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 페스티벌, 음악에다가 축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두 가지를 합쳐 놓은 곳임에도 나는 지금껏 가 본 적이 없었다. 돈이 없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막연한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나랑 음악 취향이 비슷한 친구가 없어 혼자 가야 한다는 것과 더불어, 여성 혼자 놀려고 하면 으레 생기기 마련인 불편한 일들이 떠올랐다. 주변에서 뮤직 페스티벌에 갔다 성폭력을 경험했거나, 시선 때문에 불쾌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것도 한 몫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라x뮤직 페스티벌’의 취재 요청을 받고 어떤 행사인지 살펴보다가 홍보 문구를 보았다.

'보라x뮤직 페스티벌'의 포스터, 두 가지 버전이 있었다

‘보라x뮤직 페스티벌’의 포스터

‘몰카·성추행·시선강간 없는 안전함 속에서 여성 뮤지션들과 여성 관객들이 만드는 여성 뮤직 페스티벌’이라는 말과 함께, 혼자 와도, 비건이어도, 뮤직 페스티벌은 처음이어도 누구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될 거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이름의 ‘보라x’는 성평등의 상징 색깔 보라와 뮤직 페스티벌의 크로스, 성평등을 바라는 미지의 누군가, 성적으로 불쾌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지양한다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쭉 읽고 나니 ‘이곳이라면 좀 더 안심하고 가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첫 뮤직 페스티벌은 보라x뮤직 페스티벌이 되었다.

어디에서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나

“저는 친구랑 같이 펜타포트, 지산 같은 큰 뮤직 페스티벌에도 가 봤는데요. 여기서 지양하는 시선폭력 같은 것들을 그런 데서는 정말 자주 경험하게 돼요.”

– 일반참가자 김유리 씨

공연장 입구에는 이렇게 '비폭력규칙'이 걸려 있었다

공연장 입구에는 이렇게 ‘비폭력규칙’이 걸려 있었다

페스티벌이 열린 홍대 웨스트브릿지 도착해 설레는 표정으로 공연을 기다리는 참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처럼 뮤직 페스티벌은 처음 와 본 사람들도 있었고,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뮤직 페스티벌까지 다양한 곳에 가 본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들은 모두 ‘뮤직 페스티벌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나만 괜히 겁 먹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이유를 물어보자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뮤직 페스티벌에서 남성들이 자꾸 ‘놀자’며 끈질기게 따라와 화도 나고 무서웠다는 이야기, 자꾸만 온 몸을 훑어보는 시선에 불쾌했다는 이야기, ‘여자가 왜 이렇게 많냐?’며 여성 참가자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들어 기분이 나빴다는 이야기까지. 즐거울 거라고만 생각했던 페스티벌에서 불쾌한 일들이 이렇게나 많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긴 다 여성으로 정체화하신 분들 밖에 없으니까 마음이 편해요.”

– 부스참가자 새벽 씨

이 페스티벌은 '자발적/강제적 여성'만 입장할 수 있었다

이 페스티벌은 ‘자발적/강제적 여성’만 입장할 수 있었다

‘마음이 더 가볍다’는 말을 하는 참가자도 많았다. 나도 그들의 마음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집에서 이곳까지 오며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느꼈던 불쾌한 시선들을 생각했다. 한참을 내 몸에, 혹은 얼굴에 머물다 떠나가는 시선들에 기분이 나빠도, 쉽게 항의조차 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뮤직 페스티벌이라면 모두가 좀 더 마음을 놓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어야 할 테지만, 결국은 그곳도 현실의 연장선이었다. 하지만 보라x뮤직 페스티벌의 현장에서는 많은 참가자가 그런 현실에서 약간이나마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였다. ‘여성’ 페스티벌이 왜 필요한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놀이문화 속에서 많은 성차별이나 성폭력이 발생해요. 이제는 여성주의적 놀이문화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 현장 스태프 민주 씨

보라x뮤직페스티벌에서 제작했던 스티커

보라x뮤직페스티벌에서 제작했던 스티커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의 목소리로

나는 여성 뮤지션을 좋아한다. 플레이리스트 대부분이 여성 뮤지션들의 음악으로 차 있다. 하지만, 왜 내가 여성 뮤지션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여러 여성 뮤지션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음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느끼게 되었다.

“내가 나의 새끼를 가질 권리는 내게 있어,

나의 생리를 말할 권리는 내게 있어“

– 슬릭, ‘이건 내꺼야’ 중

슬릭 씨는 등장하자마자 관객들의 엄청난 환호성을 불러 일으켰다

슬릭는 등장하자마자 관객들의 엄청난 환호성을 불러 일으켰다

슬릭, 최삼 씨와 같은 힙합 가수들은 요즘 힙합 문화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한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힙합이 정말 좋고, 자주 듣는데 진짜 빻은 가사가 많아.”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힙합 가수 00이 여성혐오 논란에 휩싸여’라는 기사를 접하면서, 나는 한국 힙합 전체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힙합 노래가 좋아서 듣다가, 가수에 대해 찾아봤는데 언더그라운드 시절에 여성혐오에 찌든 노래를 여러 곡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충격에 빠진 적도 있었다.

“참 잘해 포장

없는데 있는 척 김치녀의 젖보다”

– 블랙넛 &씨잼 & 천재노창, ‘Indigo Child’ 중

 

“Baby Baby 넌 고딩때부터 달랐어

열아홉였을때두 엉덩인 꽤 두꺼워

B약간 넘는 가슴 난 그걸 손에 쥐지두”

– 창모, ‘소녀’ 중

힙합을 잘 듣지 않게 된 건 이때 이후인 것 같다. 그러다 이번 공연을 보고 느꼈다. 힙합을 통해 이렇게 멋진 방식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 놓을 수 있구나.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여성 뮤지션들의 노래를 계속 들으면서, 중간중간 잊지 않게 제목을 메모해 두기도 했다. 그만큼 하나같이 노래가 좋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며 신나게 뛰어 놀고 있었다. 뮤지션들은 모두 다 감동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반응이 열정적인 공연은 처음 와서 얼떨떨하네요.”

시와 씨는 관객들의 호응에 감동해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시와는 관객들의 호응에 감동해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 뮤지션들의 상황이 밝지만은 않다. 한국의 대중 문화가 전반적으로 그렇듯이, 대중음악 분야 역시 남성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여성 뮤지션 자체가 많지 않고, 어쩌다 성공하는 뮤지션도 쉽게 여성혐오와 성폭력에 노출된다. 네이버 검색창에 유명한 여성 뮤지션의 이름을 넣어 보면, 대부분의 경우 ‘노출’, ‘몸매’ 등이 자동완성으로 뜬다. <핀치>에서 2017년 13년 동안 한국대중음악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된 뮤지션들을 분석한 결과, 남성이 73%를 차지했다는 결과도 있다.1)핀치, 한국대중음악상에서 ‘대중’과 ‘다양성’을 묻는다, http://thepin.ch/entertainment/mxf1yx/gender-difference-in-handaeum 공연장에서 마주한 수많은 여성 관객의 환호와 여성 뮤지션들의 감동 어린 표정을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Feminism saves us' 초커를 옷에 달고 등장한 최삼 씨

‘Feminism saves us’ 초커를 옷에 달고 등장한 최삼

젠더 이분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성평등을 지향하는 페스티벌이기에, 만난 사람들에게 ‘성평등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빼놓지 않고 물어봤다. 그들 중 많은 수가 한참 고민하다가, ‘젠더 이분법의 해체가 필요하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 페스티벌이 내세운 ‘여성들만의 축제’라는 표어가 어쩌면 젠더 이분법을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 처음 포스터를 봤을 때부터 스쳐간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여성만' 입장할 것을 강조한다

입구에서부터 ‘여성만’ 입장할 것을 강조한다

보라x뮤직 페스티벌 기획단은 티켓을 판매하며, 법적 성별이 남성인 티켓 구매자에게는 성명, 생년월일, 연락처를 기입하고 ’저는 여성이며 여성(or논바이너리)으로 정체화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쓸 것을 요구해 논란이 있었다. 이후 기획단은 ’악의를 가진 ‘남성’들의 출입을 제한하려던 과정에서 고안한 이 서식이 얼마나 차별적인지 인지하지 못했다‘고 사과하고, 퀴어여성네트워크의 자문을 받아 관객 전원에게 ’반차별 비폭력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대안을 마련했다. 2)사과문 링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ra-x&logNo=221097658807&categoryNo=0&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ge=4&postListTopCurrentPage=1&from=postView&userTopListOpen=true&userTopListCount=5&userTopListManageOpen=false&userTopListCurrentPage=4

페스티벌 기획단에서 올린 공식 사과문

페스티벌 기획단에서 올린 공식 사과문

법적 성별이 여성인 사람만 받아들이는 페스티벌이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모두 여/남이라는 두 개의 성별로만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즉 젠더 이분법은 불평등의 근원이다. 이는 수많은 사람을 배제하고, 동시에 여성과 남성에게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는다던 페스티벌이 이러한 문제점을 처음부터 깨닫지 못한 것은 아쉽다.

가을밤은 끝나지 않았어

페미니스트 풍물패 '페악질'의 공연, 모두가 흥에 취했다!

페미니스트 풍물패 ‘페악질’의 공연, 모두가 흥에 취했다!

공연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축제가 끝난 후에 여성들은 다시 폭력과 차별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수많은 일상적 공간에서, 그리고 좀 더 행복해져야 할 축제에서도 여성들은 끊임없이 여성혐오를 마주한다. 이러한 현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여성들만의 축제가 여성들에게 더 큰 자유를 선물해 준 것은 맞지만, 그 자유가 오늘 하루에 그친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결국, ‘여성들만의 축제’가 여성들이 삶 속에서 겪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홀가분하던 마음이 어느새 점점 무거워졌다. 이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구나. ‘신나게 쿵쾅쿵쾅’ 하던 시간이 꿈만 같았다. 허전해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 오늘 라이브로 들었던 여성 뮤지션들의 음악을 재생했다. 그러자 문득 느껴졌다. 그래도 오늘 정말 큰 위로를 받았구나. 차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에, 그래서 우리 모두 노래하고 뛰어놀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그래, 내일이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해도 뭐 어때, 오늘은 이렇게 열심히 놀았잖아.

“모르겠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대로 하자

어차피 완벽히는 할 수 없으니 요만큼만

뻥튀기는 하지말자 그냥 나의 몸집대로

아는 만큼만 말하고 모르는 건 배우면 되지“

– 오지은, ‘행복론’ 중

 

'행복론'을 부르는 오지은 씨

‘행복론’을 부르는 오지은

글 및 편집 / 린

사진 / 린, 송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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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핀치, 한국대중음악상에서 ‘대중’과 ‘다양성’을 묻는다, http://thepin.ch/entertainment/mxf1yx/gender-difference-in-handaeum
2. 사과문 링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ra-x&logNo=221097658807&categoryNo=0&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ge=4&postListTopCurrentPage=1&from=postView&userTopListOpen=true&userTopListCount=5&userTopListManageOpen=false&userTopListCurrentPage=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