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세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연희관015B>에 실린 글입니다.

탈코르셋이 새로운 화두다. SNS에는 ‘#탈코르셋_인증’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긴 생머리를 싹둑 잘라버리거나 화장품을 깨부순 사진이 올라오고, 탈코르셋이라며 뷰티유튜버를 그만둔 유튜버도 나타났다. 그렇지만 탈코르셋은 최근 갑작스럽게 탄생한 용어는 아니다. 2015년에 생긴 사이트 메갈리아에서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인 기제들, 특히 여성들이 자신도 모르게 체화해 온 억압 기제들을 ‘코르셋’이라 칭했다. 이를테면 ‘명품을 멀리하고, 조신하며, 더치페이하는 개념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을 개념녀 틀에 끼워 맞추려 하는 것은 코르셋을 조이는 행위이고, 그에서 벗어나는 것은 코르셋을 벗는 것이다. 그리고 2018년 현재, 탈코르셋이 다시금 화두에 오르게 된 것은 코르셋 중에서도 특히, 외모와 관련된 코르셋을 깨닫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실천을 하자는 직접적인 행동주의가 제창되었기 때문이다.

탈코르셋 취지에 동감한다. 그동안 여성들은 얼마나 외모 강박에 시달려왔는가. 이 사회는 ‘여성의 가치는 미에 있으며 여성은 예뻐야 한다.’는 메시지를 모두에게 계속해서 주입한다. ‘아빠 곰은 뚱뚱해, 엄마 곰은 날씬해’라는 동요가 자연스럽게 불리고, ‘예쁜’ 여성은 추켜세우면서 ‘추한’ 여성은 웃음거리로 삼는 개그 프로그램이 매주 방영되고, 대중교통에는 다이어트와 성형을 부추기는 광고들이 널려있다. 여성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외모로 평가받는다. 이런 사회에서 나고 자란 여성들은 끊임없이 사회가 정한 미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의 외모를 검열하고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밥을 굶어서라도 살을 빼야 하고, 얼굴에 칼을 대서라도 예뻐져야 한다. 탈코르셋은 일견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처럼 보이는 꾸밈 행위들이 실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더는 억지로 하지 않겠다는 꾸밈 노동의 파업 선언이다. 즉, ‘여성은 사회가 정해놓은 방식대로 예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모두가 당연한 듯 머리를 기르고, 화장하는 사회에서 삭발을 하고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 유의미하다.

나는 세상을 호령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곤 한다.

이런, 그 전에 눈썹 좀 다듬고

아, 다리도 좀 면도하고

모공도 깨끗이,

얼굴색 좀 보정하고

그리고 가슴에 뽕도 좀 넣고

머리도 빗고…

시완 클라크 (Siwan Clark) – 겨드랑이의 노래 (The Armpit Song) 中

나의 탈코르셋 이야기

내가 처음으로 해 본 탈코르셋은 노브라였다.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가 있던 시절의 일로, 요즘의 탈코르셋 운동에 영향받아서 한 것은 아니었다. 와이어가 없는 브래지어를 해도 빨갛게 자국이 생기고 가렵던 초여름날,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브래지어를 벗어 던졌다. 그렇게 침대에서 쉬고 있는데 수업에 가야 할 시간이 되자, 브래지어를 다시 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짜증스러웠다. 그때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안 하면 어때?’ 한순간에 대담해졌지만, 막상 문밖으로 나서려니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느낌이랄까. 누군가 알아채고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밖을 나섰을 때 노브라는 나의 예상보다 훨씬 더 편했고 놀랍게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외국, 특히 타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지 않는 미국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였다면 몇 배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도 그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노브라를 하고 있고, 지금은 거리낌 없이 잘 다니고 있다.

나를 괴롭혔던 또 한 가지는 화장이었다. 중고등학생의 나는 ‘화장은 학생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훈육에 철저히 길든 인간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자 왠지 화장을 해야 할 것 같았고, 화장품과 화장법에 대해 찾아보고 화장품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화장하고 나면 화장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할 때도 있었지만, 화장하는 것도, 지우는 것도, 화장품을 고르는 것도, 화장법을 연구하는 것도, 화장이 잘 먹기 위해 평소에 관리하는 것도 내게는 다 귀찮았다. 수많은 브랜드 중에서 어떤 제품이 발색이 좋고 가격이 적당하고 지속력이 좋은지, 내가 보고 있는 정보가 바이럴 마케팅은 아닌지,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는데 솔직히 난 이게 그거 같고 그게 저거 같고, 웜톤쿨톤봄브라이트가을뮤트가 어쩌고저쩌고.

그럼에도 내가 화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화장하지 않은 얼굴은 어딘가 밋밋하고, 미완성이고, ‘예의’를 덜 갖췄고,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들 화장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화장이 기본이고 ‘화장을 해야만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을 때는 화장을 자주 하지 않았다. 꾸민 채로 학교에 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노메이크업은 물론이고 티셔츠에 청바지, 후드티에 레깅스 등의 편안한 차림으로 학교에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우리 학교에서는, 더 나아가 한국에서는 누가 봐도 열심히 꾸민, 이른바 ‘풀 세팅’을 한 여학생들을 아주 쉽게 마주칠 수 있다. 교환학생을 가서 한국에서 하던 대로 꾸몄더니 ‘너 한국인이지?’라는 말을 들었다는 일화는 흔한 이야기다. 화장하지 않았을 때 ‘너는 왜 그 꼬라지를 하고 다녀?’라고 누군가가 대놓고 물은 적은 없었지만(‘입술에 뭐라도 칠하지 그래’ 같은 간접적인 방식으로는 들어봤다), 모두가 화장한 공간 속에 있으면 빨리 그곳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그동안 화장을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결심했다. 하고 싶지 않은 날에는 억지로 화장을 하지 않기로 말이다. 이번 방학 동안 015b를 하면서 015b 친구들을 주기적으로 만났다. 나는 보통 회의 전날 밤을 새워서 글을 쓰거나 회의 직전까지 글을 쓰다 가기 때문에, 회의에 갈 때 꾸밀 시간적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별로 없다. 그동안 귀찮아도 화장을 하거나, 화장은 안 하더라도 렌즈는 꼭 끼고 갔는데, 마음 먹은 이후부터는 화장도 안 하고 안경을 쓴 채로 갔다. 이로비들은 ‘왜 오늘은 화장 안 했어?’라고 묻지 않고 평소와 똑같이 나를 반겨주었다. 나의 외모를 지적하지 않는 이로비들이 있어서 그 뒤로도 편안한 차림에 안경을 쓰고 회의에 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울긋불긋한 피부에 다크서클이 진 얼굴을 보면서 정말 이대로 밖에 나가도 될지 걱정하던 때도 있었지만, 노브라처럼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하고 나니 쉬웠다. 화장을 자주 할 때는 민얼굴이 화장한 얼굴과 비교되면서 못나게 느껴졌는데, 민얼굴을 보는 빈도가 늘어나면서 민얼굴에 꽤 익숙해졌다. 나를 억압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나니 좀 더 자유로워졌다.

화장은 안 하지만 치마는 입을 거야?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화장은 안 하지만 치마는 입을 거야’? 보통 탈코르셋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긴 머리, 화장, 치마, 렌즈, 브래지어, 다이어트, 하이힐, 제모 등을 ‘탈코’해야 할 것으로 꼽는다. 조금 전까지 탈코르셋이 나를 얼마나 자유롭게 해주는지 줄줄이 이야기해놓고 치마는 입겠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현재의 탈코르셋 운동 논의를 촉발한 것은 워마드, 래디컬, TERF1)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의 약자. 트렌스젠더 혹은 젠더퀴어를 배제하는 급진 페미니즘.(페미위키 “TERF” 참고) 등으로 불리는 부류다. 한국다양성연구소의 기고 글처럼, 이들은 정형화되어 있는 단일 조직으로 보기 어려우며, 하나의 균일한 집단이라기보다는 ‘공유되고 있는 생각’이라고 보아야 한다.2) 한국다양성연구소, 「”워마드는 페미니스트인가요?”라는 질문」, 『허핑턴포스트』, 2018.08.06.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b67feb6e4b0b15abaa4c46a (2018년 08월 30일 검색) 따라서 이하 전부 ‘래디컬’로 통칭한다. 탈코 주창자들에겐 나는 ‘쓰까3) ‘섞어’를 뜻하는 방언에서 유래된 말로, 래디컬이 보기에 ‘진정한’ 페미가 아니며 다른 것과 섞인 페미니스트들을 지칭하는 말. (페미위키 “쓰까페미” 참고) 이며, 진정한 페미가 아니고, 여성성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는 가부장제의 부역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탈코르셋의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래디컬이 주도하는 현재의 탈코르셋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래디컬의 방식은 탈코르셋에 정해진 답이 있으며, 그 답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들을 비난하고 다그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연예인 지망생 한서희는 거의 유일하게 대외적으로 워마드 지지 선언을 했던 인물이다. TERF 계열의 주장을 받들어 ‘(MTF) 트랜스젠더는 여성이 아니다’라는 글을 썼다가 트랜스젠더 하리수와 언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랬던 한서희가 지난 5월 ‘페미니즘과 관련된 발언, 활동을 잠정 중단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래디컬로부터 왜 꾸밈 노동을 계속하고 그것을 전시하냐는 비판에 지속적으로 시달렸기 때문이다. 래디컬 그 자체처럼 보였던 한서희조차 탈코르셋 문제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혜화 불법촬영 시위를 앞두고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한서희 외에도 저스툰에 <썅년의 미학>을 연재 중인 민서영 작가나, 화장 관련 콘텐츠를 주로 올리는 유명 SNS 계정 역시 래디컬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네가 하는 것은 코르셋을 조장하는 행위이며 반페미니즘적이니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래디컬이 탈코르셋 하지 않는 개인을 비난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들은 개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 가부장제의 지속에 기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생이_겪는_코르셋’이라는 해시태그가 돌았던 것도 같은 선상에 있다. 요즘의 10대들이 어린 나이부터 화장하고 다이어트에 시달리는 것은, 어른들이 탈코르셋 하지 않은 것의 결과라고 생각하여 그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래디컬은 스스로가 탈코르셋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직 코르셋을 벗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타인의 행동까지 교정하려고 한다. 래디컬이 탈코르셋 하지 않은 이들을 이르는 ‘가부장제의 부역자’와 같은 용어는 이같은 래디컬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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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트위터 이용자 @rusoranetuser가 게시한 사진

래디컬의 탈코르셋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

탈코르셋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 래디컬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현 래디컬의 방식은 개인의 실천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래디컬이 말하는 탈코르셋의 목적에는 두 가지가 혼재되어있다. 1) 그동안 여성이 원하지 않았는데 여성에게 강요되어온 꾸밈 노동을 그만두자. 2) 고정된 ‘여성성’ 이미지를 깨부수자.

탈코르셋의 취지로 1)에는 매우 동감한다. 이것이야말로 각자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했던 노브라나, 화장 안 하기 같은 것들 말이다. 특히 개개인을 옥죄어 온 코르셋이 무엇인지는 각자가 자신을 돌이켜 봄으로써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이야말로 개인의 성찰이 필수적이다. 누군가에게는 긴 머리가 아무 생각 없이 유지해 온 스타일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자다워’ 보이기 위해 귀찮아도 억지로 해왔던 스타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2)는 개인의 실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이 사회에는 여성이면 무릇 이래야 하고, 남성이면 무릇 이래야 한다는 젠더규범이 존재한다. 특히 외모와 관련하여 ‘여성’ 하면 떠오르는 고정적인 이미지는 분명 실재한다. 긴 머리, 치마, 하이힐, 메이크업,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등. 그런데 이 여성성 이미지를 깨부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여성들이 ‘여성적’인 것을 전부 버리는, 이른바 탈코르셋을 하는 것인가? 삭발한 여성의 존재는 분명 유의미하다. 그렇지만 긴 머리를 한 사람들에게 찾아가 ‘너 왜 긴 머리 해?’라며 다그치는 것이 정당화될 정도로, 모두가 억지로라도 짧은 머리를 하는 것이 여성성 이미지 부수기에 가장 효과적이며 적절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삭발이나 숏컷을 한 여성은 잘 보이지 않아도 길거리에서 바지를 입은 여성은 꽤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성=치마’라는 공식은 유효하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도 우리는 하반신이 삼각형으로 되어있는 표식을 보고 여자 화장실이라고 인식하지 않는가. 설사 개개인의 여성들이 모두 다 바지를 입고 다닌다고 할 지라도, 모두의 인식 차원에 존재하는 여성=치마라는 공식을 부수지 않는 이상 여성성 이미지는 계속 공고할 것이다.

또한 개인 차원에서의 탈코르셋의 실천은 그 자체로는 크게 힘을 갖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노메이크업을 실천한다 한들, 나를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에게 나는 ‘탈코르셋 실천자’보다는 오늘 하루 화장을 안 했거나, ‘화장도 안하는 찌질이’ 정도로 비칠 확률이 훨씬 더 높을 것이다. 삭발 정도면 모를까, 개인 차원에서 치마 안 입기, 하이힐 안 신기 등의 실천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여성성 이미지에 균열 내기에 아주 미미한 효과만을 가질 뿐이다. 심지어 노브라 같은 것은 아무리 실천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티도 안 날 확률이 높다. 탈코르셋이 운동으로서 전파력을 가지려면 반드시 담론으로 이어져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일상에서의 실천보다 집단의 가시화된 선언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불꽃페미액션에서 진행한 상의 탈의 시위가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4)지난 6월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은 페이스북코리아 사옥 앞에서 상의 탈의 시위를 진행했다. ‘내 몸은 음란물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슴을 드러내는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해당 사진을 음란물로 규정하고 페이스북이 불꽃페미액션의 계정을 정지시켰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항의 시위였다.

월경페스티벌에서 '불꽃페미액션'이 진행한 상의탈의퍼포먼스

월경페스티벌에서 ‘불꽃페미액션’이 진행한 상의탈의퍼포먼스  (사진 출처 – 불꽃페미액션)

이러한 맥락에서 #탈코르셋_인증 해시태그는 제법 유효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탈코르셋’이라는 개념을 화두에 올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각자의 실천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다른 이들에게 탈코르셋 실천을 무조건강요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타당하지도 않다. 이번 여름에 겨드랑이털 제모 안 하기를 실천해보려고 했었다. 제모야말로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로생각했기 때문이다. 반팔을 입을 때까지는 괜찮았지만, 민소매 옷을 입으면서 결국 털을 밀고 말았다. 만약 퀴어문화축제의 ‘천하제일겨털대회’ 같은 곳이었다면 당당하게 나의 겨드랑이털을 내보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것은 나의 문제라기보다, 나를 이상하게 볼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대해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그 구조를 개인이 거스르려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좀 더 주력해야 하는 것은 사회구조(예를 들면 탈코르셋 한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조롱하는 이들)를 바꾸려는 노력이지, 개인에게 왜 실천하지 않느냐며 다그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이유는 래디컬은 ‘여성적’인 것들을 고정불변한 것으로 여기고, 죄악시하며, 그것을 소거하는 방식만을 탈코르셋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화장, 치마, 긴 머리 등은 단지 하나의 기호에 불과하며 그것에 부여되는 의미나 상징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기호에 담긴 맥락과 의미는 변화한다. 예를 들어 핑크색은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남성의 색이었으며5) 김고연주, 『나의 첫 젠더수업』, 창비, 2017, p.15~21 현 탈코르셋 운동에서 반드시 포기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되는 미니스커트는 1960, 70년대만 해도 저항의 상징이었다. 또한 현 탈코르셋 운동은 기호에 부여된 이미지나 상징이 아닌 기호 자체를 공격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비판해야 할 것은 특정한 기호들을 여성적인 것으로 정해놓고, 그것을 열등하게 여기는 사회의 구조이지, 치마, 화장이라는 기호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여러 가지 기호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이건 ‘여자’ 것이니까 하지 말자”가 아니라, 성별이분법에 균열을 내고 그 경계를 흐리는 것이다.

마지막 이유가 있다. 탈코르셋에 대한 논의가 한창일 때, 탈코르셋을 둘러싼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는 ‘자기만족인가, 코르셋인가’였다. 래디컬의 탈코르셋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자주 ‘Girls Can do Anything’ 문구를 인용하면서 ‘화장을 하든 안 하든 괜찮아지도록 만드는 게 페미니즘 아니냐, 화장이 좋아서 하는 여성이 있을 수도 있는데 왜 그 사람들을 공격하냐’는 논지를 펼치곤 했다. 이에 탈코론자들은 ‘네가 원해서 한다고 한 것은 정말로 네가 원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전족하고 코르셋 하던 이들도 자기가 원해서 한다고 생각했다.’라며 반박하곤 했다.

인간은 당연히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분명 나의 가치관이나 사고, 취향 등은 상당 부분 사회의 영향을 받아 구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나의 ‘진정한’ 선택이고,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영향받아 구성되었는지를 구분하는 것은 가능한가? 나는 정말로 온전히 사회의 영향만으로 구성된 것일까? 이것을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유의미한가?

나는 문대고 어문계열학과 소속이다. 나는 수시 6개 전형에서 현역, 재수 모두 통틀어 지금의 과를 선택했고, 나는 지금의 학과를 내가 원해서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래디컬은 내게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너는 지금 ‘여자는 문과’라는 편견의 고착화에 기여하고 있는 거야!” 6)교육학과나 아동가족학과 등 교육, 돌봄과 관련된, 전통적으로 ‘여성의 분야’라고 여겨지는 학과라면 좀 더 확실하게 이런 주장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논지의 가능성이 아주 불가능한 것이 아닌 게, 요즘 래디컬은 이제 이성애자 남성과 가정을 이루고 출산하는 모든 여성을 ‘가부장제의 존속에 기여한다’며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논지 위에서 탈코르셋은 마치 내게 문대를 때려치우고 편입하거나 재입학해서 공대에 가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이 자신의 코르셋이었는지를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나서도, 좋아하는 것에 ‘여성적’인 것이 남아있다면 그 정도는 가지고 가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로 화장을 좋아하는 여성이라면 그 사람이 화장함으로써 삶의 에너지를 얻는 것이, 억지로 좋아하는 것을 그만두며 여성성 이미지 강화에 아주 조금 덜 기여하게 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 ‘남성적’인 것을 좋아하는 남성이 남성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며 비판받는 것은 본 적이 없는데, 왜 여성만이 ‘여성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괴감과 부채감에 빠져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지속가능한 탈코르셋 운동을 위하여

탈코르셋에 대해 고민하면서 생각이 끝없이 이어졌었다. 치마를 입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게 실은 성찰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은 아니었는지도 수없이 고민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내 고민했고, 이 글도 여러 번 지웠다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내가 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제목과 같다. 나는 화장은 안 하지만, 치마는 입을 거야. 내게 있어 화장과 치마의 차이는 이렇다.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나는 치마를 입는 게 좋다. 일단 편하다. 다리를 감싸는 게 없고, 바람이 다리 사이를 통하는 게 좋다. 무엇보다 나는 원피스를 좋아하는데, 코디를 어떻게 할지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입으면 되기 때문이다. 탈코르셋 논의를 받아들이면서 이전과 달라진 것은 짧은 기장보다는 좀 더 긴 기장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적으로도 나는 치마를 더 좋아한다. 바지를 입었을 때보다 치마를 입었을 때 나의 모습이 더 좋고, 내 기분도 좋다. 물론 내가 치마를 더 예쁘게 느끼는 것에는 내가 보고 자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의 수없이 많은 이미지의 영향이 있었을 것을 알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치마가 좋다. 나의 성별이 여성이 아니었다면 화장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여러 번 해 보았지만, 치마는 어떨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여성인 내가 좋으니 다 좋은 거야’ 정도의 순진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여성성 이미지에 균열을 내는 데에 있어, 물론 치마를 입는 것보다는 바지를 입는 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성성’을 부수는 방법에 오로지 ‘여성이 치마 안 입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덧붙여 나는 성별과 관계없이 모두가 자유롭게 치마를 입을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의 래디컬의 방식은 여성들을 ‘치마를 입는다/안 입는다’라는 양자택일의 좁은 틀에 가두고 상상력을 제한할 뿐이다. 우리는 이 이분법적인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벗어나 그 밖에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탈코르셋의 취지에는 매우 동감하는 이로서, 탈코르셋 운동이 좀 더 힘을 갖고 지속되려면 지금의 방식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답이 있는 탈코르셋은 줄 세우기가 될 수밖에 없다. 삭발, 완벽한 노메이크업이라는 답을 정해놓으면, 한 번에 코르셋을 벗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게 되고, 자기 자신도 깨닫지 못한 코르셋이 있을까 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현재의 방식으로는 서로가 무한 자기/타자검열을 하는 방식밖에 없는데, 이런 방식의 운동은 지속가능성을 도모하기 어렵다. 필연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들이 부채감이 아니라, 선택의 가능성을 가졌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완벽하게 탈코르셋 하지 못한 못난 인간이야. 나는 코르셋을 계속해서 더 벗어야 해.’라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까지는 긴 머리만 해왔지만, 짧은 머리를 해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와 같은 상상을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여성들이 각자가 자신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내가 정말로 좋아서 한 것은 무엇이고, 사회가 ‘여성이니까’ 억지로 하게 했던 것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지만, 천천히, 억지로 하게 되었던 것들은 내려놓는 과정을 겪었으면 한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나 맥락은 전부 다르므로 누군가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성성 이미지에 균열 내기에는 ‘개인에게 실천을 요구하기’에서 제발 벗어나서 좀 더 풍부하고 다양한 전략을 고민해보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가장 주력해서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은 여성 개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여성성 이미지를 고착화하는 데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탈코르셋 하지 않는 개인이 아니라 성별이분법적으로 상품을 생산해내는 기업, ‘여성적’ 이미지에 걸맞은 여성만 보여주는 미디어, 여학생에게는 치마 교복만 입히는 등 여성성을 주입하는 제도들일 것이다. 사회가 성별이분법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면, 여성들은 알아서 ‘여성적’인 것이 아닌 다양한 시도들을 하면서 알아서 탈코르셋을 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바꾸어야 할 것은 이런 것들이다.

우리가 정말로 바꾸어야 할 것은 이런 것들이다.

탈코르셋을 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늘어나야 한다. 모두가 똑같이 짧은 머리에 바지에 안경을 쓸 필요는 없지만, 아직도 많은 여성이 더 ‘여자답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며 외모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강박은 사회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은 깨닫고 나서도 말이다. ‘탈코르셋은 페미들의 분열’이라며 비웃는 멍청이들도 있는 마당에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쉽지 않은 것을 실제로 실천한 다른 이의 존재는 용기를 내는 데에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된다. 나 역시 노브라를 하면서도 유두가 조금이라도 티 나면 크게 신경 쓰였었는데, 유두가 도드라지게 옷을 입은 사람들을 직접 보게 되면서 좀 더 마음이 편안해진 경험이 있다. 그래서 나의 실천과 고민이 누군가에게 탈코르셋에 대해 생각해보고, 용기를 내는 계기가 된다면 정말로 기쁠 것이다.

글/ 오늘

편집 및 교정/ 이점

   [ + ]

1.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의 약자. 트렌스젠더 혹은 젠더퀴어를 배제하는 급진 페미니즘.(페미위키 “TERF” 참고)
2. 한국다양성연구소, 「”워마드는 페미니스트인가요?”라는 질문」, 『허핑턴포스트』, 2018.08.06.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b67feb6e4b0b15abaa4c46a (2018년 08월 30일 검색)
3. ‘섞어’를 뜻하는 방언에서 유래된 말로, 래디컬이 보기에 ‘진정한’ 페미가 아니며 다른 것과 섞인 페미니스트들을 지칭하는 말. (페미위키 “쓰까페미” 참고)
4. 지난 6월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은 페이스북코리아 사옥 앞에서 상의 탈의 시위를 진행했다. ‘내 몸은 음란물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슴을 드러내는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해당 사진을 음란물로 규정하고 페이스북이 불꽃페미액션의 계정을 정지시켰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항의 시위였다.
5. 김고연주, 『나의 첫 젠더수업』, 창비, 2017, p.15~21
6. 교육학과나 아동가족학과 등 교육, 돌봄과 관련된, 전통적으로 ‘여성의 분야’라고 여겨지는 학과라면 좀 더 확실하게 이런 주장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논지의 가능성이 아주 불가능한 것이 아닌 게, 요즘 래디컬은 이제 이성애자 남성과 가정을 이루고 출산하는 모든 여성을 ‘가부장제의 존속에 기여한다’며 비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