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이 글은 연세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연희관015B>에도 실린 글입니다.

고 이한빛 PD

고 이한빛 PD

고 이한빛 PD : 2016년 1월 CJ E&M PD로 입사해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을 맡게 되었다. 이 PD는 <혼술남녀> 드라마팀 제작환경 문제로 인해 고강도 노동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촬영팀 계약직을 정리해고 하는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또한, 부조리한 드라마 제작 구조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자 연출부 내에서 모욕과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 이 PD는 드라마가 종영한 지 다음날인 10월 26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방송국에서는 고인의 죽음에 대해 개인의 나약함을 탓했으나, 고인의 휴대폰 기록과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고인을 자살하게 만든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고인의 가족과 친구, <청년유니온>이 대책위원회를 만들었고, CJ E&M의 공식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였다. 기자회견과 1인 시위, 추모제 등을 통해서 2017년 6월 CJ E&M의 공식적 사과를 받아낼 수 있었다. 또한, 대책위의 요구안대로 사내 고인의 추도식을 진행하였으며,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 등을 약속하였다.

68혁명: 1968년 프랑스, 서독, 미국 등 서구사회 전반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전/반문화/반자본주의 운동을 말한다. 시위의 주된 동원 요인은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본질적으로 는 서구사회의 낡은 권위주의 질서에 항거한 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운동은 미국과 서유럽의 반전운동을 넘어, 마틴 루터킹 정신으로 대표되는 흑인 민권운동, 프라하의 봄, 멕시코의 학살, 체게바라 혁명과 볼리비아, 일본의 학생운동, 중국의 문화혁명 등을 아우르며 국제적으로 퍼졌다. 대학생, 노동자, 지식인 그룹을 중심으로 히피에서부터 마오주의자까지 다종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참여했으며, 반전·평화운동, 여성해방운동, 대학교육운동, 히피운동, 학교와 직장 내 반권위운동,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 운동,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성찰, 반문화/반문학 운동, 스쾃 운동 등 다양한 범주를 다루며 서구에서 사상적 신조류를 만들어냈다.

형제 관계는 츤데레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도 예외적이지는 않았다. 둘이 만나면 자주 ‘심혈을 기울여’ 서로에게 비판적인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도 밖에 나가면 각자의 공간에서 상대방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칭찬하고 성공하길 기도했다. 테스토스테론 가득한 전형적인 형제 관계였다. 사건이 정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채, 형에 대해 글을 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마감기한이 다 돼서야 깨달았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나의 경우 지나치게 낙관적인 글을 자주 쓰는데, 생전의 형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고인에게 주제넘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만약 이번 글도 형이 봤다면, 수준이 매우 낮다고 대판 까이고 엎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럴 가능성이 없기에, 어쩌면 고 이한빛 PD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을, 내 멋대로 형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고자 한다.

청년론

형은 ‘세대론’을 싫어했다. 형은 자신이 운영하는 웹진 <자하연 잠수함>에서 20대 대학생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세대론은 “각각의 조건(민족/종교/인종/연령/성별/지역)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넘기 위한 ‘피지배계급’(좌파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고 부르는) 간 연대(solidarity)의 기치를 중시하는 기존의 운동과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1)<자하연 잠수함> 5호, <같지만 다른 거부 그리고 싸움(2010)> 중라고 말했다.

웹진 의 블로그

웹진 <자하연잠수함>의 블로그

형은 전적으로 후자(기존의 계급운동)의 입장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기에, 전자(세대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동생인 나는 역시나 정반대였다. 윗글이 쓰였던 2010년, 나는 ‘청년’주거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민달팽이유니온> 창립에 참여했다. 그렇다보니 둘이 만나서 종종 활동 얘기를 하면, 형은 (자신이 보기에 한통속(?)인) <민달팽이유니온>과 <청년유니온>을 세트로 묶어서 청년 담론을 까곤 했다. (현재 두 단체는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기는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핵심 키워드는 ‘청년’이었고 주축이 되었던 단체는 <청년유니온>이었다.

사실 청년이라는 개념은 그 범주부터 모호하다. <청년유니온>에서는 만15세~39세를 청년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통계청에서는 29세까지를 청년으로 분류한다. 농활에 가면 50대~70대를 아우르는 ‘청년회’를 만날 수 있다. 범주부터 제각각인 ‘청년’에게서 과연 공통된 ‘문제’가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형이 <자하연 잠수함>에서 주장했듯이, 청년으로 묶이는 집단 내에서도 성별, 지역, 계급 등에 따라 문제의 지점은 판이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나이로 접근하는 청년의 이야기는 한계가 명확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청년’이 또다시 작은 변화를 이루어냈다. <tvN 신입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고 이한빛 PD의 문제를 ‘청년’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냈다. 시민들은 대책위가 풀어낸 이야기에 마음속 깊이 공감하며 싸움에 동참했고, 결국 CJ E&M의 사과를 받아낼 수 있었다. 대기업 CEO가 스스로 구조적 책임을 인정하고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해서 유가족에게 직접 사과를 한 경우는 이번이 최초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들을 추동 했는지 다시금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청년’을 통해 어떤 문제의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공명할 수 있으며, 현재 청년으로 칭해질 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이 형이 나에게 남기고 간 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책위는 SNS, 추모제 및 1인 시위 등을 통해 공론화를 불러왔다

대책위는  SNS, 추모제 , 1인 시위 등을 통해 공론화를 불러왔다

원래 그랬던 이 바닥을 향한 거부

이번 사건에 대한 평가의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이한빛 PD’를 ‘청년’이라는 주제로 풀어낸다면, 68혁명에서 그 의미를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68혁명의 의미는) 1968년 세대와 그 이후 세대들에게서 보이는 자의적이고 착취적인 권위에 대한 일반화된 무시, 즉 사람들을 무시하는 제도와 가치에 대한 존경심의 결여 및 그에 수반하는 인민의 권리에 대한 자각이었다.” – <1968년의 목소리> (로널드 프레이저 저) 중 –

형과 내가 통했던 부분 중의 하나가 68혁명이었다. 당연히 형이 먼저 관심을 가졌고, 후에 나에게 영향을 끼쳤다. 각자가 68혁명을 해석하는 방식은 달랐겠지만, 형은 글과 영상을 통해 68년을 풀어내고자 했고, 나는 나의 활동 영역에서 68혁명의 가치를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우리 집 서재는 그렇게 68혁명과 관련된 책으로 채워졌다.

1968년, 대학생들은 거침없이 거리로 뛰어나왔다. 민권운동, 베트남전쟁, 대학민주주의 등 다양한 의제가 혼재되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기존 서구사회의 권위적인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풍요의 미명으로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문화가 용인되었고, 거시적 시스템은 잔혹한 전쟁을 일으키고 민주주의 질서를 헤집고 있지만, 개인은 그저 나약하게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대전을 겪은 기성세대들은 ‘이 정도’의 폭력은 견딜 수 있다며 변화를 거부하고 순응할 것을 강요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지 않은가) 하지만 전후세대에게는 ‘당연함’을 거부할 수 있는 감수성이 있었다. 그들은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뭉치기 시작했다. 68혁명이 비록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당시의 청년들이 스스로 무엇을 거부하고 또 무엇을 원하는지 선택하고 외칠 수 있었기에 여성, 환경,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운동이 확장되고 변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68년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번 사건과 닮은꼴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바닥은 원래 그렇다”를 외치던 방송업계는 한류 열풍의 호황 뒤편에서 계약직 정리해고를 당연하게 자행하고 카메라 뒤의 폭력을 용인했다. 비단 방송업계 뿐 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 청년들을 잔인하게 내몰았다. 한 대기업에서는 내부의 부조리가 지적당하자 고발자를 색출하기 위해 직원들의 개인 카톡을 검열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카페에서는 알바생이 작업을 하다가 다쳐서 산재신청을 하겠다고 카페 주인을 찾아갔지만, 유난을 떠는 인간으로 치부되었다고 한다. 임원들의 경조사에 ‘예쁘고 젊은’ 여직원들을 성접대를 연상하는 수준으로 일을 시키는 것은 다반사라고 한다. 기성세대는 성폭력, 인격모독, 언어폭력 등 기존의 한국 사회가 고질적으로 유지해온 특수한 구조와 문화(요즘은 적폐라고들 부른다)를 청년 세대에게 강요했다.

사건 이후 드라마 제작 환경의 노동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국회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사건 이후 드라마 제작 환경의 노동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국회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자각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개념이 있다. 한 번의 비극이 있기 전에, 1:29:300의 비율로 관련된 작은 사고와 징후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수많은 아픔과 징후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이를 위로한답시고 소설, 드라마, 영화에서는 청춘을 위로하고 청년이 주인공이 되는 작품이 즐비하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청춘들을 갈아오며 유지 되었던 이 공동체는, 징후를 묵살하였고 결국 누군가의 소중한 생명을 희생시켰다. 기존의 사회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겨우 두 가지뿐이었다. 저항하다가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도태되거나 헤게모니를 체화시키고 기성세대가 원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 형은 이러한 두 가지 선택지에 모두에 환멸을 느꼈고, 제3의 길, 새로운 관계를 만들며 극복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 사회의 압력에 맞서기란 불가능했다. “너만 잘났어?”, “드라마 판에 발 못 붙이게 할 거야” 등의 모욕이 가해지기도 했다. 결국, 제3의 선택은 작년 10월까지는 비극의 결과만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수 있는 희망을 보았다. 지난 250일은 체제의 한계를 경험하고 마냥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고립과 결핍을 극복할 수 있음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고 이한빛 PD의 고민과 노력은 청년들로 하여금 각자의 삶을 돌아봄과 동시에, 더는 눈치만 보고 있지 않게 만들었다. CJ E&M 내부구성원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추모 배지를 달고 다녔고, 현장에서는 기존의 관행에 대한 문제제기가 쏟아졌다고 한다. 대책위에도 9,000건이 넘는 서명, 160건이 넘는 제보, 본사 앞 거리를 가득 메운 추모제 참가인원 등 수많은 힘이 계속해서 모이고 또 모였다. 이러한 전향적인 변화는 ‘청년’이라는 키워드가 한국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냈다. ‘청년의 문제’라는 조명을 통해 시대의 갈망을 다양하게 비추어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같은 공간, 같은 역사를 경험하며 자라온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수성과 문화는 자신에게 필요한 ‘이상(理想)’의 모습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거창하게 말하면 새로운 상상이란 기존 세대의 체계를 뒤집을 ‘가능성’일 수도 있고, 의식구조에 기반을 두는 ‘시대정신’일 수도 있겠다. 오랜 기간 기존의 질서와 타협해서 살아왔던 사람들은 쉽게 넘을 수 없는 영역이지만, 감히 ‘청년’이라고 묶을 수 있는 집단은 삶에 대한 간절함으로 극복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청년들은 그렇게 뭉치기 시작하며 조금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중요한 제안을 하는 사회 변화의 직접적인 동력으로 거듭날 수 있다.

기존의 제도와 가치가 절대 옳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자각’ 이것이 형을 통해 우리 사회가, 그리고 청년들이 깨닫게 된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CJ E&M은 홈페이지에 공식 사과문을 올렸다

CJ E&M은 홈페이지에 공식 사과문을 올렸다

당부와 바람

주제넘게 당부 혹은 나와의 약속을 해본다. 단순히 감수성이 존재한다고만 해서 사회가 마냥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주도권을 쥔 집단을 따라 그 사회의 의식과 체계가 결정되었다. (지금은 ‘혼술’이란 단어조차 싫지만, 그래도 형이 직접 찍었던, 그래서 내가 세 번씩 돌려보았던) <혼술남녀>에는 이런 멘트가 나온다.

“나는 혼자 마신다. 혼자 마시다 보면, 오늘 하루 힘겹게 눌러놓았던 감정들이 술과 함께 차오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린 왜 이렇게까지 돼버렸을까? 답을 낼 수 없는 질문들을 하다가도, 이내 그냥 내 앞의 진실임을, 내 앞에 놓인 현실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 진실이 그 현실이 나에게 주어진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 버리기에는 내 사랑이 지금껏 키워온 이 마음이 너무나 가엽다. 그래서 오늘 마시는 이 술은 용기가 필요해서 마시는 술이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용기.” – 드라마 <혼술남녀> 중

돌이켜보면, 우리는 현실과 맞서는 용기를 가지고 싶었고, 우리가 희망하는 대안적 공동체 속의 삶을 존중받고 싶었지만, 함께 할 동료가 없어 외로웠다. 그동안 빈자리를 그나마 술이 채워주었기에 <혼술남녀>가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옆자리를 술에게만 내주지는 말자. 혼술은 결국 카메라 뒤의 고민을 혼자 하게끔 했지만,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진정으로 당신을 위로해냈다. 외롭게 홀로 있지 말고 모여야 한다. 우리 주변 곳곳에는 당신의 호소를 존중하고, 자신의 공간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제로 모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작년 10월의 CJ에는 노조가 없었기에 죽음이 외면받았고, 올해 6월은 사람들이 모였기에 CJ가 사과했다. 물론 희망보다는 좌절의 경험이 많기에, 선뜻 청년들이 주도권을 잡는 싸움을 위해 뭉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결국 고 이한빛 PD가 청년들과 함께 CJ E&M을 이겨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분명한 승리의 사례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조금은 달라질 수 있고,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다고, 과감히 말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시 당부 아닌 당부를 해본다. 이제는 결핍과 좌절로 인해 홀로 포기하지 말자. 외로움을 사람들과 함께 극복하자.

처음에 던진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다. 청년들이 공명할 수 있는 공통점이란 바로, 사람과 꿈을 갈아가며 운영되고 있는 시스템을 자각하고 거부해내는 감수성이다. 그리고 다른 세상을 그리며 뭉치는 가능성이다. 물론 사회·경제·문화적 구조로 인한 불안감이 청년들을 흩어놓았기에, 함께 모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라는 외침은 낭만적인 메아리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헤게모니에 저항하며 조직을 만들고 대안을 찾아 싸운다는 것은 그리 처절하지도 혹은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세상에 대해 때 묻지 않은 애정을 아직 간직하고 있고, 그 힘은 외로움이 극복됨으로써 더욱 신선한 동력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은 2011년 서울대 본관 점거라는 치열한 싸움에서, 형은 68년의 ‘우드스톡2)1969년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약 3일 반나절 동안 뉴욕 북부의 베델 평원에서 대규모 페스티벌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 페어(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이하 ‘우드스탁 페스티벌’)가 열린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단지 음악뿐 아니라, 행위 예술, 서커스, 마술 등 다양한 예술 행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우드스탁 4인으로 불리는 존 로버츠(John Roberts), 조엘 로젠먼(Joel Rosenman), 마이클 랭(Michael Lang), 그리고 아티 콘펠트(Artie Kornfeld)가 자유, 사랑, 평화를 기리는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한 곳에 모여 문화 예술 전반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행사를 기획한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슬로건이 3일간의 평화와 음악(3 Days Of Peace And Music)인 것은 이러한 맥락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드스탁 [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 60년대 록 문화의 정점 (팝 음악)’을 본 따 ‘본부스탁’이라는 축제의 판을 벌였다. 거대한 벽과 싸우는 투쟁에서, 대학생들 스스로가 새로운 방식의 긍정을 계속해서 찾아냈던 것이다.

2011년 6월 17~18일 서울대에서 개최되었던 '본부스탁'의 포스터

2011년 6월 17~18일 서울대에서 개최되었던 ‘본부스탁’의 포스터

또한, 이미 많은 청년들도 노동, 주거, 문화, 젠더 등 다양한 영역에서 기존의 폐쇄적인 가치를 전복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실현해냈다.3)<민달팽이 유니온>에서는 ‘스쾃(squat) 운동’을 모티브로 <친절한 미분양> 프로젝트를 벌여서 청년 주거문제를 한층 더 이슈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한국 최초로 협동조합 주택의 개념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껏 부족했던 공간은 형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청년들의 목소리가 채워주고 있고, 앞으로도 채울 것이다. 나는 치열하면서도 반짝이게 살았던 형의 이야기를 함께 외치며 살아갈 수 있기에,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내일은 청년들이 같은 편이 되어서 함께 결핍을 채워나갔으면 좋겠다. 방송업계가 카메라 뒤에서부터 따뜻한 위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이 청년을 존중하고 우리의 노동과 문화를 존중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변화의 초석으로서, 고 이한빛 PD가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글/ 이한솔

편집/ 린

   [ + ]

1. <자하연 잠수함> 5호, <같지만 다른 거부 그리고 싸움(2010)> 중
2. 1969년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약 3일 반나절 동안 뉴욕 북부의 베델 평원에서 대규모 페스티벌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 페어(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이하 ‘우드스탁 페스티벌’)가 열린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단지 음악뿐 아니라, 행위 예술, 서커스, 마술 등 다양한 예술 행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우드스탁 4인으로 불리는 존 로버츠(John Roberts), 조엘 로젠먼(Joel Rosenman), 마이클 랭(Michael Lang), 그리고 아티 콘펠트(Artie Kornfeld)가 자유, 사랑, 평화를 기리는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한 곳에 모여 문화 예술 전반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행사를 기획한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슬로건이 3일간의 평화와 음악(3 Days Of Peace And Music)인 것은 이러한 맥락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드스탁 [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 60년대 록 문화의 정점 (팝 음악
3. <민달팽이 유니온>에서는 ‘스쾃(squat) 운동’을 모티브로 <친절한 미분양> 프로젝트를 벌여서 청년 주거문제를 한층 더 이슈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한국 최초로 협동조합 주택의 개념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