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420만, 미씽 115만을 보는 다른 시선

지난해 한국영화의 트렌드 중 하나는 ‘여성영화’였다. 출판시장에서 주디스 버틀러나 낸시 프레이저의 책이 이례적인 판매를 기록했던 것처럼, 여성 감독이 여성 배우를 캐스팅한, 여성에 대한 영화들이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 <미씽: 사라진 여자>(이하 <미씽>)과 <아가씨>다.

물론 그 열기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에도 일리가 있다. 아직 주류영화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1) 김숙현, 2016.12.30, 「여성 영화의 약진 그리고 숙제」, 『시사인』 흥행성적이 증명한다. 2016년 100만 관객을 넘긴 영화들 중 <아가씨>는 겨우 10위권에 이름을 올렸고, <미씽>은 아래에서 세 번째였다. 또 다른 여성영화였던 <비밀은 없다>는 아예 순위에도 오르지 못했다(누적 관객 수 약 25만 명). 그렇다면 이 수치는 여성영화 열풍이 실체 없는 요란한 소동에 불과했음을 증명하는 것일까?

순위 영화명 관객수(명)
1 부산행 1156만
2 검사외전 970만
3 밀정 750만
4 터널 712만
5 인천상륙작전 704만
6 럭키 697만
7 곡성 688만
8 덕혜옹주 560만
9 아가씨 429만
20 동주 117만
21 미씽: 사라진 여자 115만
22 오빠생각 107만
23 날, 보러와요 106만

(출처 : 나원정 외 2명, 2017.02.01, 「2016년 한국영화 여성들, 안녕하십니까」, 『매거진M』에서 일부 발췌)

그 전에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무엇이 ‘여성영화’일까? 영어로는 women’s film이니, 여성의 시각에서 만든 영화, 여성 주인공을 캐스팅한 영화, 여성 관객을 위한 영화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아가씨>와 <미씽>은 여성영화일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가씨를 만든 박찬욱은 남성 감독이다. 무엇보다 두 영화의 감독은 자신들의 영화를 여성영화로 정의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이언희 감독은 <미씽>이 여성영화라기보다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위한 영화이며 ‘이해를 위한 영화’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2)유지영, 2016.12.07, 「여성 감독이 현장서 만난 편견들, 영화 <미씽>이 됐다」, 『오마이스타』 그럼에도 <아가씨>와 <미씽> 앞에 붙은 ‘여성영화’라는 수식어는 자연스럽다. 여기에서 여성영화 열풍을 어떻게 봐야 할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언어가 사회적 약속이듯이 대상에게 붙은 이름은 대상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지금까지의 영화시장에서 여성의 역할은 제한적이고, 지엽적이었다. 여배우 중에서 탑이라는 김혜수와 전지현이 남자배우들 틈바구니에서 조연에 만족해야 하고3)이세아, 2017.04.21., 「“지금 한국 영화계는 남자들의 독무대…여배우 설 자리 없다”」, 『여성신문』(<도둑들>이 대표적인 예다) 방금 전에 본 것처럼 흥행하는 영화는 대부분 남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액션 영화다. 여성영화라는 호명에는 범죄물이나 느와르, 남성 버디물을 그만 보고 싶었던, 그리고 여성이 서사의 중심에 서길 원했던 관객들의 기대가 투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성영화의 흥행 ‘실패’에서 우리는 다른 결론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이제껏 관객 수 115만의 영화가 이렇게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다. 대중의 변화, 혹은 성장을 보여주는 현상인 것이다. 애초에 여성영화가 주류 영화와 자본 규모로 경쟁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자본력은 곧 티켓 파워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흥행 여부가 성패의 기준이 되는 상업영화 시장에서 그에 무관하게 주목받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커다란 진전이다.

여성영화라는 호명은 ‘현실을 바꿀 힘을 가진 예술’에 대한 요청이었다. 그렇게 사회적 효용가치를 부여받은 두 영화는 대중들의 기대에 부응했을까? 이 지점에서 <미씽>과 <아가씨> 두 영화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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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

많은 여성영화의 주인공들은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남성들의 억압에 침묵하지 않는다. 남성에게 기득권을 부여하는 사회구조에 맞서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힘을 합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까닭에 <히든피겨스>나 <델마와 루이스> 같은 영화는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다. <아가씨>와 <미씽>도 마찬가지다. 물론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인물이 연대하는 것은 여성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여성영화는 기존의 영화가 외면해왔던 여성의 문제를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다.

의 재개봉판 포스터

<델마와 루이스>의 재개봉판 포스터

우리에게 익숙한 연대는 남성과 남성의 연대다. <내부자들>에서 검사 조승우와 깡패 이병헌이 힘을 합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들이 맞서는 것은 <내부자들>의 정치인과 언론사 주필처럼 부패한 권력자들이다. 이 ‘남성 연대’의 목표는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응징함으로써, 개인적 복수는 물론 사회 정의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영화에서의 연대가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이 거창한 목표를 가진 적이 있었나? 여성영화의 주인공들을 억압하는 것은 사회 지배층이 아니다. 물론 <아가씨>의 이모부는 대저택을 소유한 자산가다. 하지만 그가 히데코를 통제하는 수단은 가부장의 권위이고, <미씽>의 지선을 괴롭히는 것은 전남편과 직장 상사의 권력이다. 싸움의 대상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폭력이라는 것이 ‘여성 연대’의 특징이다. 술 취한 가부장의 폭력이나, 생리휴가를 쓰는 동료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회사원같이 말이다. 이런 폭력에 맞서기 어렵다면, 그 이유는 오히려 그것이 거대하지 않아서, 그만큼 일상 곳곳에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미씽>은 마치 현실의 복사판 같다. 영화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여성들의 삶을 대변한다. 특히 <아가씨>는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이 가부장제의 억압을 통쾌하게 깨부수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허구적인 권력자를 창조하고 그것을 다시 깨부수는 대신, 그동안 스크린에서 배제되었던 여성의 현실에 주목한 것. 오직 여성영화만이 할 수 있는 공헌이었다.

지선은 한매의 손을 잡을 수 있었을까

<아가씨>와 <미씽>을 보았거나 줄거리를 읽어보았다면, 두 영화의 공통점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이 신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다. 한 편에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인 지배층과 한국인 중산층 한국인 여성이 있다. 다른 편에는 조선인 하녀와 조선족 이주 여성이 있다. 단 한 가지, 여성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슷한 설정에서 출발한 두 영화는 전혀 다른 결말을 맺는다.

<아가씨>의 두 커플은 힘을 합쳐 억압적인 남성들을 심판하고, 사랑을 성취한다. 최종적인 이 화합의 장이 마련되기 위해서, 차이들은 단순화되거나 무시되어야 한다. 히데코의 하얗게 분장한 피부와 숙희의 검게 탄 피부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계급 격차나 지식의 격차, 지위의 격차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둘만의 세상에 살고 있다. 여성이 경험하는 가부장제의 억압이 이렇게 극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까?

반면 <미씽>은 두 여성 간의 공감을 그리면서도, 둘 간의 차이를 외면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지선에게 있는 ‘언어’의 힘이, 한매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방송계에서 일하는 지선은 말과 글을 직업으로 삼는다. 반면 조선족인 한매는 더듬더듬 말하거나, 침묵한다. 아이를 잃고 절규하는 장면은 영화를 통틀어 그녀가 가장 크게 외치는 장면이지만 마찬가지로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지선은 한매를 이해하려 시도하지만, 결국 그녀는 지선이 내민 손을 뿌리친 채 죽음을 선택한다.

이 ‘개운하지 않은’ 결말은 관객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지선과 한매의 연대가 ‘실패’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점점 많은 한매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노예제의 부활을 본다. 그의 눈에 세계 곳곳에서 착취당하는 이주민들은 새로운 형태로 진화한 노예의 모습이다.4) 슬라보예 지젝, 2016, 자음과 모음, 『새로운 계급투쟁』, p.62 이주여성에게 가해지는 한국사회의 폭력은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광고문구에 요약되어 있다.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어느 국제결혼 홍보 현수막.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어느 국제결혼 홍보 현수막.

하지만 <미씽>은 연대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를 본 관객에게 <미씽>은 한매와 지선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지 묻는다. 모든 연대는 진정한 상호 이해 위에서 시작된다. 부끄럽지만 우리는 아직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한 것이다. 연대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한매를 사라지게 만든 우리 사회의 얼굴을 직시해야 한다. 또 한 번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면.

 

글/ 화영

편집/ 린

   [ + ]

1. 김숙현, 2016.12.30, 「여성 영화의 약진 그리고 숙제」, 『시사인』
2. 유지영, 2016.12.07, 「여성 감독이 현장서 만난 편견들, 영화 <미씽>이 됐다」, 『오마이스타』
3. 이세아, 2017.04.21., 「“지금 한국 영화계는 남자들의 독무대…여배우 설 자리 없다”」, 『여성신문』
4. 슬라보예 지젝, 2016, 자음과 모음, 『새로운 계급투쟁』, p.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