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안 온다. 개강이 1주일도 안 남았는데 빨리 자는 건 방학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스마트폰을 킨다. 자연스레 아프리카를 켠다. 즐겨찾기엔 나이스게임tv, jtbc, 소닉, 김택용, 박성균 등이 있다.

이 쯤되면 감이 온다. 그래, 나 아직까지 스덕이다. 그래서 홍진호도 좋고 임요환도 좋고 김가연도 좋다. 심지어 해설 못한다고 욕먹을 때의 강존야(강민)도 난 좋았다. 아니, 쉴드쳤다. ‘니들이 뭔데 레전드에 대한 존중도 없이 쌍욕을 하냐고, 기다려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속으로 말이다.

99PKO부터 2014년 스타크래프트2 프로리그까지의 리그의 역사를 스덕으로서 재조명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는 포부일 뿐이고 내 자아에 남아있는 스타리그들을 연대기순으로 간략하게 써볼까 싶다. 오늘은 그 연재의 축포를 알리기 위해 스타리그와 나의 추억을 풀어보고 싶다.

 

월드컵 있었던 2002년 말구요, 스타리그 처음 봤던 2002년이요.

 

때는 2002년. 많은 이들에게 월드컵과 오노 사건 그리고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고로 기억되는 그 해에 나는 스타리그를 처음 접했다. 아니, 알고 있었던 건 꽤 오래 됐다. SBS에 방영된 PKO(프로게이머오픈)가 내 뇌리에 남아있는 걸 보니 분명 예전부터 알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보게 된 건 2002 SKY 스타리그부터였다.

 

왐마…. 사진 = 중계 방송 중 캡쳐

집안 사정으로 인해 이사를 하게 된 나에게, 친구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게임과 운동. 두 가지 중에 난 게임에 꽤나 집중했던 거 같다. 초등학교 5학년이 게임을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냐마는, 온게임넷에 나오는 선수들을 따라해보니 학교에서 ‘게임 좀 한다’식의 소리는 많이 들었었다.

그 빌드란 것도 꽤나 조악했다. 나는 테란이었고, 프로토스 상대하려면 입구막고 탱크 뽑기, 저그 상대하려면 투배럭으로 저그 앞마당 뚫기, 테란 상대할 때는 온리벌쳐로 승부보는 뻔한 빌드였다. 그래도 저런 빌드를 나름 정립해서 쓰다보니 반이 아니라 학교에서 스타 잘하는 애로 취급받았고, 그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스타리그에 더 집중했던 거 같다(….).

 

겜밖에 모르는 바보형(…)

많은 스덕들이 그랬을 거라 믿는데, 스타리그 입문은 임빠(임요환 빠돌이)로 시작했다. 지금은 그저 김가연에게 업혀서 거실로 나오는 머리 큰 어른아이지만, 그 때의 ‘그분’은 분명 달랐다. 뽀송뽀송한 피부, 꽤나 큰 키, 미소년틱한 외모, 무엇보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남다른 포스를 내뿜었다. 심지어 압도적인 실력이 화려함을 기반했기에 그 포스는 더했다.

김가연과의 만남은 그를 진짜 황제로 만들어줬다.

좋은 반대 예시로 김정민이 있는데, 김정민은 정말 잘했음에도 단단하게 잘해서 큰 인기는 없었다. 그니까 LOL 게임단 삼성 갤럭시 화이트가 너무 기계처럼 잘해서 실력에 비해 팬덤이 작은 것처럼 말이다.

특히 임요환의 전성기는 2000~2002년에 집중되어 있는데, 2002 스카이 스타리그는 그 전성기가 농익을 무렵이다. 얼마나 전성기였냐면 결승전까지 전승으로 올라갔을 수준이다 (결승은 1:3으로 패배해서 최고승률 준우승 – 전승준우승-을 이루었다).

 

당시 결승전 오프닝 :

2002 스카이 스타리그는 임빠에게는 전승준우승으로, 비임빠(그 시절에는 임빠이거나 임까이거나였다. 사실상 임빠가 임까니깐 모두가 임빠이자 임까이던 시절이다)들에게는 ‘영웅의 탄생’으로 기억된다. 어른들은 ‘그깟 게임놀이에 영웅이 뭐냐 오글거리게’ 라고들 말하지만, 대통령을 반인반신으로 몰아가는 세상을 감안하면 특이한 일도 아니지 싶다.

어쨌거나 그 영웅의 이름은 이름부터 반듯한 ‘박정석’이었다. 스타리그 진출자 16명 중의 프로토스는 2명. 심지어 그 1명은 16강 조별예선 때 광탈. 그리고 남은 1명이 박정석이었다. 박정석의 결승행은 임요환의 그것과 달리 꽤나 거칠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누군가에겐 천적, 누군가에겐 X밥이었다.

손학규의 기묘한 모험처럼 박정석의 결승행은 정말 기기묘묘했는데, 프로토스의 천적인 저그 2명과 재경기 끝에 8강 진출, 4강에서는 16강에서 만난 홍진호와 다시 만나 3:2로 신승했다. 그리고 결승에선 ‘그 분’을 가두고 패서 3:1로 우승했다. 글로만 쳐도 꽤나 극적인데,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나로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우승엔 박정석의 실력도 실력인데, 당시 임요환은 토막(토스전 막장) 중에 토막이라서 그랬던 것도 있다(테란의 황제다 뭐다 해도 결국 토막이었다). 그리고 박정석의 이 결승행은 프로토스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양대리그(온게임넷 – MBC GAME) 동시 결승 진출이었다.

이 순둥이는 나중에

이 등짝이 됩니다. 옆은 콩요섭(근데 지금봐도 박정석은 느므 훈남이야….)

경기 내용 역시 극적이다. 지금 표현하자면 드라마 대 드라마라고 불릴 만큼 극적이다. 임요환이 화려함과 쫄깃함으로 무장된 그린그래스식(본 시리즈) 액션영화라면 박정석은 묵직하게 버티고 한 방으로 승부하는 킹덤 오브 헤븐식 액션영화였다.

‘한방러쉬’, ‘무당스톰’으로 대표되는 박정석의 스타일은 마지막 경기 역시 묵직하고 웅장하게 마무리했다. 당시 임요환과 박정석의 승부가 갈린 4경기 맵은 ‘네오 포비든 존’이라는 반섬맵이었는데 박정석 트레이드 마크인 ‘무당스톰'(무당만큼 사이오닉 스톰을 잘 맞춘다는 의미)을 보여주며 GG를 받아냈다. 아 곱상한 임요환의 외모와 선굵은 박정석의 외모가 대비되는 건 보너스다.

그렇게 박정석이라는 새로운 캐릭터의 탄생을 알리며 종결된 2002 스카이 스타리그의 뒤는 파나소닉 스타리그가 이었다. 그리고 파나소닉 스타리그는 임요환을 잇는 새로운 본좌의 탄생을 알렸다.

 

“축구에 펠-마-호-지(펠레 – 마라도나 – 호나우두 – 지단)가 있으면 스타리그엔 임-이-최-주작이 있도다”

이 격언의 임요환 다음 인물인 ‘이’, 이윤열이 탄생하게 된 스타리그가 파나소닉 스타리그다. 사실 이윤열은 MBC GAME의 전신인 겜비씨에서 3회 연속 우승을 달성할 정도의 거물이었지만 온게임넷에선 파나소닉 스타리그가 첫데뷔였다. 첫 대회 출전에 우승까지 차지했을 정도니 정말 큰 거물이었다.

이윤열은 원조 미친고딩이었다.

이 우승은 양대리그 동시우승이었는데, 곧이어 겜TV 스타리그까지 석권하며 전무후무한 그랜드슬램까지 달성하고야 말았다. 스친소에 나와서 기계춤이라는 새로운 ‘관문’을 만들던 그런 멀대만 좋은 애, 지니어스에 나와서 홍진호에게 도움은 커녕 짐만 된 그 애가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면서 스타리그를 정복한 이 사람이다.

형 근데 지니어스에선 왜그러셨어요….또륵

이때 준우승자인 조용호는 겜비씨에서도 이윤열에게 패배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때 전대회 우승자인 박정석은 어김없이 ‘우승자 징크스’의 희생양이 되면서 16강에 탈락했다. 홍진호는 3위로 입상했으며 후에 홍진호, 조용호와 함께 ‘조진락’ 3대 저그로 불리는 박경락은 4위를 차지했다. 우리의 ‘그분’은 광탈했다.

둘은 꽤 자주 만났다.

결승전은 3:0으로 원사이드하게 끝났는데, 지금 기억에 남는 건 1경기다. 보통 테란의 대 저그전은 바이오닉(마린, 메딕)위주인데 당시 이윤열은 메카닉(골리앗)위주였다. 지금에야 멀티 먹고 드랍이나 다크스웜, 울트라 등등 여러가지 해법이 나왔지만 당시만 해도 골리앗엔 뮤탈리스크 저글링이 정답이었던 시절이다.

체력이 높은 뮤탈리스크가 먼저 들어가고 저글링이 후진입하는 전술이 최선이었는데 경기에 떨렸는지 조용호는 저글링이 먼저 들어가고 뮤탈리스크가 뒤에 들어가는 최악의 수를 두었다. 그 전투가 일어났던 곳도 넓은 개활지가 아닌 좁은 다리여서 근접유닛인 저글링이 제대로 공격을 펼치지도 못하고 죽었다. 1경기의 여파가 컸는지 2, 3경기 역시 무난하게 발렸다. 불과 1달 전 겜비씨 KPGA 4차 대회에선 3:2로 펠레스코어가 나왔는데, 1달 만에 3:0 스윕이 나와버렸다.

사대천황.jpg

개인적으로 이윤열이 임요환의 위엄을 압도할 정도로 너무나 잘해서 미웠다. 원래 빠라는 게 그렇지만, 임요환 정도 선수의(전성기 페이커, 전성기 BLAZE & FROST, 전성기 매드라이프 합쳐야 임요환의 입지, 인기가 될까말까라고 본다. 다음 카페의 전성기일 지라도 몇 십만명 팬카페 회원수는 절대 얻기 쉽지 않다) 빠라면 그 미움이 정말 상상을 못할 규모다. 어쨌거나 나에겐 내 ‘그 분’이 탈락해서 그저 그런 리그였다.

그리고 다음 리그는 많은 스타리그 올드팬들에게 최고의 결승전으로 꼽히는, 우리의 ‘콩’이 대인배로 거듭나고 ‘엄마 사랑해요’라며 눈물을 흘린 서딸딸이 탄생하게 되는 올림푸스 스타리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