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장으로 옮겨진 브로마이드

이사를 하고 짐을 정리하다 의도치 않게 창가 옆에 신발장을 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생각지 못했으나 신발이 햇빛을 바로 맞으면 색이 바랄 것 같다는 걸 깨닫고 나는 집에서 햇빛 가리개를 만들 만한 재료를 찾았다. 그때 생각난 게 모 그룹의 브로마이드였다. 총 세 세트였나, 술을 몇 병 마실 때마다 한 세트를 받을 수 있었던 그것. 주류 광고라 성인 멤버들만 찍은 광고였다. 나의 최애멤버는 미성년자였지만 서바이벌을 통해 전부 다 정이 들어 당시 나는 거의 올팬1)편집자 주: 멤버들 전부를 좋아하는 팬이었고 그렇게 술집에서 친구들과 목표치를 달성하듯 술을 마시고 덕심에 가득 차 브로마이드를 얻어왔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그들은 해체를 했고, 그때 나는 이미 손절한지 오래였다(최애는 여전히 덕질중이지만). 딱히 이유는 없었고 다만 서서히 식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제 하이트 엑스트라 콜드 브로마이드들은 반으로 꾹꾹 접히어 내 신발장의 뒤와 옆으로 가 붙었다. 언제나, 어떤 감정에나 끝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직접 마주하는 그 순간은 매번 참 묘하니 적응하기 힘들다. 나는 여전히 그때의 술자리를 기억하고 잔뜩 취해 신나게 브로마이드를 받았던 순간도 기억하지만 남아있는 건 다만 기억뿐이다. 그때 함께 했던 감정은 전부 사라졌다. 이제 나는 다만 망설임 없이 그들의 브로마이드를 접어 신발장에 덧대는 사람이 되었다. 그들의 의미는 내게서 그렇게 사라졌다.

탈덕이 활짝!

감정에 끝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알고 있었어도 마주할 때마다 씁쓸할 뿐이다. 물론 끝없이 계속 이어지는 감정도 분명히 있다. 늘 새롭고 아름다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명확한 축복이다. 다만 오늘은 한때 전부였던 것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공허함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불타던 감정에도 끝이 오는구나

그를 처음 알았던 게 열일곱이었다. 4년 반 정도 지속했던 덕질의 끝자락이었다. 처음 해본 덕질은 강렬하고 치기 가득하여 많은 일로 내게 상처를 입혔다. 모든 게 처음이었던 어린 마음은 뭐든 남보다 많이 알고 사랑을 티내는 게 내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보다 내가 더 사랑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서 남의 마음을 쉽게 무시했고 그걸 싫어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런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지며 콧대만 높아졌을 뿐.

인터넷으로 현장에 다니는 친구들 언니들을 사귀었고 쓸모없는 사생활 이야기들을 많이 주워들었다. 대부분 믿을만한 인증 없는 썰이었고 자극적이었다(지금 보니 맞는 것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때 무조건 많이 아는 것에 대해 집착했고 모든 이야기들을 믿었다. 어린 내게 충격적인 이야기들도 많았고 누가 봐도 지어낸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땐 걸러듣는 법을 알지 못했다. 속으로는 충격을 받으면서도 겉으론 센 척을 했다. ‘아ㅋ 알지알지ㅋ.’ 그러다보니 애정보다 점점 미움이 커졌다.

내가 구축한 그들에 대한 이미지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인간적인 모습을 알수록 내가 생각하는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그런 것들을 보는 나의 마음 역시 항상 괴롭기만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이들을 좋아하는 데 행복함보다 괴로움이 더 크다고, 이걸 계속할 이유가 없다고. 열일곱에 무언가를 놓는 법을 알았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다. 누가 알려준 적도 없었지만 정말 명확하게 내 덕질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고 그만뒀다.

gvsc

편안했다. 거기엔 물론 그 당시 새롭게 알게 된 장르의 영향도 있었다. 탈덕하기 일 년 전 쯤 친구 덕에 처음으로 락을 접했고 아이돌을 파다가 본 락스타는 비록 그만큼 정제되지는 않았어도 솔직했다. (당시의 시선으로) 여러 가지 모순으로 가득 찬 아이돌은 스스로 솔직한 마음으로 좋아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몇 달 후 결국 나는 탈덕을 했다. 그때 기막힌 타이밍으로 읽었던 팬픽이 있다. 나는 열심히-지금도-RPS2)Real Person Slash의 줄임말. 실존하는 인물(주로 아이돌과 같은 연예인)을 엮어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를 하고 있었으므로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은 탈덕 문턱에 있어도 읽었다.

명확히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었다. 그 팬픽의 결말은 ‘감정에도 끝이 있다’는 것이었다. 거하게 충격적이었다. 보통의 팬픽들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죽도록 사랑하면서 끝나는 가운데 감정에 끝이 있다는 결말이라니. 둘은 복잡한 일을 겪은 후, 상황적으로 둘을 갈라놓는 것이 없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결국 그 사이 겪은 변화로 인해 감정적으로 끝을 맞는다. 아마 나의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감정의 끝을 생각하고 있던 중 읽은 감정의 끝에 관한 이야기. 그래서 더 잘 정리했을 수도 있다.

그때의 감정이 오랜 시간 후에도 생생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으로 불타올라 좋아하던, 영원할거라고 떵떵대던 감정에 스스로 끝을 내렸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어쩌면 이 이유가 더 클지도. 그 선택에 후회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끝을 낸 후 몇 달이 흘러 그 그룹에 엄청나게 큰 일이 터졌다. 다들 충격의 도가니 속에서도 나는 평온했다. 나는 이미 재미있게 다른 덕질을 하는 중이었다. 참으로 신의 한수였다고 생각한다. 그 후에도 덕질에 끝이 있던 경험은 많았다. 하지만 처음만큼 강렬하게 기억나는 것은 역시 없다. 처음의 기억이 더 강렬한 이유는 감정이 서서히 사라져버린 게 아니라 어느 날 한 번에 훅 놨기 때문일 것이다.

덕질도 어쨌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이라는 걸

메마른 감정도 없을 정도로 자연스레 날아가 버리는 끝은 크게 기억에 남지 않는다. 다만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는 않는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것은 덕질 뿐 아니라 삶의 모든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어떻게 인간이 감정의 끝에 익숙하겠는가. 그러고 싶은 사람은 다만 노력할 뿐이겠지. 뭐든 끝을 내면 질질 끌지 않고 깨끗하려 한다. 쓸데없이 미련이 남으면 한 번에 떠나지 못하고 질질 끌다가 추한 꼴까지 보이게 될 수도 있다. 트위터에 존재하는 수많은 탈덕 알계들이 그 증거다.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답지 못한 끝. 뭐 별로 아름답게 끝낼 생각이 없기에 남들에게도 안 좋은 기억을 남기기 위한 짓을 하는 거겠지만. 나는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덕질도 어쨌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인데, 아름답지는 못할지라도 더럽게 남겨놓지는 말자.

트위터에서 검색되는 탈덕계정들 – 편집자 주

열일곱 살 때 처음으로 마주했던 감정의 끝과 그 충격은 십년이 더 지난 지금도 딱히 옅어지지 않았다. 참으로 흥미로우며 쓸쓸한 것. 그러면서도, 그걸 다 알면서도 현재 진행 중인 덕질에는 여전히 진심을 쏟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끝이 있다고 시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도 의미가 없어진다. 인생에서 나의 전부 같았던 건 끊임없이 변한다. 그것뿐인 줄 알았는데 그게 끝나도 삶은 지속된다. 그 덕질이 정말 끝일 줄 알았는데 새로운 덕질이 찾아온다. 삶의 모든 부분이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지금 사랑하는 것들에 진심을 쏟는다. 비록 그 브로마이드들이 나중에 내 신발장으로 가게 되더라도 오늘은. 일상에서 시작하여 과거의 기억까지 짚어보게 된 일이었다. 아마 나중에 또 다른 끝을 맞게 되더라도 여전히 이 일을 떠올릴 것이다. 언제가 되었든 후회가 남는 덕질은 하지 말아야지. 끝을 생각하며 덕질에 있어서의 마음가짐을 다시 새긴다. 그렇게 나의 현재, 지금의 덕질이 더 풍요로울 수 있길.

글/ 박예은

편집 및 교정/ 이점

그동안 박예은의 <케이팝 덕후의 회고록>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 ]

1. 편집자 주: 멤버들 전부를 좋아하는 팬
2. Real Person Slash의 줄임말. 실존하는 인물(주로 아이돌과 같은 연예인)을 엮어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