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엔 나도 왜 샀는지 이해가 안가는 민트 색 마스카라를 바르고, 일본 여행에서 득템한 새빨간 통굽 구두를 신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데일리로는 절대 못 쓰는 라벤더 색과 연보라 색 쉐도우도 발랐다. 집을 나서려는 찰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친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발 상태도 안 좋은 애가 무슨 구두야. 후회하지 말고 운동화 신고 가라.” 걱정에 한 말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살짝 얄궂은 표정을 지으며

“후회하면 어때. 오늘은 (퀴어) 축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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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축제도 아니고 퀴어 문화 축제였다. 더군다나 나는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퀴어 축제 참여가 처음이었다. 나름 독특한 치장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웬걸, 시청역에서 광장으로 올라가기도 전에 정석 고스로리1)고딕 로리타(Gothic Lolita, 줄여서 고스로리)는 본래 다른 요소인 고딕풍과 로리타 패션의 요소를 묶은 일본의 패션 스타일 또는 그러한 하위 문화를 말한다.룩을 하신 분을 보고 기가 죽었다.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평소 거리를 걸을 때 거의 볼 수 없는 모습을 한 사람들이 잔뜩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두근거림이 아닌 묘한 흥분이 느껴지고, 이렇게 희소하고 특이한 치장을 한 사람들이 많은데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녹아드는 것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재미있는 착장(?)을 하고 와도 좋았을 걸.’ 질투심과 아쉬움이 조금씩 섞인 독백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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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 문화 축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람들도, 참여한 부스들도 다들 나름의 ‘퀴어함’을 뿜뿜 발산하고 있었다. 얼마 전 지인이 “퀴어가 정확히 무슨 의미야?”라고 물었을 때 나는 어버버 하고 잘 대답하지 못했었다. 게이, 레즈비언과 같은 성소수자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인 건 어렴풋이 알겠는데, 각 잡고 설명해 주자니 아는 게 없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잘 알겠지 생각한 건 나만의 큰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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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담론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되었던….기념비적 질문…광광 우럭우럭…)

 그렇게 완전 백지는 아니지만 반 백지(?) 상태에서 참여한 퀴어 축제는 퀴퍼 초짜 오브 초짜인 내게 ‘퀴어함’ 이 무엇인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의미 있는 몇 가지 의문을 던져주었다. 그 의문들에 스스로 답을 찾음과 동시에 축제니까, 아무 생각 없이 즐기기도 했다.2)사실상 생각 없이 즐김 8할과 나름 진지한 고찰 2할의 불균등한 콜라보.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퀴어(Queer)가 도대체 뭔데?”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퀴어 잘알(?)이 아니다. 퀴어 하면 게이, 레즈비언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광장에서 마주친 퀴어의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했다. 참여한 부스들에선 호모섹슈얼리티에 관한 이야기를 당연히 하고 있었지만, 그것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기억나는 부스가 있다면 행성인3)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약칭 행성인, Solidarity for LGBT Human Rights of Korea)는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단체다. 1997년 9월 9일 학생 성 소수자 인권 단체인 ‘가칭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 건설준비위원회’가 발족하고 1997년 11월 2일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으로 정식 출범했다., 여행자4)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임, 여행자, 조각보5)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등이 있는데, LGBT(Q)로 자주 설명하는 퀴어 담론에서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 여러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개인의 성적 지향성, 로맨스 지향성, 혹은 스스로를 어떻게 정체화 하느냐에 따라 성소수자의 가지는 셀 수 없이 뻗어가고, 이는 사회가 설정한 젠더이분법 범주를 진즉에 뛰어넘은 것이었다. 설명을 듣고 있자니 새삼 내가 이해해왔던 ‘퀴어’는 매우 편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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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알못이었던 내 눈엔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모습을 한 사람들도 신기해보였다. 단지 평소에 잘 보지 못한 옷들을 입고 있어서 신기한 것이 아니라, 퀴어 축제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복장에 관한 자유가 연결되는 맥락이 꽤 넓게 퀴어 축제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퀴어 축제가 열릴 때마다 이를 반대하는 측에서 내세우는 근거 레퍼토리 중 하나가 ‘불순한’, ‘비도덕적인’, ‘음란한’ 복장을 하여 사람들의 눈을 찌푸리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대한민국의 미래! (어이쿠!) 인 청소년들에게 부적절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도. 하지만 그들이 설정한 적절치 못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퀴어 퍼레이드에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사실 잘 모르겠다. 일단 그 기준이 뭔지를 알아야 대답을 하지… 퀴어 축제에서 사람들은 그저 자신을 자신답게 가장 잘 표현하는 복장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입기를 선택했고, 퀴어 축제의 장에서 그 선택은 훨씬 자유로우니까. 퀴어가 넓은 의미에서 사회에서 자연스레 설정된 다수의 관점과 논리에 저항하는 것들을 아우른다고 본다면, 평소 거리에서 마주치기 힘든 치장을 걸치는 것도 퀴어 담론에 포함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해해보았다.

올해 퀴어 축제 복장 중 가장 귀여운 복장이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feat. 지나가던 흔한 리락쿠마 덕후 1)

올해 퀴어 축제 복장 중 가장 귀여운 복장이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feat. 지나가던 흔한 리락쿠마 덕후 1)

 비슷한 선상에서 축제에 참여한 부스들 중에는 각종 섹스토이를 소개하는 곳들이 있었다. 사실 내가 주로 생활하는 동네에도 섹스토이를 파는 가게가 있는데, 거기 들어가는 게 무슨 범죄가 아닌데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호기심은 있었지만 이상하게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고, 가게의 모습과 위치도 너무 음침했다. 입구가 무슨 마피아 소굴로 통하는 듯 꾸며져 있다… 그러나 퀴어 축제에서는 발랄하고 깜찍한 섹스토이들이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전시되어 있었다. 주변 사람들 따위 의식하지도 않고 한참을 구경하다가, 문득 ‘섹스토이도 어쨌든 내 몸에 내가 사용하는 건데, 왜 퀴어 축제가 아닌 곳에서는 이것들을 구경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일이 되어야하는 걸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퀴어 축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런 시선을 뛰어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다다랐다. 입고 싶은 옷을 입고, 하고 싶은 화장을 하고, 육체적 쾌락을 느끼고 싶을 때 적절한 도구를 사용하는 게 누군가의 제약을 받아야하는 일이 아님을 전달하는 퀴어 축제의 분위기에서, 다시 한 번 퀴어 담론이 우주 스케일로 광활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찾아보니 이런 섹스토이 샵도 있더라. 헤헤 가봐야지. 출처 : 플레져랩 공식 사이트 (http://pleasurelab.net/)

찾아보니 이런 섹스토이 샵도 있더라. 헤헤 가봐야지. 출처 : 플레져랩 공식 사이트 (http://pleasurelab.net/)

“왜 우리는 광장에 모였을까?”

 올해 서울 퀴어 축제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시청 광장에서 열렸다. 광장 주변에는 혐오세력들과 퀴어 축제 참가자들 간의 마찰을 막기 위해 펜스가 쳐져있었고, 행사장 곳곳에서 인권 지킴이들이 인권 침해 활동이 벌어지고 있진 않는지 검사했다. 나는 올해 퀴어 축제 참가가 처음이었지만, 부스를 구경하고 광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매년 광장에서 퀴어 축제가 열리는 것일까? 퀴어 축제에 오는 사람들에게 광장은 어떤 의미일까? 이 질문을 조금 다르게 바꾸어보면, 퀴어 축제는 광장에서 열려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현재 퀴어 축제는 따로 입장료를 받지도 않고, 혐오세력과 같이 충돌이 예상되는 일부 집단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다. 그래서 매년 퀴어 문화 축제가 열리는 날은 누구나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퀴어 담론에 다가갈 수 있다. 이런 자유로운 교류가 가능한 것은 퀴어 축제가 ‘광장’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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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의 공간성은 시대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변화해왔다. 어느 순간엔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공간으로, 어느 땐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외침이 가득한 공간으로, 지도자들이 군중 앞에서 자신의 뜻을 밝히는 공간으로, 국가대표를 응원하는 공간으로, 시민의 힘으로 부패한 권력을 끌어내리는 공간으로 말이다. 이 외에도 광장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모습들의 공통점은 사람들이 사회에 의도하든 의도치 않았든 영향력 있는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광장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일이 조국 독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2002년 광장응원은 당시 한일 월드컵을 국가적 신드롬으로 만들었다. 특히 지난 가을 시작된 전국 광장에서의 촛불 시위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극적인 사건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오랜만에 보니까 뭔가 반가움. 겨울에 많이 추웠잖아요 다들. 출처 : MBC 8 뉴스 캡쳐

오랜만에 보니까 뭔가 반가움. 겨울에 많이 추웠잖아요 다들. 출처 : MBC 8시 뉴스 캡쳐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는 광장이라는 공간에서, 퀴어 담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 혹은 모여야만 하는 것은 이곳에 모인 이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단지 성적 지향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차별금지법에 성소수자가 포함되길 원하고, 상호 하의 합의된 건강하고 자유로운 사랑이 죄가 되지 않는 국가가 되길 원하며, 다양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합을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사회로 바뀌어가길 원한다. 또 가장 나다운 모습이 ‘비정상’으로 낙인찍히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그곳에 ‘있음’으로써 이러한 변화로 다가가는 데 강하게 동의한다는 걸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의 존재만으로 변화가 이어지고 있었음을 광장을 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렸다. 광장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쉽게 인식되지 못했던 이들이 모두를 위한 변화의 주역이었음을 증명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후회하진 않았습니다. 오늘은 퀴어 축제였으니까요!”

 빨간 구두 모먼트를 조오금 후회할 뻔한 순간을 꼽자면 퀴어 퍼레이드가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퀴어 문화축제의 화려한 피날레인 도심 퍼레이드는 원래 올해 최장 길이인 4km로 계획되어 있었다.(ㄷㄷ) 하지만 비가 와서 코스가 약간 줄어들었다고 했다. 어쨌든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에 높은 구두를 신고 퍼레이드 행렬을 따라가려니 지레 걱정이 앞섰지만, 이상하게도 퍼레이드 하는 동안은 발이 신기하게 아프지 않았다. 행렬을 이끄는 퀴어 축제 트럭에서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신나는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걸으면서 춤을 췄다. 마치 도심 전체가 거대한 노래방이 된 것 같았다! 여기 누가 나에게 탬버린을…! 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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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시작 직전 광장에 모이는 깃발들

 한 순간 지나가는 컷처럼 퀴어 퍼레이드가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축제가 끝난 것 같은 아쉬움에 부스로 돌아와서도 광장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퀴어가 뭔지 잘 알지 못하더라도 이 축제를 정말 잘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 광장 DJ님(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 감사합니다…수고가 대박적으로 많으셨어요…)의 선곡 센스가 굉장했다. 서울 퀴어 축제의 1등 공신을 고르자면 단연 축제 트랙리스트 짜신 분이라고 확신합니다. 진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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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가 마무리되어가고 있음이 느껴지면서, 오늘 축제동안 나를 스쳐갔던 몇몇 아쉬움도 떠올랐다. 간단히 정리하면 ① 생각보다 비가 많이 오지 않았다. 일기예보에서 때려 붓는다고 해서 내심 걱정하면서도 기대했는데 잠깐 많이 왔을 뿐 길게 오래 내리진 않았다. 대찬 장맛비와 함께하는 파멸의 퀴어 ★대환장★ 축제가 될 수 있었는데… 크흠. ② 혐오세력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작년에 왔던 분들 말로는 이분들 화력이 작년만 못하다고 했다. 우리 부스 바로 뒤에서 구국 집회 비슷한 걸 하고 계신 듯 했지만 중앙광장에서 울리는 락 뮤직 사운드에 다 묻혀버렸다. 퍼레이드 때도 다들 조용히 피켓 정도만 들고 계시는 정도였던 것 같다. 나도 막 부채춤이랑 전통 북 연주 보고 싶었다고… 비가 와서인지 아님 머리가 사라져서(?)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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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는 다른 사랑이 아니라 잘못된 욕망이라던 분들. 저 곳은 어느새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고 박근혜의 석방(!)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동성애는 다른 사랑이 아니라 잘못된 욕망이라던 분들. 저 곳은 어느새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고 박근혜의 석방(!)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③ 내년엔 좀 더 다양한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더 많은 부스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축제 갔다 와서 퀴어 개념에 좀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진짜 퀴어 개념 방대하다는 걸 또 새삼 깨달아서 쇼크였다. 마지막으로 다음번엔 빨간 구두랑 민트 마스카라 말고도, 좀 더 나를 열고 드러낼 수 있는 굉장히 굉장한 복장을 해봐야겠다. 으어, 벌써 설렌다.

우리 내년에 또 만나요!

우리 내년에 또 만나요!

글, 사진 및 편집 / 싱두

사진 / 수련

   [ + ]

1. 고딕 로리타(Gothic Lolita, 줄여서 고스로리)는 본래 다른 요소인 고딕풍과 로리타 패션의 요소를 묶은 일본의 패션 스타일 또는 그러한 하위 문화를 말한다.
2. 사실상 생각 없이 즐김 8할과 나름 진지한 고찰 2할의 불균등한 콜라보.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3.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약칭 행성인, Solidarity for LGBT Human Rights of Korea)는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단체다. 1997년 9월 9일 학생 성 소수자 인권 단체인 ‘가칭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 건설준비위원회’가 발족하고 1997년 11월 2일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으로 정식 출범했다.
4.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임, 여행자
5.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