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부모님은

형과 내게 꿈을 물어 보셨다. 형은 소신있게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던 난 형의 조수가 되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부모님은 실망하셨다. 그런 것 말고 판사나 변호사는 어떠냐는 물음에 아는 게 있나, 까짓 거 되겠다고 했다. 그 이후 우리 반 뒤편 게시판의 한 쪽엔 감투-왜 감투를 씌웠을까, 위인전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를 쓰고 초딩들을 근엄하게 내려다보는 ‘나의 꿈은 변호사’ 그림이 걸려있었다.

15년쯤 흘렀다. 그는 서초동 어딘가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

2002년의 영광이 떠오른다 아아…

지난 봄, 학교를 다니던 중

이런저런 일이 겹쳐 휴학을 했다. 그리곤, 이대로 인생이 망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뭔가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떠오르는 건 없다. 잠이 보약이란 옛 말씀을 떠올라 보약을 열심히 섭취했지만, 이 역시 몸이 일정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서 이런저런 책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하릴없이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어느 밤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할 거 없으면 알바나 하지 않겠느냐고 그는 물어왔다. 알바 좋지. 어디냐는 물음에 변호사 사무실이란 답이 왔다. 뭔가 어마어마해 보이는 그 이름에 쫄아버린 나머지 안 하겠다고 말을 던졌지만, 몇 번의 대화 끝에 일단 연락을 드려보겠다고 답을 했다. 홍대 인근의 한 게스트하우스에 보내 놓은 이력서에는 답이 오지 않고 있었다.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장소는 서초역이란다. 음, 너무 멀다. 시급은 자기도 모르니 가서 얘기를 해 보는게 좋겠다고 했다. 허 이거 불안하다. 어떤 분인지를 물었으나 정말 좋은 분이라고 한다. 나도 한 다리 건너서 들어 잘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더욱 불안해진다. 마지막으로 머리가 빡빡인데 상관없는지를 물었다. 불교 신자니 좋아하실지도 모른다니, 오호 그렇단 말이지.

곧 찾아뵙겠습니다, 변호사님 (클클클)

다음 주 월요일,

연락을 드리고 찾아간 변호사 사무실에는 직원 한 분과 변호사님이 계셨다. 생각보다 굉장히 젊으셨다. 또다시 간단한 면접을 거쳤다. 혹시 로스쿨을 준비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사실 법조계에 별 관심은 없다고 말씀을 드렸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뭘 잘못 말했나. 눈알이 팽팽 돌아갔다.

한참을 웃던 변호사님은 시급은 얼마 정도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학생들의 생각을 알고 싶다며 원하는 시급을 말해보란다. 얼마 정도가 좋을까, 알바천국 보니까 사무보조 업무는 보통 최저임금 주던데. 조심스레 한국장학재단의 근로장학생을 예시로 들며 8000원을 질렀다. 변호사님은 허허 웃으며 그럼 학생이니 시급은 만원으로 하자고 하셨다.

할렐루-야!

이번엔 뇌가 팽팽 돌아갔다. 만원이라니, 사법고시 준비해야겠다. 와 이럼 주급이 얼마야. 친구야 고맙다 덕분에 윤택하게 살겠다. 당혹스러워하는 내게 변호사님은 만원 괜찮냐고 재차 물어왔다. 절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그 날 직원분께 한 시간 가량 인계를 받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을 했다. 생각보다 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수임한 사건에서 변동사항이 없는지 확인 하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일. 하지만 ‘법’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눌려서인지 무지막지하게 긴장이 됐다. 변호사님은 시간이 많이 남을테니 책이라도 들고 와서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긴장 좀 풀리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일을 그만 둘 때까지 공부를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변호사님은 식물을 몹시 좋아하셨다.

처음엔 그렇게 많지 않던 화분이 주말을 쉬고 돌아오면 두 세 개씩 늘어나고 있었다. 사무실은 점차 정글처럼 변해갔지만 변호사님은 몹시 흡족해했다.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날이 아니면 30분가량 식물토크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친구는 잠깐 시들었다 폭풍성장을 거듭해 사무실의 에이스로 거듭났다. 자취방에서 키우기 좋은 친구들도 여럿 추천 받았다.

하루는 왜 그렇게 식물을 좋아하시느냐고 물어봤다. 갑자기 낯빛이 쓸쓸해지며 변호사 일을 하다 보니 마음이 거칠어진다고, 식물을 보면 평온하다고 말씀을 하셨다. 아아, 그랬구나. 나 같은 알바생은 짐작도 못할 만큼 많은 심적 부담이 있으시겠지. 반성이 됐다. 그 날은 좀 더 정성스레 분무기로 잎에 물을 뿌려줬다.

며칠 후 변호사님은 식물용 조명이라며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전등을 교체하셨다. 정육점을 방불케하는 그 빛깔을 보니 아, 그냥 식물 덕후시구나 싶었다.

이토록 애매모호한 빛깔이라니?

법원 가서 서류 좀 제출해오라는 말을 들었을 땐 심장이 폭발하려 했다. 저같이 무지몽매한놈이 그런 신성한 곳에 들어가도 될까요. 뉴스에서 보던 거대한 법원 건물 앞에 서니 갑자기 내가 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힘차게 들어가고 보니 길을 몰랐다. 그래 알 리가 없지. 난 무지몽매한 놈인걸.

주 업무는 전화 받기와 복사였다. 법원 기록을 복사할 때가 많았기에 법원에 출입할 일 또한 잦았다. 묘하게도 남부지방법원은 서부지방법원보다도 훨씬 서쪽에 있었고 북부지방법원은 이름에 걸맞게 압도적인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정상적인 위치라고 느껴진 곳은 동부지방법원 정도. 북부지법은 정말 너무나도 너무한 북쪽에 있었다. 1시에 북부로 출발해 복사를 하고 돌아오면 퇴근시간이 돼 있었다. 나야 좋지만 뭐.

법원과 검찰청은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모르는 것을 물어볼 때, 법원 직원이 ‘예 그건 이렇게 하는 거에요. 다음부턴 잘 준비해서 와주세요.’라는 느낌이라면, 검찰의 직원은 ‘어휴 그것도 모르는데 여긴 왜 왔냐.’같은 느낌이려나. 물론 일반화긴 하지만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대응이 비슷했다.

아아 사진만 봐도 위엄이 터져나온다…

1개월 정도가 흘렀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니 이만한 꿀 알바는 내 인생에서 다시 찾아오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없는 날은 정말 하는 게 없었다. 아침에 변동사항이 없는지 대략 훑어보면 1시간 정도가 간다. 그 때부터 하릴없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점심시간이 됐고, 밥을 먹고 와서 또다시 하염없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면 퇴근시간이 됐다. 이렇게 일하고 하루에 팔만원씩 벌다니.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퇴근길엔 매일매일 미소가 지어졌다.

삼십만 알바인들이 분노할 수도 있겠지만,

일은 일인지라 솔직히 출근하기는 싫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그렇지만 하루 종일 하는 말이라곤 전화응대와 하루 삼십분 정도의 식물토크 말고는 없었던 점이 컸던 것 같다. 그렇기에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 정신을 차렸을 때 츠기노 데세끼와 사당 사당 이끼데스 같은 소리가 들리면 문득 절망을 하고 만다. 내리실 문이 왼쪽이고 오른쪽이고 나발이고 간에 오늘도 난 출근을 하는구나. 사무실이 다가오고 있구나.

출근하기시러으아으아으이응

복학할 때가 되어 알바를 그만두게 됐다. 평소 눈이 침침하다던 변호사님께 비타민제를 선물로 드렸다. 약국에서 눈에 기가 막힌 놈으로 하나 달라고 했는데, 아직 변호사님의 후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내 뒷자리에는 처음에 나를 추천해줬던 친구가 들어갔다. 요즘은 어마어마하게 바빠졌다고 한다.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