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세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연희관015B>에 실린 글입니다.

“서울 지하철 4호선은 이주노동자의 ‘서울’ 안산과 이슬람교 서울 중앙성원이 있는 이태원을 잇는다.
안산에서 쭉 올라오다 삼각지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고 두 정거장 지나면 이태원에 이른다.
가끔은 시험에 드는 순간이 닥친다.
어느 주말 오후 한산한 지하철, 4호선 사당역쯤에서 지하철을 타면 적잖은 이주민들이 앉아 있다.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과 한국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의 옆자리가 동시에 비었다.
아니, 한두 자리가 비었다면 그건 이주민 옆자리일 가능성이 크다.
자, 어디에 앉을까? ‘저는 차별하지 않아요’ 몸으로 말하듯 이주민 옆자리에 앉는다.
되도록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쓴다.
한참이 지나면, 깨닫는다. 다르긴 다르다. 냄새가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1)신윤동욱, 「당신의 눈이 냄새 맡는다」, 『한겨레21』. 2013.08.13.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171.html (2018년 8월 23일 검색.)

이 불편함, 너무 익숙하다. 그것을 자각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려는 마음까지도. 지하철을 이용할 때 비슷한 경험을 종종 겪는데도, 이 불편함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머리로는 그들도 우리와 다를 것 없는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그들을 만난 순간 나의 알량한 관용은 시험대에 오른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이 사회에서 누구와 함께 살 것인지를 선택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들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선 무엇이 공존을 가로막고 있는지부터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 안의 심리적 장벽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한 사회 안에서 특정한 집단이 특별한 이유 없이, 꺼림칙하고 두려운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혐오스럽게’ 만들어지는 몸, 그중에서도 특히 냄새가 난다는 편견의 대상이 되는 몸에 대해 살펴보고, 혐오가 아닌 공존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 볼 것이다.

정상인 몸, 라벨이 붙은 몸

우리와 ‘다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꺼림칙한 감정은 어디에서 올까?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편견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제각기 다르다. 단일 민족 신화가 뿌리 깊은 한국 사회에서 자라났다고 해서 모두가 이주민을 혐오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혐오를 정교하게 포착해내기란 어렵다. 분명한 건 어떤 몸은 다른 몸보다 더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몸을 나타내는 단어들과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 피부색이 다른 몸. (흑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온 이주노동자)
  • 냄새가 나는 몸.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
  • 장애가 있는 몸. (휠체어를 탄 사람, 지팡이를 든 시각장애인)

이것 외에도 더 있겠지만, ‘비정상’인 몸의 대표적인 유형은 이 정도 아닐까. 각각의 유형에 대응하는 이미지는 정형화되어 있다. 세상의 수많은 몸들이 고작 몇 개로 정의될 수 있을까? 장애가 있는 사람을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만 상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분류의 단순함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분류의 불평등이다.

피부색이 다른 몸, 냄새가 나는 몸, 장애가 있는 몸이 선명한 이미지를 가진 것에 비해, 그 반대항은 그렇지 않다. ‘보통’의 피부색에, 냄새가 나지 않고, 장애가 없는 몸은 특징 없는 ‘그냥’ 몸이다. 특이한 몸들은 동물 보감에 수록된 동물들처럼 분류되고 설명되고 이름이 표시된 라벨이 붙는다. 반면 보통의 몸들은 안전한 위치에서 그 작업을 지켜보는 위치에 있다.

라벨이 붙는 대상은 언제나 소수자의 몸이다. 그런데 이 라벨은 대상의 삶 전체를 오직 그 소수자성으로 환원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비장애인의 몸에서 ‘비장애’라는 정체성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성별, 인종, 국적, 계급 등과 달리, 장애가 없다는 사실은 하나의 정체성조차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2) 자기소개를 할 때 비장애인 중 자신을 ‘비장애인’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도 ‘장애’는 몸을 구성하는 하나의 정체성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수자에게 있어 ‘소수자성’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삶 전체를 대표하는 특징으로 만들어진다. 자신이 고용한 이주노동자에게 이름이나 직책이 아니라 “야, 다문화!”라고 부르는 한국인 사장의 모습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2009년, 보노짓 후세인 교수이 겪은 인종차별 사건 관련 기사

2009년, 보노짓 후세인 교수이 겪은 인종차별 사건 관련 기사

주목해야 할 것은 ‘냄새가 난다’라는 라벨이다. 사람들은 냄새에 대한 혐오가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냄새가 난다는 혐오표현은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 인디밴드의 뮤지션이 동료 여성 뮤지션들을 비하하며 내뱉은 “자궁 냄새”라는 표현은 아직까지도 귀를 의심하게 한다. 한편 2009년에 보노짓 후세인 성공회대 교수가 버스 안에서 한 한국인 회사원으로부터 “너 어디서 왔어. 이 냄새 나는 ××야”라는 발언을 들은 것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앞으로 다루겠지만, 홈리스들이 냄새나고 더럽다는 혐오 역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그런데 냄새가 나는 사람들 모두가 ‘냄새나는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운동을 좋아하는 남고생들은 어떨까? 쉬는 시간만 되면 운동장에 나가서 공놀이를 하고, 옷을 갈아입기보다는 땀을 말리고, 잘 씻지 않는 부류 말이다. 강력한 체취를 풍기는 이들은 왜 냄새가 나는 집단으로 규정되지 않을까? 체취 말고도 그들이 가진 특징이 많기 때문이다. 풋풋한 젊음, 학업에 열중하는 시기, 사춘기, 2차 성징 등등. 그러나 홈리스나 이주노동자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은 오직 몇 가지 특징, 예컨대 냄새가 난다는 특징으로만 환원된다. 소수자의 몸에 붙은 라벨은 오직 그 특징만을 강조하며 그들에 대한 배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

냄새는 어떻게 배제의 수단이 될까?

그렇다면 ‘냄새나는 몸’이라는 규정이 갖는 효과는 무엇일까? 직접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혐오로 인한 배제는 언뜻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나 홈리스에 대한 배제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눈앞의 현실인 폭력을, 누군가는 자신의 안전한 위치로 인해 인지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작년 5월 <서울로 7017>의 개장 당시 벌어진 사건은 누구나 이용하는 공공장소가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공간임을 보여준다. 당시 서울시가 <서울로 7017>의 관리를 위해 제정한 조례(공원 이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안)는 서울로에서 금지되는 행위 혹은 사람을 밝히고 있다. ‘눕는 행위, 노숙행위 및 구걸행위 등 통행에 방해가 되는 행위’(제13조 1항 3호), ‘심한 소음 또는 악취가 나게 하는 등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행위’(제13조 1항 6호)를 제한한다는 조항이다.3) 홈리스 운동단체를 포함한 시민단체들의 반발로 서울시는 노숙행위 제한 조항(1항 3호)은 삭제했지만, 소음과 악취 등을 제한하는 조항(1항 6호)은 여전히 남아 있다. (홈리스 인권팀, 「[2017 홈리스 추모제 특별판] 당신이 앉을 수 있는 곳, 우리도 앉을 수 있다」, 『민중언론 참세상』, 2018.04.16.) 이에 따르면 노숙과 구걸, 악취는 공공장소에서 허용될 수 없는 행위인데, 이 행위들은 결국 ‘홈리스(노숙인)’라는 집단을 상정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행위들이 언제나 규제되는 것은 아니며, 누가 그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4) 홈리스들이 공공장소에서의 추방, 이유 없는 불심검문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과 달리, 예컨대 서울역 계단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외국인 관광객은 눈총을 받지 않는다. 또한, 경찰로부터의 불심검문 역시 서울역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대단히 불쾌한 경험일 것이다. 냄새에 대한 혐오의 대상이 취사선택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조례에서 주목할 부분은 ‘악취’를 명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당 조항은 ‘홈리스는 냄새로 혐오감을 주기 때문에, 공공장소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냄새는 공공장소에의 접근과 이용이라는 기본권을 박탈하는 근거가 된다. 냄새가 정치적 배제의 근거가 되고, 더욱이 이것이 법조문에 명시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온라인 혐오표현이 주로 일어나는 장소인 공론장 역시 공공장소의 하나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에 따르면 온라인 공간에서 주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집단은 여성, 성적 소수자, 장애인, 이주민이다. 이들에게 질문한 결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혐오표현을 경험한 비율은 성적소수자가 94.6%, 장애인이 79.5%, 이주민이 42.1%, 앞의 정체성에 해당하지 않는 여성이 83.7%로 나타났다.5)이주민의 경우 혐오표현을 경험한 비율이 낮은 것은, 컴퓨터를 이용하는 능력과 시간의 차이, 한국어로 된 혐오표현의 이해도 등을 고려해야 한다. 조사대상에서는 빠져있으나, 홈리스 등 빈곤층의 경우도 온라인 이용시간 및 능력의 면에서는 유사한 조건에 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 2016년 12월, p.98.) 집단에 따라 경험하는 혐오의 내용은 각기 다르다. 그중 이주노동자나 난민같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열등한 처지에 놓이고, 그래서 빈곤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더럽고’ ‘냄새가 나서’ 피하고 싶다는 편견이다.6) 국가인권위원회,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 2016년 12월,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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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은 자존감의 하락과 스트레스나 우울증 같은 정신적 어려움을 주는 것과 함께, 온라인 공간 참여를 위축시킨다.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혐오표현 경험 이후 온라인에서의 활동 범위가 좁아지고, 온라인 공간에 글을 쓰는 등의 의사 표현에 제약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7) 국가인권위원회,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 2016년 12월, p.114. 결국, 혐오표현은 공론장 참여를 어렵게 만들어 사회적 소수자의 말할 권리를 빼앗고, 그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킨다. 거기다 원래부터 컴퓨터 사용과 온라인 공간 접근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이주노동자나 홈리스들에게, 혐오표현으로 인한 배제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지하철역, 공항, 광장처럼 모두의 편의를 위한 공간,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함으로써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실현하는 공론장. 시장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공공 公共 장소는 몇 남지 않은 ‘모두’를 위한 공간이다. 여기서조차 배제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빈곤은 냄새를 만들어낸다

냄새가 난다는 혐오발언은 여성, 외국인, 홈리스 등 다양한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그러나 똑같이 냄새가 난다는 말이어도, 그 속내는 다르지 않을까? 예컨대 ‘자궁 냄새’라는 여혐발언과, ‘불쾌한 냄새’라는 이주노동자 혐오발언은 분명 다르다. 전자의 발언은 어떤 근거도 없는 그야말로 뇌내망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후자의 경우, 최소한 과거에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한 혐오발언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전자보다 후자를 옹호하거나, 혐오발언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가 단순한 편견이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더 복잡한 사회경제적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같은 이주민 혐오발언끼리도 다를 때가 있다. 국적이 같은 이주민이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노짓 후세인 교수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온 마하트마 간디 씨가 있다고 하자. 간디 씨는 한국인 주인이 운영하는 버섯 농장에 고용되어 일한다. 두 사람은 국적과 피부색을 이유로 같은 차별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후세인 씨와 간디 씨의 사회적 지위는 분명 다르다. 둘 다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지만, 한 명은 ‘대학교수’이고 한 명은 ‘이주노동자’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둘이 경험하는 혐오 역시 결을 달리 한다. 서로 다른 혐오를 함께 비판할 때, 그런 차이는 가려진다. 이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빈곤이 ‘실제로’ 냄새나는 몸을 만들어내는 맥락이다.

빈곤한 사람들은 냄새가 난다는 것은 편견이다. 하지만 이 냄새가 단순히 편견의 탓만은 아니다. 빈곤은 경제적 어려움과 더불어 부적절한 주거환경, 위생에 신경 쓰기 어려운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실제로 냄새를 만들어 낸다. 그러한 현실과 사회적 편견이 맞물려 극단적인 배제를 낳은 경우가 홈리스들이 서울로에서 경험한 공공장소에서의 배제일 것이다. 이주노동자와 쪽방촌 주민의 사례는 빈곤과 냄새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비닐하우스, 스티로폼 박스, 컨테이너 박스. 이것들은 물건을 쌓아두는 공간이지, 사람을 위한 집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이주노동자들이다.

“샤워할 곳이 너무 부족해서 일이 끝나고 와서 땀이 범벅인데도 씻기 위해서는 한참 기다려야 해요.
아침 일찍 출근할 때도 많이 기다려야 하구요.
겨울에 사람은 많은데 온수가 너무 적게 나와서 고생을 많이 해요.
겨울에 난방이 안 돼 얼어 죽을 뻔 했어요.
4~5명이 한 방을 쓰는데 조그만 히터 하나 밖에 없어서 겨울에는 다들 히터 주위에 붙어 있어요.”
8)임준형, 「이주노동자 기숙사 화재 사고 : 안전한 주거시설 보장하고 숙식비 징수 지침 철회하라」, 『노동자연대』, 2017.12.27. https://wspaper.org/article/19819 (2018년 8월 23일 검색.)

이 증언처럼, 이주노동자들의 주거환경 중에는 기본적인 조건조차 갖추지 못한 곳이 많다. 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농축산업 이주노동자의 70% 이상은 비닐하우스, 컨테이너, 패널 등으로 지어진 가건물에서 살고 있었다.9) 국가인권위원회,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2013년 10월, p.152. 건설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의 경우, 주거환경에 욕실 및 목욕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5.5%, 수세식 변기가 있지 않은 곳이 13.9%, 환기와 통풍을 할 수 있는 창문이 없는 곳이 6.9%를 차지한다.10) 국가인권위원회, 『건설업 종사 외국인근로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2015년 12월, p.99~100. 이런 환경에서 위생과 청결함을 충족시키는 것이 더 어렵지 않을까.

이주노동자와는 처지가 다르지만, 쪽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주거환경도 열악하다. 똑같은 더위에도 집에서 에어컨을 틀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선풍기조차 없는 좁은 공간에 갇힌 사람도 있다. 유난히 무더웠던 올여름, 쪽방의 여름은 더욱 가혹했다. 아래는 올해 여름 용산구 후암동의 쪽방촌에서 도시락 봉사에 참여한 봉사자가 남긴 기록이다.

“창문이 없는 건물은 들어가자마자 지린내가 진동했다.
환기가 전혀 되지 않았다. 메주를 삶은 듯한 냄새에 숨을 참았다. (…)
첫 번째 쪽방 문을 두드렸다.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방문이 열리자 마치 습식 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쪽방 안은 어두웠다. (…)
더위에 지쳐 보이는 한 남자가 초점 흐린 눈으로 간신히 도시락을 받아들었다.
이름을 세 번 연속 물어보니 그제야 말을 했다.
나뭇가지라고 해도 믿을 그의 앙상한 팔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방 안에는 선풍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쪽방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최소’의 삶이다. 사회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으로 정해놓은 돈인 기초생계비로, 몸 하나 들어갈 정도의 비좁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급에서 탈락해 그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 쪽방조차 들어가지 못해 거리에서 자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난한 삶은 ‘가난한 냄새’를 풍긴다. 50년이 넘은 건물에서 한 달 50만 원의 소득으로 사는 사람들이 “전혀 냄새가 안 난다면 이상한 일” 11)신윤동욱, 「당신의 눈이 냄새 맡는다」, 『한겨레21』. 2013.08.13.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171.html (2018년 8월 23일 검색.) 일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삶을 ‘선택’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난의 냄새를 ‘선택’한 이는 없다.

혐오가 아닌 공존을 위해

한낮의 더위에 갇힌 쪽방 주민들이 갈 곳은 많지 않다. 어느 동네에나 있고, 에어컨이 나오는 데다 앉아있을 의자가 있는 곳? 은행과 지하철이다. 주민들의 일과는 해가 내리쬐기 전에 집을 나와 은행이나 지하철에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12)전은지, 장현민, 「실내 온도 37.5℃… 쪽방의 여름은 가혹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07.29.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28219&path=201807 (2018년 8월 23일 검색.)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든다. 공공장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선풍기 없이 맨몸으로 폭염 경보를 받아낸 사람들의 몸은 어떻게 지각되었을까. 그들의 냄새와 조우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논점은 어떻게 그들을 혐오하지 않고 공존할 것인가의 문제로 돌아간다.

공존을 위해 무엇보다 해결해야 할 것은 혐오가 미치는 악영향이다. 하지만 혐오표현에 대처하기는 어렵다. 특히 혐오가 아닌 척, ‘팩트’의 가면을 쓸 때는 더욱 그렇다. “솔직히 노숙자들이 냄새가 지독한 건 ‘사실’이잖아?”와 같은 식이다. 혐오에 (어느 정도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이런 혐오표현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가장 큰 이유는 혐오표현이 이들의 주장만큼 솔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혐오표현의 목적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단지 자신이 남들보다 솔직한 사람인 척하면서, 홈리스에 대한 혐오를 쏟아내고 싶을 뿐이다. 지젝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은 ‘팩트’가 아닌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13)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옮김, 난장이, 2011, p.146. 이다.

‘팩트’ 행세를 하는 혐오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가면을 벗겨내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혐오표현은 어느 정도의 사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혐오표현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예컨대 이주노동자나 홈리스가 냄새가 난다는 것이 편견이라는 지적에 대해, 혐오표현은 그들이 다른 사람에 비해 냄새가 나는 것만큼은 사실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혐오표현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냄새가 난다는 편견에 맞서서, 그들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부풀려서는 안 되듯이, 있는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다. 냄새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냄새를 만들어내는 맥락 역시 조명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난의 냄새’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신에 가난의 냄새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한편, 혐오하지 말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자는 접근 역시 고민이 필요하다. 이 말이 너무 착하게만 들리기 때문은 아니다. (혐오표현을 내뱉는 사람들에게 이런 호소가 통할지 의심스럽기는 하다) 물론 다름이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현실에서는 차이가 곧 차별이다. ‘다른’ 몸이라는 말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60억 개의 몸 전부를 지칭하지 않는다. 혐오스러운 라벨이 붙은 몸만이 ‘정상과 다른’ 몸으로 규정된다. ‘다른’ 몸이 존재한다는 것은 라벨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한에서 다름은 차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몸을 나와 동등한 ‘다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당위와 다르게, 현실에서 ‘다름’은 동등하지 않다. 성별, 인종, 계급의 차이는 그저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주노동자와 홈리스가 놓인 빈곤한 상태를 ‘다름’이라는 말로 담아내기에는, 그들과 우리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크다. 그 차이가 인간다운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의 차이라면 말이다. “만약 우리가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신체장애인이나 불구자 대신 ‘다른 능력을 갖춘 differently abled’ 사람들이라 부르기로 하고선 이후 공공장소에다 진입 경사로를 설치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위선적으로 말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14) 움베르토 에코, 『가재걸음』, 김희정 옮김, 열린책들, 2012, p.61. 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은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혐오하기는 쉽지만, 혐오에 맞서 싸우기는 어렵다. 혐오의 역사는 혐오스러운 몸이 구성되어온 역사기 때문이다. 편견에 맞서려면 편견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그 편견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말해야 한다. 혐오의 대상이 어떻게 혐오스럽게 구성되는지, 그 과정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진정한 공존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글 화영

/편집 및 교정 이점

   [ + ]

1, 11. 신윤동욱, 「당신의 눈이 냄새 맡는다」, 『한겨레21』. 2013.08.13.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171.html (2018년 8월 23일 검색.)
2. 자기소개를 할 때 비장애인 중 자신을 ‘비장애인’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3. 홈리스 운동단체를 포함한 시민단체들의 반발로 서울시는 노숙행위 제한 조항(1항 3호)은 삭제했지만, 소음과 악취 등을 제한하는 조항(1항 6호)은 여전히 남아 있다. (홈리스 인권팀, 「[2017 홈리스 추모제 특별판] 당신이 앉을 수 있는 곳, 우리도 앉을 수 있다」, 『민중언론 참세상』, 2018.04.16.)
4. 홈리스들이 공공장소에서의 추방, 이유 없는 불심검문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과 달리, 예컨대 서울역 계단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외국인 관광객은 눈총을 받지 않는다. 또한, 경찰로부터의 불심검문 역시 서울역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대단히 불쾌한 경험일 것이다.
5. 이주민의 경우 혐오표현을 경험한 비율이 낮은 것은, 컴퓨터를 이용하는 능력과 시간의 차이, 한국어로 된 혐오표현의 이해도 등을 고려해야 한다. 조사대상에서는 빠져있으나, 홈리스 등 빈곤층의 경우도 온라인 이용시간 및 능력의 면에서는 유사한 조건에 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 2016년 12월, p.98.)
6. 국가인권위원회,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 2016년 12월, p.108.
7. 국가인권위원회,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 2016년 12월, p.114.
8. 임준형, 「이주노동자 기숙사 화재 사고 : 안전한 주거시설 보장하고 숙식비 징수 지침 철회하라」, 『노동자연대』, 2017.12.27. https://wspaper.org/article/19819 (2018년 8월 23일 검색.)
9. 국가인권위원회,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2013년 10월, p.152.
10. 국가인권위원회, 『건설업 종사 외국인근로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2015년 12월, p.99~100.
12. 전은지, 장현민, 「실내 온도 37.5℃… 쪽방의 여름은 가혹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07.29.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28219&path=201807 (2018년 8월 23일 검색.)
13.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옮김, 난장이, 2011, p.146.
14. 움베르토 에코, 『가재걸음』, 김희정 옮김, 열린책들, 2012, p.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