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세대학교 자치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연희관 015B에도 실린 글입니다.

#1.

거대한 우주선들이 하늘에, 지구상의 모든 국가 위에 꼼짝 않고 떠 있었다. 그것들은 꼼짝 않고 떠 있었다. 거대하고, 묵직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지구인들이여, 주목하라.”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멋진 목소리였다. 용감한 남자도 울게 만들 정도로 소리의 일그러짐이 거의 없는 멋들어지고 완벽한 사방입체음향이었다.

“나는 은하계 초공간 개발 위원회의 프로스테트닉 보곤 옐츠다.” 그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모두들 분명 잘 알고 있겠지만, 은하계 변두리 지역 개발 계획에 따라 너희 항성계를 관통하는 초공간 고속도로를 건설하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너희 행성은 철거 예정 행성 목록에 들어 있다. 이 과정은 너희 지구 시간으로 이 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경청해줘서 고맙다.”

확성 장치가 잠잠해졌다. 이를 지켜보는 지구인들의 마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내려앉았다.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공포가. 하지만 아무 데도 도망갈 곳은 없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보고인들이 다시 확성 장치를 켜고 말했다.

“우리 말에 깜짝 놀라는 체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모든 계획 도면과 철거 명형은 알파 켄타우리 행성에 있는 지역 개발과에 너희 지구 시간으로 오십 년 동안 공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는 공식적으로 민원을 제기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이제 와서 야단법석을 떨기 시작해봐야 이미 너무 늦은 일이다.

#2.

“통장이 이걸 가져왔어요.”

내가 말했다. 어머니는 조각마루 끝에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게 뭐냐?”

철거 계고장예요.”

“기어코 왔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니까 집을 헐라는 거지? 우리가 꼭 받아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이제 나온 셈이구나!”

어머니는 식사를 중단했다.

#3.

승강구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소름끼치는 정적이 흘렀다.

소름끼치는 소음이 흘렀다.

소름끼치는 정적이 흘렀다.

보고 행성의 공병 함대는 별이 총총한 새까만 공간 속으로 미끄러져 갔다.

초공간고속도로와 슬픈 난장이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앞부분에 나오는 장면이다. 외계 우주선이 지구를 철거한다는 설정부터 충격적이지만, 더 놀라운 건 그 이유다. 우주 개발을 위해 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그 경로에 행성이 있으니까 지워버린다니! 소설의 재치는 한 번 더 발휘된다. 이전 장면에서 주인공의 집이 영국 정부의 ‘우회로’ 건설을 이유로 철거되는데, 이것이 지구의 운명과 너무도 닮아있는 것이다. 심지어 노란 포크레인과 노란 외계 우주선은 색깔마저 같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누군가의 터전이 위협받는 동안 그 ‘누군가’에게는 항의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소설 같은 일이 바로 여기 한국에서 벌어지는 동안, 우리는 애써 외면해왔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느 날 아침 동네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세입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포는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우주선 앞에 선 지구인처럼 무력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영희, 영수와 같은 ‘난장이’가 바로 그들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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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의 작중 배경, 낙원구 행복동, 출처 : KBS TV문학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모든 것의 시작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는 먼저 도시 경관을 우중충하게 만드는 판자촌이 없어져야 했다. 당시 청계천변의 판자촌 주민들이 가족 단위로 트럭에 실려 ‘이주당하는’ 광경은 흔한 것이었다.1)국가기록원 홈페이지, ‘판자촌’ 문서 70년대에 접어들어 재개발 열풍은 강남과 여의도를 금싸라기 땅으로 바꾸는 연금술을 선보였다. 정부, 서울시,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도시개발이 얼마나 큰 노다지인지를 알게 되었다. 서울의 돈이 강남으로 몰리는 동안, 땅을 미리 사놓은 권력자들은 부동산 열기를 이용해 이익을 챙겼다.2)정원오, 후마니타스, 2016, 『도시의 역설, 젠트리피케이션』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부동산 시장의 밝은 면만 부각시키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았다. 철거와 재건축은 동네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새 아파트에 들어가기에는 집을 허문 대가로 받은 이주보상금이 너무 적었다. 아니, 재개발은 애초부터 땅값을 올리기 위한 사업일 뿐이었으니, 자기 동네에 계속 살게 해달라는 그들의 소망은 애초부터 헛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에서 철거재개발 압력에 시달린 사람의 수가 당시 서울 인구의 10%인 72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이었다.3)테이크아웃드로잉, 2016, 『한남포럼』

그동안 한국 현대사에는 ‘초공간 고속도로’들이 수도 없이 뚫려왔다. ‘도시’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서울 올림픽, 청계천 개발 그리고 뉴타운은 모두 ‘공익’의 이름으로 난장이들의 희생을 강요한 사례다. 그리고 희생의 역사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핫한동네의 원주민들

D.W.깁슨의 책 <뜨는 동네의 딜레마, 젠트리피케이션>에 등장하는 브루클린의 한 미술 중개인은 이 동네에는 자기 성공의 희생양이 되는 사람이 많아요라고 말한다. 뉴욕 브루클린은 과거 슬럼가의 악명을 벗고 예술적이고 분위기 있는 거리로 탈바꿈한 곳이다. 뉴욕 시내 중심부임에도 열악한 환경으로 땅값이 낮게 유지되어 있었는데, 작업공간을 찾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동네를 아름답고 살기 좋게 꾸민 것이다. 그런데 입소문을 타고 관광객들이 몰리자, 개발업자들과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몰려온다. 그들은 낡은 건물을 사들여 리모델링이나 재건축을 한 뒤에 그 동네에 살고 싶어 하는 중상류층에게 되판다. 시간이 흐를수록 땅값은 점점 오른다. 결국, 처음 이 지역에 들어왔던 예술가들은 그 가격을 도저히 부담할 수 없게 된다.4)정원오, 후마니타스, 2016, 『도시의 역설,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에 오래 거주한 토박이 주민들 역시 젠트리피케이션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앞서 말한 어린 시절부터 뉴욕 브루클린에서 살았던 한 세입자는 자신이 경험한 지역의 변화에 관해 설명한다. “브루클린은 점점 괜찮아졌어요. 마약 하는 사람들도 줄었고요 … 저는 ‘마침내 사람들이 브루클린을 손보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대가로 원래 여기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쫓겨나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어요. 원래 여기에는 라틴계 미국인하고 흑인이 엄청 많이 살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떠나고 없어요. 지금은 백인들이 많아요. 브루클린은 우리를 위해 변한 게 아니었어요.”5)정원오, 같은 책

젠트리피케이션은 한 마디로 뜨는 동네의 비자발적 이주. 동네를 ‘핫’하게 만든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그런데 이런 특징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어느 도시에서 어떤 사업을 벌이건 간에, 원주민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지난 수십 년간 벌어진 도시개발의 공통점이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한편으로는 놀랍지 않은 이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경제학이 그 희생들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경제학이 강자의 편에 서는 이유

 

주류 경제학은 대부분의 개발 사업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한다. 지역주민과 세입자들이 겪는 문제와 비자발적 이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불가피한 희생’으로 명명된다. 시장논리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시장은 언제나 옳다.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이 모여 시장의 수요와 공급, 그리고 균형을 이룬다. 시장에서 내려진 결정은 모두가 함께 내린 것이기 때문에, 가장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판자촌의 재개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보통 지역 개발을 결정할 때 쓰는 방법이 비용편익분석이다. 우선 개발로 발생하는 비용과 편익을 계산해 보고, 비용보다 편익이 크면 실행하는 것이다.6)다음 국어사전 이렇게 보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엄연히 벌어지는 문제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우선 측정방식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검토해보자. ‘비용’과 ‘편익’은 각각 ‘원주민이 겪을 피해’와 ‘지역의 발전’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역을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익은 나머지 사람들이 가져갈 테니, ‘비용은 소수인 너희가 부담하라는 말이 아닌가? 문제는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피해를 보냐는 것이다. 다수와 소수,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것은 단순한 크기 비교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다.

누가 그 이익을 만들었는지도 중요하다. 앞서 젠트리피케이션의 사례에서 설명했듯이, 동네의 발전은 다름 아닌 (쫓겨나는) 원주민들이 만든 것이다. ‘핫플레이스’가 된 지역의 건물주는 세입자에게 임대료를 올리겠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땅값이 오른 것이 건물주의 힘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간의 변화 과정에서 계속 공간을 꾸려가고 발전시킨 실점유자, 이용해온 수많은 사용자, 그 주변 거리를 조성하는 데 함께 기여한 수많은 사람, 공공의 시설투자 등이 합쳐진 결과다.7)테이크아웃드로잉, 2016, 『한남포럼』 그러나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엉뚱한 놈이 가져간다’는 속담처럼, 그 결과물은 건물주와 부동산 중개인이 가져간다.

출처 : 노컷뉴스, “눈물의 짜장면”...광화문 중국집도 ‘갑’의 횡포

출처 : 노컷뉴스, “눈물의 짜장면”…광화문 중국집도 ‘갑’의 횡포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은 여전히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류의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한다. ‘주류’ 경제학을 비판해 온 스티글리츠와 장하준 같은 학자들은 그것이 시장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라고 주장해왔다. 시장의 구조 자체가 자본을 가진 쪽에 유리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장하준은 시장의 작동원리가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한다. 민주주의의 작동원리는 ‘11인 반면, 시장의 규칙은 ‘11원칙이다. 이 한 글자 차이로 우리의 지위는 너무나 달라진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고 시장에 개입하지 말자는 말은, 결국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더 많이 주자는 반민주적인 주장이다.”8)장하준, 부키, 2014,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주류 경제학의 주장이 결과적으로 강자의 편에 서게 되는 이유다.

시장에서 우리는 돈으로 권리를 산다. 돈이 있으면 편의점에 가서 라면과 삼각김밥을 살 수도, 개발될 동네의 땅을 미리 사놓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경쟁의 승패는 자본력의 차이에서 결정된다. 평범한 자영업자가 대형 프랜차이즈를, 세입자가 건물주를 이길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평등한 경쟁도, 자유로운 경쟁도 아닐 것이다.

도시가 모두를 위한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재주 부린 사람이 인정받는경제가 필요하다. ‘1원 1표’가 아닌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경제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협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적 경제’라는 실험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협동조합은 민주주의 원리인 ‘1인 1표’를 채택하고 있기에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세계의 도시들은 어떤 방법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작용을 해결해나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 서두의 작품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1, #3),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2)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편집자주 : <난장이, 히치하이커,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 – 모두가 행복한 도시를 찾아서 – (1)> 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편집/ 싱두

글/ transverso

   [ + ]

1.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판자촌’ 문서
2, 4. 정원오, 후마니타스, 2016, 『도시의 역설, 젠트리피케이션』
3, 7. 테이크아웃드로잉, 2016, 『한남포럼』
5. 정원오, 같은 책
6. 다음 국어사전
8. 장하준, 부키, 2014,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