걔도 웃던 날은 이미 지났어. 다 지나갔어. 안녕. 사요나라.

너 많이 울었었잖아, 다시 생각해

그녀의 웃는 모습은

활짝 핀 목련꽃 같아

그녀만 바라보면 언제나 따뜻한 봄날이었지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난 너무 깜짝 놀랐네

그녀의 고운 얼굴 가득히 눈물로 얼룩이 졌네

아무리 힘들어도 웃던 그녀가 처음으로 눈물 흘리던 날

온 세상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 내 가슴 답답했는데

이젠 더 볼 수가 없네

그녀의 웃는 모습을

그녀가 처음으로 울던 날

내 곁을 떠나갔다네  – 김광석 노래 가사

너는 헤어질 때 울었어. 무지 울었다고. 왜 울었을까. 자꾸 잊지? 그래도 다시 생각해봐. 기억 나. 안 날리 없어. 네가 뭔가 밤늦게 전화에 대고 말하다가 꺼이꺼이 울었던 기억이 있을 거야. 그 때 그 밤을 잘 복기해봐. 너는 너무 많은 걸 기대했고 그 사람은 그걸 채워줄 수 있을 만큼 많은 걸 갖고 있지 않았어. 지금 돌아가도 그 사람이 더 넉넉해지진 못했을 거야. 넌 어때? 넌 그 사람의 부족함을 안아줄 만큼 넉넉해졌어? 그럴 거라면 ‘결심’ 말고 진짜 그럴 수 있는 ‘넉넉함’이 너에게 있어? 아냐. 없어. 못해.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퐁퐁 솟아도 다시 한 번 앉아서 생각해. 상처에 다시 칼집을 내는 건 너무 아파.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

아름다운 이별은 없어. 드럽게 아프고 드럽게 찌질해. 그것도 아니면 목 마른데 사탕수수 씹는 것처럼 뭔 맛이 찌름찌름 날랑말랑 하는 그런 싱거운 게 돼버린다고. 이게 뭐가 아름다워? 만남이 아름답지, 이별은 아름답지 않아. 후회로 쳐바른 담이 좋은 추억을 다 가리거나 그냥 사라진 기억이 돼. 자기가 제일 못생길 때 어떻게 생겼나, 자기가 제일 안 멋있을 때 어떤 행동을 하나 그런 걸 깨닫는다고. 바닥을 탁-치는 경험. 근데 가끔 가을마다 바닥이 탁- 꺼져. 수렁이 또 와. 그런 게 이별이니까, 답은 뭐야? 만남이지. 아름다운 만남. 크으. 노사연 언니. 그게 답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