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세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연희관015B>에도 실린 글입니다.)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타투를 해본 화석 학번의 생애 첫 타투 후기에 부쳐

 

0.

당신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나는 곧 내 몸’이라는 답을 던지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몸은 특별하다. 그리고 특별한 만큼 당연하다. 나라는 존재는 평생 단 한 번도 몸과 분리되지 못하고, 그 몸이 아닌 다른 몸으로 살 수도 없다.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타투를 해본 화석 학번의 생애 첫 타투 후기에 부쳐> 따위의 매우 흥미로워 보이는 부제에 끌려 이 글을 펼친 독자들이라면 당황스러운 도입부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누가 보더라도 타투에 대해 이야기할 것처럼 보였던 글의 시작이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곧 내 몸’이라니. 하지만 실망하긴 이르다. 다행스럽게도 이 글은 분명 타투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몸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전통적이고 중요한 질문이지만, 이 글은 그 질문 자체에 답하기보다 그 질문을 바탕에 둔 채 몸에 대해 조금은 다른 접근을 시도하려는 글이다. 대부분 사회는 몸에 대한 일반적이고 규범적인 상을 가지고 있다. 그 상에 부합하는 특정한 외형의 몸을 가진 개인만이 완전하고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며, 어떤 몸을 가졌는지에 따른 사회적 대우는 하늘과 땅만큼 달라진다. 몸은 일종의 전리품이며 여러 개인 중 자신의 몸을 아끼고 훌륭하게 관리해내는 개인만이 성실하고 훌륭한 존재로 인정받는다. 매체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의 몸이 표현되고 소비되는 방식만 보더라도 이 세계가 움켜쥐고 있는 몸의 규칙이 얼마나 굳건한지 알 수 있다. 몸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장 직관적으로 구분하며, 혐오를 추동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몸은 닫혀있을까.’ 좀 더 풀어 설명해보자면 몸의 내부와 외부는 분리되어있을까. 외부의 것이 내부로 들어오거나 몸 안의 것이 외부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할까. 한 개인의 몸 안에는 특별하고 고유한 것이 존재할까. A라는 개인에게 자신의 몸은 특별하다. 특별할 수밖에 없다. A라는 몸 없이 A는 존재할 수 없다. 영혼과 정신이 존재해 몸이 죽고 썩어 없어지고 난 후에도 A가 존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에서 A는 곧 A의 몸과 동일시된다. 그렇기에 몸은 한 개인의 고유한 성질을 담고 있는 독립된 것으로 상상되며, 고정적이고 영구불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러 이유로 몸의 형태가 변화하더라도 관념 속의 몸, 그리고 몸 안의 특별하고 고유한 무언가는 유지된다고 상상된다.

의문이 들 수 있다. ‘몸은 닫혀있을까’라니. 생소하기 짝이 없는 그 질문을 당최 어디다 써먹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실 수도 있겠다. 몸이 고정적이고 온전한 형태로 유지된다는 것, 외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인식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정상적인 몸을 가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존재를 가늠하고 평가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바탕을 제공한다. 톰슨은 “몸은 한 집단이 소중하게 여기는 신체적 특징들을 소유함으로써 정당화되고, 다른 집단들에게 문화적으로 또는 신체적으로 열등한 역할을 강요함으로써 그 지배력과 자아 정체성을 유지” 한다고 말한다.1) Thomson, R. Garland (1997), 「보통이 아닌 몸」, 손홍일 옮김, 그린비, 2015, p18~19. 임애정(2015)에서 재인용. ‘규범에 맞지 않는 몸과 행동을 가진 사람들을 배제하는 신체적 다름의 내러티브’2) 위와 같은 책. 는 닫혀 있는 몸과 고정불변하고 규범적인 몸에 대한 환상을 밑절미 삼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1.

 “아마도 문신의 위기는 문신 본연의 특성이 희석될 때 오지 않을까 싶다.
쉽게 말하면 통증 없이(문신은 일반적으로 마취를 하지 않는다.) 시술이 가능하고
문신 제거가 지금보다 완벽하고 저비용으로 이루어질 때
문신은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3) 남궁호석, 「한국의 문신 타투이스트가 전하는 타투 이야기」, 청어, 2015. p32.

이제야 타투 이야기가 나오냐 하는 짜증이 들지도 모르겠다. 오랜 기간 실제 문신사로 일하며 한국의 문신에 대해 정리한 남궁호석은 문신의 앞날을 가늠하며 문신 본연의 특성을 두 가지로 축약한다. 통증과 영구성. 이 두 가지 문신의 속성은 열린 ’몸‘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제공한다. 통증은 외부의 것인 타투를 몸이 받아들일 때 발생한다. 영구성은 타투라는 외부의 것이 몸에 새겨질 때 그 지위를 의심받는다. 얇은 피부 위에 외부적인 물체에 의해 압력이 가해질 때 발생하는 감각, 몸 바깥에 있던 것이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와 새롭게 획득한  (반) 영구성은 ’닫혀있지 않은‘ 몸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힌다.

타투. 좀 더 올드하고 무서워 보이는 말로 문신. 타투와 문신은 시술을 받은 숫자만 약 100만 명, 직접 타투를 시술하는 타투이스트가 약 20만 명4)「문신 100만 시대..예술성과 위험의 경계에 있는 문신」, SBS 뉴스, 2017. 7. 9. https://www.youtube.com/watch?v=bcgLAXOrOgA으로 추산될 정도로 빠르게 그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젊은 인구가 붐비는 대학가에서 타투를 한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로 타투는 점점 더 많은 인기를 끌며 대중화되고 있다. 타투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중 ‘무엇인가를 치다(Strike)’라는 의미의 폴리네시아어 ‘타(ta)’ 혹은 ‘무언가에 표시하다(mark)’라는 의미의 타히티어 ‘타타우(tatau)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5) 레네 탕고르드, 크리스티안 스타딜, 「피카소와 샤워를」, 조윤경 옮김, 생각과 사람들, 2014.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타투는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염료를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새길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타투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범벅되어 있다. 나 또한 타투를 결정하고 실제로 새기면서 타투를 뒤덮고 있는 부정적인 인상과 이미지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조직 폭력배나 일본의 야쿠자, 소위 비행 청소년이라 불리던 집단이 타투 문화를 향유했다는 점도 그 이유일 수 있다. 하지만 타투가 ‘순결하고 닫혀 있는’ 몸이라는 사회가 만들어낸 이상적 몸에 균열을 낸다는 점도 타투가 뒤집어쓰게 된 오욕과 불명예에 이바지하지 않았을까. 그 의문이 사실인지를 증명하는 것보다 그 가정이 던지는 가능성을 통해 닫혀 있지 않은 몸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더 유의미할 것이다. 한 사회에서 권력을 쥔 채 자신들만을 정상적이라 여기는 집단들은 유별난 존재들을 배제함으로써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그 권력의 작동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몸’에 대한 관념을 십분 활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북하고 징그러운’ 타투, 나아가 이 사회의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 위해 몸을 의심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2.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학에 입학한 이후부터 난 상당히 오랫동안 타투를 할 ‘각’을 재고 있었다. 특정한 문구나 그림, 상징 등을 몸에 새기는 행위는 그 자체로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 같았고, 몸에 새겨진 다양한 도안들과 문구들은 미적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타투를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타투를 하지 못하고 미적댄 것에는 금전적인 이유, 게으름 등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대단한 의미나 상징을 골라야 한다는 부담,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부정적 시선과 이미지, 타투를 양친에게 설명할 자신감의 부족 등의 이유가 특히 크게 작용했다.

타투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투를 ‘과하게’한 이들을 거리에서 목격할 때면 나도 모르게 거북함과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다. 몸을 새하얀 도화지라고 했을 때 타투는 깨끗한 종이 위에 잘못 떨어진 불청객처럼 몸을 더럽히는 것이라 여겨질 때도 있었다. 타투를 한 지금까지도 팔이나 목을 가득 채운 큰 타투를 볼 때면 그러한 생각이나 느낌을 받곤 한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타투를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타투에 대한 선입견과 몸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는 것이 필요했다. 결국 나는 대학에 입학해 여러 해가 지나고 완연한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타투를 했고, 이 글을 빌어 필자의 생애 첫 타투 후기를 소개한다. ‘내가 이런 타투를 이렇게나 예쁘게 했어’ 하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러한 목적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타투를 하면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이 글의 밑절미가 되었기에, 용기를 내어 소개한다.

타투를 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정작 이후의 과정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평소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타투이스트에게 연락해 상담을 진행하고 날짜와 시간을 예약한 것이 실제 타투 작업을 받기 전 해야 했던 과정의 전부였다. 어떤 도안이나 문구를 새겨야 할지도 정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가장 적절한 도안이나 문구를 결정할 때까지 시기를 미뤄서는 결국 타투를 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일단은 예약을 먼저 하기로 했다.

타투를 할 돈은 빌려야 했다. 애정하고 신뢰하는 한 친구에게 돈을 빌려 예약금을 냈다. 월급이 들어오지 않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에게 돈을 빌려 타투를 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만 같았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 예약금을 내고 나니 이제 빼도 박도 못 하게 타투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니 도리어 편안해졌다. 어떤 도안이나 문구를 새길지는 여전히 고민이었지만 타투를 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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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한창이던 7월의 어느 주말 오후 1시. 마포구에 위치한 타투샵을 방문해 타투를 진행했다. 타투이스트는 매우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상담을 진행했고 내가 그려 간 도안을 전사한 후 어떤 느낌을 원하는지 위치와 크기 등에 대해 면밀히 얘기를 나눴다. 상담이 끝난 후에는 준비되어있는 베드에 누워 타투를 할 오른쪽 팔을 걷고 대기했다. 그 타투샵은 가치관과 방향성을 합의, 공유 한 여러 타투이스트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이었기에 다른 베드에서는 타투이스트들이 각자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베드에 누워 작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니 예상보다 큰 긴장감과 설렘, 두려움 등의 감정이 한데 섞여 가슴 속 어딘가를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오늘 새긴 이 타투를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라 불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죽고 싶어지는 것은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살기 때문’이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나 그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뜬금없지만 정말로 그 순간 그 가사가 떠올랐다.

여러 기계 장치를 세팅하고 도안을 팔에 임시로 전사했다. 그리고 타투이스트는 타투 바늘을 살갗에 가져다 대기 전 짧고 나지막하게 ‘그럼 시작할게요’라고 말했다. 단지 그뿐, 호들갑을 떨지도 아플 것이라며 겁을 주지도 않았다. 지이잉하는 기계 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컸기에 나도 몰래 몸이 경직되고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긴장해서 팔에 힘을 주면 타투가 예쁘게 그려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최대한 몸에 힘을 빼려 노력했다. 그리고 드디어 타투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팠다. 타투 후기를 꽤 접했지만, 이 정도의 고통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비유를 하자면 연필을 깎을 때 사용하는 커터칼로 살을 일정한 주기와 강도로 긋는 느낌이랄까. 쓰라리고 따가운 감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꽤 긴 시간 꾸준히 이어졌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약 10-15cm 정도의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상대적으로 단순한 도안임에도 불구하고, 타투가 모두 새겨지는 데에는 약 4-5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다. 타투이스트는 작업이 끝나고 난 후 전사한 도안과 타투를 카메라로 찍더니 시작할 때처럼 무던한 목소리로 작업이 끝났다고 말했다. 이후 타투이스트에게 타투 관리를 안내받고 남은 돈을 지불하고 문을 열고 나왔다.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내 생애 첫 타투가 몸에 새겨졌다.

3.

이 타투는 앞으로 특별한 계기가 생기거나 제도적 차원의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이상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기술로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지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투를 2018년 여름, 지금 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 글 때문이다. (물론 이 글 때문만은 아니다.) 몸에 대한 주제를 떠올리고 주제를 녹여낼 소재로 타투를 떠올리고 나니 글을 쓰기 위해 반드시 직접 타투를 하는 것이 필요했다. 또한 이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타투를 할 수 있게끔 하기도 했다. 글을 구상하던 초기 단계에서 타투를 실제로 새기는 과정을 거치면서 글의 주제는 계속해서 변화했고, 타투 경험의 생생함은 그 주제를 좀 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만들어주었다.

닫혀있는 몸, 외부와 단절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몸은 타투 이외에도 많은 것들과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외모를 관리하기 위해 신체의 여러 부분에 반영구적으로 삽입하는 보형물이나 약물들, 골절된 부위에 삽입하는 철심 등도 몸이 아닌 외부의 것을 신체화하는 것의 한 사례다. 거기에 더해 현대 사회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도구들, 예컨대 스마트폰 등이 일종의 신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어볼 수 있다. 귀나 코 등을 뚫어 착용하는 피어싱이나 콘택트렌즈, 안경 등도 같은 궤의 의문 위에 위치한다. 이동을 보조하는 의족, 전동 휠체어와 케인, 청력을 보조하는 보청기나 인공 와우도 그렇다. 물론 이와 같은 수많은 사례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모두 몸이 되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몸의 열고 닫힘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드는 흥미로운 사례들을 통해 이 글의 주제를 한 번 더 환기해보자는 것이다.

‘닫혀있지 않은 몸’에 대한 생각은 버틀러에 의해 좀 더 정돈되어 표현된 적이 있다.

“피부와 살 때문에 우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노출되며
또 접촉과 폭력에도 노출되며, 신체에는 항상 공적 차원이 있다. (…)
처음부터 타자들의 세계에 배당된 신체는 타자들의 자국을 지니고 있고 사회적 삶의 도가니 안에서 형성된다.”6)Butler Judith, 「불확실한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8, p54, 임애정(2015)에서 재인용.

버틀러는 ‘타자들의 자국, 사회적 삶의 도가니’ 등의 비유적 표현들을 활용해 몸의 수행성과 유동성을 직관적이고 극적으로 보여준다.

몸이 닫혀 있지 않고 유동적이라는 건 타투와 같은 물리적인 존재가 외부에서 몸으로 유입된다는 것과 버틀러가 짚어준 것처럼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서 끊임없이 수행하며 외부의 존재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한다. 몸은 ‘피부와 살’을 통해 타인과 사회에 노출된다. 끊임없이 열렸다 닫히는 과정을 반복하며 재구성되고 유동함으로써 ‘자국’을 만들어간다. ‘피부와 살’이라는 경계를 통해 개인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아닌 것과 맞닿아 있게 되는 것이다. 타투는 그 경계를 너무나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타투는 몸에 출입할 수 있는 통로인 피부 위에 새겨진다. 그리고 어떤 의미나 상징을 부여받을 때부터 외부의 가치와 상징체계를 반영한다. 달리 말해 당신이 새길 타투를 고를 때 고민하는 도안과 문구는 이미 이 사회의 언어와 상징의 그물에 포획되어 있다는 것이다. 새겨지고 난 이후에도 타투는 외부에 의해 끊임없이 평가되고 해석된다. 아주 내밀한 곳에 개인적으로 새겨지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 읽히고 보이지 않는 타투는 없다는 것이 그러한 타투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이 공적인 차원과 공간에서 열린 채로 유동하고 수행함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 중 하나는 또한 신체의 감각이다. 그중 피부에 무언가(가령 날카로운 타투 바늘 같은 것)가 닿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고통은 더욱 분명하게 몸 여기저기에 존재하는 출입문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필자가 타투를 하며 경험한 생생한 고통은 우연한 일로 발생한 사고 등으로 인해 경험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고통과는 분명 다르다. 무언가를 상실하거나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라, 외부의 것을 몸으로 입장시켜 새롭게 획득해 영구히 남겨두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진 고통의 감각은 특별하다. 시각도, 청각도 아닌 촉각에 의해 유발되고 불안과 두려움, 위협 등의 부정적인 감상과 느낌을 일으키는 이 고통이라는 것은 훨씬 근본적이고 즉각적으로 몸의 열리고 닫힘, 유동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쉽게 말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몸은 닫혀있지 않다.’

4.

글을 시작하며 밝힌 것처럼 몸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는 정신이나 영혼 따위를 믿지 않고, 이 글은 정신이나 영혼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한 채 쓰였다. 그러니 영혼, 정신 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은 너무 늦었지만 더 이상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겠다. 몸이 없으면 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글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나아가 당신이 언제나 같은 곳에 당연한 듯 자리를 점하고 있는 당신의 몸에 조금은 다른 시선을 던지고자 할 때 이 글은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몸이 열리고 닫힌다는 사유가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열리는 또 다른 문이 있다. 그 문은 이 사회가 안간힘을 써서 만들어놓은 틀에서 벗어난, 혹은 벗어날(그것이 불가피해서이든 자신의 선택이든) 이들을 향한 문이다. 그 문은 평소 자신의 몸에 대해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았던 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문이다. 그 문을 열기 위해 반드시 모두가 타투를 하거나, 외부의 존재를 몸에 출입시켜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몸을 어떻게 사유하고 어느 정도의 범위와 규격으로 한정 짓는지에 따라, 어떤 몸과 삶은 철저히 외면되거나 비정상적이고 유별난 존재로 치부될 수 있다. 몸을 닫으면 닫을수록, 경직된 것으로 다루면 다룰수록 무수히 많은 방향으로 향해있는 다양한 문들은 닫히고 만다. 문의 닫힘과 잠김이 강하게 종용될 수록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조금씩 더 참담해질 것이다.

여태껏 당신은 타투를 한 몸을 목격할 때마다 분명 어떤 생각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들의 대부분은 부정적일 것이다. 여태껏 당신은 정상적이지 않은, 유별난 몸을 목격할 때마다 어떤 생각들을 떠올렸을 것이고, 그 생각들도 대부분 부정적일 것이다. 물론 타투를 한 사람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 성별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사람들, 일반적이지 않은 외모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말자는 주장은 정말로 필요하다. 하지만 그 주장에 더해, 혹은 그 주장보다 먼저 몸에 대한 관념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는 제안도 반드시 필요하다.

상상해보자. 당신의 몸이 마치 물속에서 호흡하는 물고기처럼 아가미를 열었다 닫으며 호흡하는 모습을. 당신의 몸이라는 웅덩이 속으로 새로운, 혹은 낡은 물줄기들이 흘러들었다 다시 새어 나오는 풍경을 말이다. 누군가의 몸에는 아가미가 달려있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특정한 몸만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아가미의 유무와 상관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몸에 대한 권력과 사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색과 모양의 아가미들을 부정하고 숨기고 싶어 안달 난 세상 그 자체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며 그 세상에 한 번쯤 질문을 던지고 몸에 대해 조금이나마 달리 생각하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이 세계가 설정한 규범적이고 일반적인 몸의 ‘규격’에서 벗어나는 존재들이, 그리고 당신이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는데 아주 미약한 도움이라도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글 재찬

/편집 및 교정 이점

 

   [ + ]

1. Thomson, R. Garland (1997), 「보통이 아닌 몸」, 손홍일 옮김, 그린비, 2015, p18~19. 임애정(2015)에서 재인용.
2. 위와 같은 책.
3. 남궁호석, 「한국의 문신 타투이스트가 전하는 타투 이야기」, 청어, 2015. p32.
4. 「문신 100만 시대..예술성과 위험의 경계에 있는 문신」, SBS 뉴스, 2017. 7. 9. https://www.youtube.com/watch?v=bcgLAXOrOgA
5. 레네 탕고르드, 크리스티안 스타딜, 「피카소와 샤워를」, 조윤경 옮김, 생각과 사람들, 2014.
6. Butler Judith, 「불확실한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8, p54, 임애정(2015)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