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1934년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잡지 <삼천리>에 ‘이혼 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했다.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그는 당시에 상상하기 힘들었던 여성의 자유연애, 여성 해방론을 주장했다.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가부장제가 뿌리 깊은 조선 사회에서 나혜석은 음탕한 여자로 낙인찍혔다. 남편과 이혼하고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그는 혼자 길 위에서 죽었다.

나혜석에게 조선은 어떤 공간이었을까? 그는 이혼 전 남편과 유럽 유람을 다녀온 뒤 새로운 세상과 사랑에 눈떴다. 신세계를 경험한 그에게 조선은 너무 좁았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만연했고 자신의 목소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조선을 벽으로 비유했다. 미술, 문학 등 여러 방면에 재능 많던 예술가는 그 벽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최근 나혜석의 삶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시간이 흘러 나혜석은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지난 3월에는 그의 고향 수원에서 나혜석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 현판식이 열렸다. 여성이 인간으로서 자유롭지 못한 공간이었던 조선은 막을 내렸고, 나혜석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여성들은 집 안에서 딸, 아내, 어머니로 살다가 이제 문턱을 넘어 거리로 나섰다. 그 발걸음을 따라가면 어떤 풍경과 마주칠까? 시민의 발인 지하철을 타고 수원으로 가 근현대사 속 여성의 공간 순례의 여정을 시작했다.

분당선 수원시청역 나혜석 거리

수원시청역 9번 출구로 나가 죽 직진한다. ‘나혜석 거리’라고 적힌 표지판이 보이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혜석 동상이 서있다. 그의 이름을 딴 길이지만 정작 동상 양 옆으로 음식점과 술집만 즐비하다. 다른 게 있을까 하여 동상 뒤편으로 걸었다. 그 끝에 또 다른 나혜석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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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거리 입구의 나혜석 동상과 끝에 앉아있는 나혜석 동상

나혜석 거리 입구의 나혜석 동상과 끝에 앉아있는 나혜석 동상

동상 뒤의 조형물은 나혜석이 벽으로 비유한 조선 사회다. 조선 한 구석에는 그의 시 ‘인형의 가(家)’가 쓰여 있다.

“노라를 놓아라/최후로 순순하게/엄밀히 막아논/장벽에서/견고히 닫혔던/문을 열고/노라를 놓아주게”

노라는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대표작 ‘인형의 집’의 주인공이다. 노라는 평생 누군가의 인형으로 살던 삶을 청산하고, 남편과 아이를 남겨둔 채 집을 나간다. 나혜석은 노라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인형의 가(家)로 표현했다. 비록 자신은 조선 사회에서 해방되지 못했지만, 지금 수원 중심가 그의 동상은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수많은 여성들을 지켜본다.

나혜석 동상이 지켜보고 있는 나혜석 거리 앞 대로

나혜석 동상이 지켜보고 있는 나혜석 거리 앞 대로

2호선 이대역 이화여자대학교

2, 3번 출구 중 한 곳으로 나가 긴 내리막길을 걷는다. 얼마 안가 익숙한 배꽃 문양이 보인다. 이대 주변은 관광객과 학생들로 북적인다. 학교 홍보대사로 보이는 학생이 한 무리 고등학생을 이끌고 이대의 상징 ECC를 돈다. 지난 해 가을 이대생들이 여기서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곧 광화문으로 옮겨 붙었다. 한 언론은 이를 ‘이대생이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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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 ECC 전경, 지난 해 가을 이대 촛불시위와 ‘이대생이 쏘아올린 작은 공’ (출처 : 미디어 몽구 캡처 및 스브스 뉴스 공식 페이스북)

이대 ECC 전경, 지난 해 가을 이대 촛불시위와 ‘이대생이 쏘아올린 작은 공’ (출처 : 미디어 몽구 캡처 및 스브스 뉴스 공식 페이스북)

1886년 미국에서 온 한 선교사가 조선 최초의 여자대학을 세웠다. 학당 근처에 흐드러지게 핀 배꽃이 학교 이름이 됐다. 규방을 벗어난 조선 여성들은 이화학당에서 새로운 세계와 만났다. 영어를 배우고 서양 문학을 읽었다. 사회생활에서 활용하는 기술을 배워 졸업 후 전문직으로 일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힘든 시기를 겪었지만 이대는 꾸준히 ‘최초의 여성 ○○’을 만들었다. 한국 최초 여성전용병원 보구여관을 지었고, 처음으로 종합대학 인가를 받았다. 1977년 아시아 최초의 여성학 강좌를 개설했고, 1997년엔 세계 최초 여대 공과대학을 설립했다.

ECC를 넘어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한옥 한 채가 있다. 이화역사관이라 쓰인 안내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역대 총장 사진 끝에 김혜숙 총장의 사진이 있다. 그는 지난 5월 이대 사상 최초로 교수, 직원, 학생, 동문이 참여하는 직선을 거쳐 총장으로 선출됐다. 한국 대학 역사에서 이례적인 이 선거의 후엔, 평화롭게 변화를 요구한 이대 구성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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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숙 총장의 취임식 사진과 평화시위 사진 (출처 : MK News 카드뉴스)

김혜숙 총장의 취임식 사진과 평화시위 사진 (출처 : MK News 카드뉴스)

3호선 안국역 평화의 소녀상

안국역 6번 출구로 나와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조금 더 직진하면 왼편으로 경찰차 여러 대가 서있는 길이 보인다. 그 길 안쪽에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소녀상은 주한 일본 대사관을 마주하고 있다. 매주 수요일 이곳에서 수요시위가 열린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1992년 시작된 이 모임은 단일 주체가 개최한 집회론 세계 최장 기록을 세웠다.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

1945년 일본 패전 직전까지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등 여러 나라 여성들이 강제로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 인권을 유린당했다. 전쟁이 끝난 뒤 피해자들은 편견과 부정적인 낙인에 숨죽인 채 한동안 침묵했다. 국가는 피해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진상규명에 소홀했다. 1991년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증언해 국제 사회에 알려졌다. 뿔뿔이 흩어졌던 피해자들이 그 후 하나 둘 목소리를 냈다. 2012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 회의는 매년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정했다.

김학순 할머니 (출처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식 홈페이지)

김학순 할머니 (출처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식 홈페이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돕고자 국내에 여러 시민단체가 생겼다. 수요시위를 개최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평화나비 네트워크 등이 대표적이다. 소녀상 옆에서 ‘소녀상농성 대학생공동행동’은 천막을 치고 2년째 매일 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전국 초, 중, 고등학교에 작은 소녀상을 설치하는 캠페인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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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 중인 대학생공동행동 천막과 작은 소녀상 (출처 : 평화의 소녀상 네트워크 공식 홈페이지)

농성 중인 대학생공동행동 천막과 작은 소녀상 (출처 : 평화의 소녀상 네트워크 공식 홈페이지)

(2편에서 이어집니다)

글, 사진 및 편집 / 싱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