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세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연희관015B>에 실린 글입니다.)

꼭 ‘결혼’해서 ‘가족’이 되어야 하나요?

참 피곤한 세상이다. 젊은 여자들은 결혼을 안 하겠다고, 자기네들의 선택을 미혼이 아닌 ‘비혼’으로 부르란다. 동성애자들은 결혼에 미쳤는지 다들 동성혼 합법화를 외친다. 꼭 그 옆엔 십자가와 마이크, 앰프를 짊어진 사람이 동성애는 질병이고 우리 청소년들을 항문섹스로부터 지켜야 한다며 고래고래 화를 낸다. 기성세대는 자꾸 젊은 세대더러 “결혼은 언제 하니”, “때 놓치면 결혼 못 한다”라며 잔소리를 한다. 언론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N포세대’라고 칭하며 나날이 오르는 집값이나 교육비, 취업난 등등에 대해서는 입을 싹 닫는다. 애 하나 키우는데 드는 돈이 뭐어? 3억? 난 한 달에 백오십 버는데? 이제 아이를 셋 낳는 집은 애국자란다. 태아의 생명은 소중하고 낙태는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나 하는 것이라며 낙태죄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여자들은 이기적이라는 인터넷 댓글이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는다. 인터넷 곳곳에 소년소녀가장을 위해, 아버지는 집을 나가 없고 어머니는 투병 중인 아이를 위해 기부를 하라는 광고물이 떠다닌다. 대체 부모들은 어딜 가고, 국가는 뭘 하길래 맨날 나만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연애를 하고 이성과 결혼을 하고 자손번식을 하라고 꽥꽥거리는, 하지만 사회에서 정상이라고 보증해준 방식이 아니면 다 꽝이라는 참 피곤한 세상이다. 솔직히 이런 현 상황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상황에 대한 진단과 문제해결을 위한 방책은 꾸준히 있었다. 정부가 내놓는 정책은 신혼부부에게는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 자녀 당 양육비를 지원하는 것 등등이다. 소위 ‘생산성이 떨어지는 여직원’(혹은 육아휴직을 하는 ‘애처가’ 남직원)을 해고하지 말라고 기업에 권고하기도 한다. 결혼과 임신·출산·양육에 대해 각 후보나 정당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어떤 정책을 내놓는지가 선거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한편, 시장에선 내 프로필과 이상형을 작성하면 알아서 짝을 찾아준다는 결혼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람 만날 시간이 부족한 현대인에게 자본의 힘으로 인연찾기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혼의 꿈, 결혼제도로 맺어진 양친과 두 자녀가 있는 안락한 4인가족의 꿈은 끊임없이 좌절되고 있다. 아니 애초에 그 꿈들은 누구의 욕망 혹은 바람이었는가. 왜 이것이 그동안 모두의 ‘워너비’가 되어야 했는가. 무엇보다 ‘결혼으로 맺어진 4인가족’이 아닌 수많은 관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좌절되어왔고 드러나지 못했으며 욕먹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가족에 대한 욕망은 단 하나의 형태가 아니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방법들이 주로 결혼 제도를 유지하며 그 허점을 막아가는 방식이었다면, “법적으로 인정받는 관계는 결혼만이 전부일까”라는 질문은 현 상황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 토론회에서 진선미 의원은 “오히려 ‘결혼’이라는 비용이 높고 경직된 제도가 우리의 사랑과 연대를 막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진선미, 「가족의 변화와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의 필요성」,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 토론회 자료집, 2014, p9 가족을 이루는 ‘결혼’이라는 제도는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행복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에는 결혼을 통해 가족을 이루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2)위의 자료, p7 결혼으로 맺어지지 않은 이들은 계속해서 법을 비롯한 사회적 안전망에서부터 새어나간다. 결혼하지 않고 자녀를 둔 부모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는 청년들은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다. 결혼하지 않는 이유, 더 나아가 ‘결혼제도’ 그 자체에 대한 질문들은 부정한 것으로 취급된다. 결혼 말고는 법적으로 인정받고 용인되는 관계가 마땅하지 않다. 그래서 현재의 먹고 살기 팍팍한 상황에서, 결혼보다 좀 더 적합하며 다양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법적 관계를 마련해보자는 것이다.

생활동반자법 관련 토론회의 모습.

생활동반자법 관련 토론회의 모습.

생활동반자? ‘생동법’? 그게 뭐야?

2014년 더불어민주당 소속 진선미 의원이 발의한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이하 생동법)은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제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끔 그 관계를 보장한다. 누구나 ‘삶을 함께 살아갈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삶을 제도적으로 안정되게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특별한 사람은 나와 동성일 수도, 혹은 그 외일 수도 있다.

생동법은 기존의 결혼제도가 지나치게 특권화 되어 불평등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문제 삼는다. 우선 돈이 문제다. 지난 2월 웨딩컨설팅업체 듀오웨드가 발표한 「2018 결혼비용보고서」에 따르면 평균 결혼비용은 2억3 ,085만원이다. 이 가운데 주택자금이 1억6,791만 원(72.7%), 결혼비용은 6,294만 원(28.3%)으로 조사됐다. 3)이한듬, 「결혼 포기한 2030 – ‘헬조선행 특급열차’ 누가 타나요?」, 『MoneyS』, 2018.07.23. 이정도의 금액을 ‘평범한’ 사회초년생이 마련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두 번째, “결혼 시 남녀 중 더 손해를 보는 쪽은 여자”가 기정사실이 되었다. 한국사회가 결혼한 여자에게 요구하는 모습은 집안일도 잘하고 바깥일도 잘하는 소위 슈퍼우먼이다. 그리고 결혼제도를 통해 이성애자와 이성애자가 아닌 이들의 위계는 공고해진다. 결국 결혼은 사람들을 경제적 계급으로, 문화적 계급으로, 젠더 계급으로 나눈다. 현재 결혼제도가 겪고 있는 위기는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결혼제도 그 자체로 인한 것이다. 기존의 결혼제도는 점점 더 개인화될 수밖에 없는 현시대의 사회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4)진선미, 「가족의 변화와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의 필요성」,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 토론회 자료집, 2014, p9

심지어 결혼 비용이 우주여행 비용보다 비싸다는 통계도 나왔다...(출처: YTN 뉴스)

심지어 결혼 비용이 우주여행 비용보다 비싸다는 통계도 나왔다…(출처: YTN 뉴스)

진선미 의원의 생동법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려고 한다. 그 법안에 따르면, 생활동반자관계는 법적 성인 두 명이 성별과 관계없이 맺을 수 있다. 당사자들은 동거하며 서로 부양 및 협조의 의무를 지니고 일상의 가사에 대한 대리권을 갖는다. 일상언어로 풀어 말하자면, 계약관계에 있는 두 사람은 함께 살아가면서 기존의 가족관계와 마찬가지로 법률적 보호를 받는다. 수술 동의 등 의료과정에서 보호자의 의무를 지고 권리를 인정받는다거나, 가족 관계만이 누릴 수 있었던 복지 혜택을 받는 등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생활동반자관계는 결혼에 부담을 느끼는 혹은 결혼을 택하지 않는, 택할 수 없는 개인들이 당장 삶을 살아가면서 연대할 수 있게끔 돕는 제도이다. 생활동반자관계와 결혼관계가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차이점이 생활동반자관계와 혼인관계가 서로를 침해하거나 대체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1. 생활동반자관계는 개인 간 자유로운 합의로 맺어지는 계약관계를 상정한다. 친족 간 결합으로 인한 인척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2. 따라서 상속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현행법은 가족관계의 본질을 상속으로 삼고 있다. 사회 내 경제적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5) 김효빈, 「생활동반자에 관한 법률이 뭔가요?」, 『오마이뉴스』, 2014.07.0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11278 (2018년 08월 23일 검색) 결혼을 할 때 서로 패물을 주고받는 것, 결혼을 바탕으로 기업가 집안을 유지하는 것, 이혼소송 시 위자료 문제가 가장 쟁점인 것. 이러한 사례들이 결혼제도가 경제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3. 생활동반자관계의 해소는 결혼관계의 해소보다 그 절차가 간소하다. 현행법의 경우, 일방이 결혼관계의 해소를 원하더라도 협의상 혹은 재판상 이혼이 아니라면 관계의 해소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와 달리 생활동반자 관계는 일방이 다른 일방에 대해 관계 해소의 의사를 표시했음을 증명한 경우라면 신고의 효력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관계 맺음이 결혼보다 비교적 간단하다는 것이다.

생동법의 역사는 1989년 덴마크에서 ‘파트너십 등록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덴마크의 파트너십 등록제는 당시 덴마크에서 높아진 동성결혼 허용 요구에 대한 과도적 조치였으며,6)김태훈, 「1인가구끼리 가족처럼 살 순 없을까」, 『주간경향』, 2015.07.14. http://www.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7071322561&code=115 (2018년 08월 23일 검색) 근대 최초의 합법 결혼 대체제도였다.7)최윤필, 「“부부와 동등한 권리 보장”동성혼 법제화의 신호탄… 덴마크 ‘시민결합’ 첫 시행」, 『한국일보』, 2015.10.01. http://www.hankookilbo.com/v/1d9f6e94fc77477faadb83959ce861e6 (2018년 08월 23일 검색)
이후 생활동반자관계를 법제화 하여 해당 법을 시행하고 있는 곳은 프랑스, 멕시코, 칠레, 에콰도르, 일본 등 이십여 개국이다. 나라마다 생활동반자관계의 명칭이 조금씩 다른데, 중요관계(Significant relationships), 상호수혜관계(Reciprocal beneficiary relationships), 관습법적 혼인(Common-law marriage), 시민연대계약(Civil solidarity pacts) 등이 있다. 번역어이기 때문에 원어가 주는 맛이 반감되겠지만, 다양한 단어가 합성된 이 법명들은 모두 생동법이 법적 성인이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서로간의 수혜나 의존, 연대를 위한 계약관계임을 드러낸다.

현재 한국에서의 생동법 입법현황은 어떠한가.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가장 먼저 2014년 더불어민주당 소속 진선미 국회의원이 생동법을 발의하였지만 무산되었다. 이후 2017년 대선후보였던 정의당 소속 심상정 의원이 동반자등록법을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다.8)김태규, 「“혼인·혈연관계아니어도 ‘가족’ 인정돼야” 높아지는 ‘동반자등록법’ 요구」, 『투데이신문』, 2018.08.16. http://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844 (2018년 08월 23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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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_52017년 10월, 11월, 2018년 1월, 2월, 8월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도 동반자 등록법을 제정해달라는 청원이 꾸준히 올라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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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생동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와 생동법 제정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성애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동거노인, 친구간의 생활공동체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지금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이 그동안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공통으로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생동법이 일명 동성애자를 위한 법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 나는 생동법이 성소수자 커플의 관계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법제도 하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다양한 관계들이 생동법을 통해 인정받을 수 있다. 자녀가 있으나 당장 결혼하기 어려운 이성애자 커플, 결혼 생각은 없지만 동거인이 필요한 사람들, 각자의 파트너와 사별하여 함께 살게 된 동성들 등. 그런 수많은 관계들 중에 퀴어커플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비슷한 논리로 생동법을 반대하는 이들은 생동법이 ‘동성혼을 법제화 하는 첫 단초’라고 말한다. 실제로 생동법이 시행되고 있는 국가 중 동성혼이 합법화 된 곳이 있다. 프랑스, 노르웨이, 네덜란드, 브라질, 코스타리카, 아르헨티나 등이 그 예이다. 생동법과 동성혼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생동법의 통과가 곧 동성혼을 가능케 할 것이라는 발상은 지나친 비약이다. 생동법 발의안에서 수차례 언급하고 있듯이, 생동법은 기존의 결혼제도가 포섭할 수 없었던 관계들을 법적으로 보호하고자 한다. 그 관계들은 성애적인 것일 수도,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생동법은 동성애자 옹호법이라서 반대하고, 낙태죄 폐지는 몸을 함부로 굴린 여자들을 봐줄 수 없다며 반대하고, 하지만 저출생은 한국 사회의 정말 큰 문제라서 애 낳지 않는 젊은 부부를 욕하며 한부모 가정의 아이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런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생활동반자관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동성애자를 위한 법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생동법은 남녀의 성애관계를 넘은 수많은 관계들을 가능케 한다. 지금도 여전히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는, 결혼제도가 내쳤던 관계들이 생동법을 통해서 양지로 나오게 될 것이다.

우리에겐 생동법이 필요해

그렇다면 이제 어떤 관계들이 생활동반자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을지 살펴보자. 몇 가지의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어떤 것은 실제 개봉했던 영화 속 관계이고, 또 어떤 것은 가상의 인물들을 내세운 관계이기도 하다. 실제 인물을 인터뷰하기도 했고 내 이야기가 담기기도 했으며 기사를 인용하기도 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전부 누군가의 삶이지만 아직까지 법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1.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 보여주지 않았을 이야기

영화 <가족의 탄생>9)김태용(감독), <가족의 탄생>, 문소리‧김혜옥(주연), 2006은 기존의 4인가족 틀에서 벗어난 이들의 이야기를 크게 세 장으로 담아낸다. 그 중 하나는 형철을 계기로 형성된 가족이다. 몇 년 만에 형철은 친누나의 집에 애인과 애인의 딸을 데리고 들어온다. 그리고 어느 날 사라진다. 형철의 친누나 미라, 형철의 애인 무신, 무신이 전 애인과 낳은 딸 채현. 세 사람만이 남는다. 세 사람은 처음에 갈등을 빚지만 결국 함께 살아간다. 첫 이야기에서 대여섯 살 꼬마였던 채현은 마지막 이야기에서 20대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그렇게 혈연가족, 정상가족이 아닌 세 사람은 함께 삶을 이어나간다.

채현이 커갔을 십여년의 세월은 영화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세 사람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결코 짧지 않은 그 시간동안 누군가는 크고 작게 앓았을 터이다. 병원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의무교육을 받았을 테고, 미라가 떡볶이 장사를 하고 무신이 한복집을 꾸려 근근이 번다고 해도 모든 학비를 댈 만큼 가정형편이 넉넉지는 않았을 터이다. 형철과 무신은 혼인신고를 했을까. 작중에선 두 사람이 그런 제도로 묶여있음을 그려내지는 않는다. 만약 호주제가 폐지되지 않았더라면 채현은 이제 더 이상 그 자리에 없는, 혈연관계이지만 차마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는 누군가의 아이가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언젠가 미라와 무신이 세상을 떠나면, 채현은 적어도 미라의 가족이었음을 증명할 방도가 없다. 십수 년을 함께 살았는데도 말이다.

<가족의 탄생>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양친과 자녀가 함께 하는 그런 정상가족이 아니다. 비정상가족들은 픽션에 등장하는 특이한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정상가족의 모습에서 벗어난 관계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전쟁고아,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편모가정, 이혼가정, 양친이 자녀를 충분히 보살필 힘이 없는 가정. 기존의 결혼제도가 용인하지 않으나 남녀의 결합과 임신·출산·육아라는 점에서 ‘일반가정’과 다를 바가 없는 가정.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상견례나 화려한 결혼식이 아니다. 당장의 삶에서 제도적으로 인정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그런 장치가 필요하다.

의 한 장면.

<가족의 탄생>의 한 장면.

2. 잠시만 가족이 되자

이나와 연지는 친구이다. 이나는 386세대로 대학시절 내내 학생운동을 했었고, 최근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벌 만큼 벌었다고 생각했다. 이나는 1인 가구이다. 혼자 살다보니 생활비가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는다. 이나는 철학 공부를 계속 하고 있다. 연지와는 철학 스터디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

연지는 일명 N포세대이다. 페미니즘이 한창 대학가를 뜨겁게 달구던 시기에 대학생활을 했다. 그리고 최근에 졸업했다. 취직을 준비할까 생각 중이다. 연지는 지방 출신이다. 그래서 자취를 한다. 보증금도 월세도 일단은 부모님 돈으로 해결하고 있다. 취준을 하면서 연지는 이나와 함께 철학 스터디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은 말보단 글이 더 편하고, 영화 취향이 비슷하고, 낙관적이고, 새로운 모험을 하는 것을 좋아하고, 산책을 사랑한다는 점 때문에 순식간에 친해졌다. 이나는 스터디 내에서 가장 어리지만 할 말은 다 하는 연지를 좋아한다. 연지는 머랭쿠키를 처음 먹어봤다며, 머랭쿠키를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천진한 이나를 좋아한다.

산책을 하던 어느 날, 연지는 이제 대학도 졸업했는데 부모님 돈으로 자취를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말을 흘렸다. 이나는 잠시 말이 없더니 연지에게 자기네 집에서 같이 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연지가 서울에 스스로의 자리를 잡을 때까지, 혹은 연지가 원할 때까지. 연지는 그렇게 이나의 동거인이 되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잠시 가족이 되었다.

두 사람은 동사무소에 가서 생활동반자관계를 신청했다. 이후 연지는 일자리를 얻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원룸 한 칸에서 혼자 지내던 시절보다, 대학가의 자취촌을 전전하던 시절보다 훨씬 행복했다. 병이 나서 아플 때, 지방에 있는 부모님이 당장 달려올 수 없을 때, 일이 잘 안 풀려 속상할 때, 들뜬 하루를 보내고 재잘재잘 떠들고 싶을 때.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은 위안이 되었다.

그러다 연지에게 애인이 생겼다. 연지와 연지의 애인은 결혼과 출산을 계획했다. 고심 끝에 두 사람은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서는 생활동반자관계보다 혼인관계가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연지와 이나의 생활동반자관계를 해소하는 것은 딱히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생활동반자관계는 상속이나 재산 문제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냥 그동안 쌓인 짐을 치우는 게 더 골치 아팠다.

연지는 결혼식을 올렸고, 이나는 연지의 결혼을 축하했다. 잠시 머물러간 가족관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3. 생동법은 퀴어(Queer)한 관계들을 품는다, 퀴어커플들까지도

친구들에게서 글을 뜯어냈다. 여기에 실린 글을 쓴 우리는 모두 이성애자가 아니다. 인터뷰이 본연의 말투나 문체를 살리기 위해 편집을 가하지 않았다. 현재 애인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난점, 생활동반자관계 등록을 할지, 결혼을 할지 의향 여부를 물었다.

퀴어1) 내 친구 95년생 귀동이

당연하게 함께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 오랜 연인이 있다. 서로의 부재를 상상하기 힘든 안정적인 관계. 단단한/할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노라면 욕조에 몸을 담근 듯 편안하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을 더 깊게 하다보면 ‘엄마한테 들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이웃이 호모포비아여서 우리 관계를 소문내고 직간접적인 폭력을 가하면 어쩌지?’, ‘직장에 알려지면 어떡하지?’, ‘내가 갑자기 중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안전한 걸까?’ 같은 불안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고 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요즘의 나를 가장 괴롭게, 두렵게 만드는 것은 단연 여성이자 성소수자인 내가 법적 보호를 받는 시민이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 전에는 그런 글을 봤다. 퀴어 커플이 버스에서 뽀뽀를 하다가 뒤통수를 맞았는데, 주변의 목격자도 경찰도 하나같이 그 사람들이 당연히 맞을 짓을 했다고 여겼다고. 실은 그렇다, 직장 내 아웃팅이나 혐오로 인한 폭력 같은 것보다도 훨씬 두려운 것은 그 뒤의 국가와 사회, 나를 둘러싼 공동체의 대처다. 나는 다만 실질적으로 나와 삶을 함께 하고 있는 파트너가 동성이라는 점을 밝혔을 때 응당 받아야만 하는 보호를 받기만을 바라는데,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국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게 나를 너무나 불안한 존재로 만든다.

생동법이 시행된다면 애인과 생활동반자관계를 등록할 의향이 있다. 예전엔 동성 커플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할 법적 보호가 그다지 중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는데, 10년 후, 20년 후를 고민해야만 하는 나이(대학 졸업했다는 소리…)가 되고, 몸이 하나 둘씩 아프기 시작하고, 내 명의의 보험을 든다거나 하는 일련의 일들을 겪다보니 나와 내 애인이 반려가 되었을 때 받지 못할 법적 보호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가를 느끼게 된다. 동반자라는 관계틀에서 우리가 보호받을 수 있다면, 조금 더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퀴어2) 내 애인 97년생 유과

앞으로도 관계를 지속한다고 했을 때, 이 관계에 있어서 가장 불안한 것 혹은 난점은 (한국에 계속 산다면) 사회의 시선. 이 관계를 어디까지 남들에게 말할 수 있을까 걱정된다. 두 번째는 만일 근로자가 되어 결혼을 할 수 있을 조건을 갖춘 후에도 생동법이나 동성혼이 법제화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지도 걱정.

생동법이 시행된다면, 이후 나 혹은 연인이 경제적으로 집에서 독립할 수 있을 시기가 된다면, 애인과 협의 후 (동의한다면) 당연히 등록할 것.

동성혼이 가능해진다면, 결혼을 할지말지 본격적으로 결정할 시기에 대한 것은 위 대답과 같음. 생동법과 혼인신고의 차이가 있듯 통상적 결혼과 그 준비, 그리고 우리의 앞날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공유한 뒤 결이 같다면 결혼을 제안할 예정입니다.

퀴어3) 나 96년생 뀨뀨

퀴어커플의 앞날은 쉽게 휘청거리는 것 같다. 두 사람의 관계를 가꾸는 데도 우여곡절이 많을 텐데, 두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터전은 영 황량하다.

생활동반자관계와 결혼관계는 다르다. 유과와 생활동반자관계를 맺고 싶다. 유과가 혼자 살면서 겪었을 수많은 난관을 함께 헤쳐나가고 싶다. 결혼은 또 다른 문제다. 나야 유과가 어떤 참신한 프러포즈를 준비해올지 무척 기대되지만, 결혼이 법제화 되어도 결혼 안/못하는 퀴어들이 있을 것이다. 귀동이의 이야기를 이 글에 맞춰 좀 편집하느라 지워진 내용이지만, 귀동이는 결혼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커밍아웃이 두렵다고 했다. 마음이 아팠고, 이해가 되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선 많은 것이 필요하다. 부모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부모에게 커밍아웃하는 것은 낯선 사람에게 “나 바이야” 말하기보다 어렵고 두렵다.

생동법이든 동성혼 법제화든 이뤄낸다고 해서 끝은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항문성교하는 동성애자는 절대 안 돼”, “탈동성애 인권운동”을 외치는 이들을 무시하려고 애쓰지만 신경이 조금 쓰일 수밖에 없이, 계속 살아가야 한다.

4. 99세까지 팔팔하게 법 안전망 안에서 살아가려면,

전남 순천시에서 시행 중인 노인복지정책을 소개하는 기사를 읽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99세까지 팔팔(88)하게, 9988쉼터”10)소중한, 강성관, 「집 놔두고 경로당에서 사는 어르신들 “행복해요”」, 『오마이뉴스』, 2015.10.2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51521 (2018년 08월 23일 검색)였다. 2013년 9988쉼터가 처음 계획‧시행되었고, 각 마을의 경로당에 마련되어 있는 이 쉼터에서 노인들은 24시간 함께 생활할 수 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이 낮에나 잠시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가족’관계를 맺어 생활하는 것이다.

노인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자식들은 독립했고 파트너와 사별해 혼자 살게 된 노인. 결혼하지 않은 노인. 이혼한 노인. 자식과 연을 끊었거나 자식을 낳지 않았거나 자식이 먼저 떠난 노인 등. 이들이 모여서 함께 가족을 꾸리고, 그것을 지원하는 정책이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다. 한편, 여기에 더해 이들이 서로 생활동반자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함께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이 가족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노인은 쉽게 몸이 아프다. 병원 신세를 자주 져야 하고, 크고 작은 수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독거노인과 같이 환자보호자가 없는 경우에는 수술동의서를 작성할 수 없다. 보호자의 서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술동의서가 없으면 수술은 자연스럽게 지연된다.  9988쉼터에 모여 있는 노인 중 보호자가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생동법을 통해 실질적인 부양자가 없는 이들이나 자식이 없는 이들이 서로의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난 2007년 보건복지부는 전국의 병원에 “독거노인과 같이 환자보호자가 없는 경우 ‘수술동의서’의 제출을 강요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단순히 수술동의서를 제출하지 않는 수준에서 한 사람의 건강문제가 끝나겠는가. 이 땅에서 한 개인이 정말로 99세까지 팔팔하게 살아가려면, 가족을 꾸릴 공간을 마련해주고 그곳을 금전적으로 지원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9988쉼터를 통해 만들어진 노인공동체, 다시 말하자면 이 가족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들을 가족으로서 인정하는 법이 필요하다.

결혼만이 합법적인 관계맺음이 아니라고 했을 때

결혼만이 두 사람 관계의 법적 보호망이었다면, 이제는 다른 관계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친구와 함께 가족을 이룰 수 있고, 가족을 잠시 구성했다가 헤어질 수도 있다. 결혼을 당장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잠시 함께 살아갈 수도 있다. 결혼이 영원한 관계를 보장할 것이라는 환상이 오래도록 유지되었지만, 관계는 유동적이다. 결혼만이 관계의 종착역이라는 믿음이 무너져가고 있다.

그랬을 때, 결혼 이외의 관계들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보장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생동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 살아갈 것인지 혹은 어떤 형태로 살아왔는지를 가지고 사람들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반응한다. 혹은 “이제 ‘정상’이 아니라고 해서 손가락질 하던 시대는 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곳은 법치국가이며, 그랬을 때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가 법적으로 명명되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그동안 그늘 속에 숨어있어야만 했던 이들에게 법적 이름을 주어야 한다. 법적 이름은 사람들이 정말로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돕는 최소한의 토대이다.

글/ 김뀨뀨

편집/ 린

   [ + ]

1, 4. 진선미, 「가족의 변화와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의 필요성」,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 토론회 자료집, 2014, p9
2. 위의 자료, p7
3. 이한듬, 「결혼 포기한 2030 – ‘헬조선행 특급열차’ 누가 타나요?」, 『MoneyS』, 2018.07.23.
5. 김효빈, 「생활동반자에 관한 법률이 뭔가요?」, 『오마이뉴스』, 2014.07.0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11278 (2018년 08월 23일 검색
6. 김태훈, 「1인가구끼리 가족처럼 살 순 없을까」, 『주간경향』, 2015.07.14. http://www.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7071322561&code=115 (2018년 08월 23일 검색
7. 최윤필, 「“부부와 동등한 권리 보장”동성혼 법제화의 신호탄… 덴마크 ‘시민결합’ 첫 시행」, 『한국일보』, 2015.10.01. http://www.hankookilbo.com/v/1d9f6e94fc77477faadb83959ce861e6 (2018년 08월 23일 검색
8. 김태규, 「“혼인·혈연관계아니어도 ‘가족’ 인정돼야” 높아지는 ‘동반자등록법’ 요구」, 『투데이신문』, 2018.08.16. http://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844 (2018년 08월 23일 검색
9. 김태용(감독), <가족의 탄생>, 문소리‧김혜옥(주연), 2006
10. 소중한, 강성관, 「집 놔두고 경로당에서 사는 어르신들 “행복해요”」, 『오마이뉴스』, 2015.10.2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51521 (2018년 08월 23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