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여러분. 저는 한강 이남 한구석의 모 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입니다. 대학원생이 된 지는 두 달하고도 보름이 갓 지났지요. 80 여 일 간의 소회를 얘기하자면, 장시간 한자리에 앉아있다 보니 몸무게는 줄었는데 배는 나오고요. 생리는 50일에 1번 하게 되었고, 3월에 잡았던 약속을 4월로, 다시 4월의 약속을 5월로 미뤘는데 다시 또 미루게 생겼어요. 수업을 위해 읽어야 하는 텍스트는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제출한 과제는 한없이 모자라고 하찮아 보입니다. 어느 날 오전 1시에 연구실을 나서며 생각했어요.

“아니 시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정말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사실 저는 운이 좋게도 우리나라에서 학벌의 정점에 있는 대학에 학부부터 합격했고, 재수도 안 했고, 학부 전공과 같은 전공으로 대학원 진학을 했으며, 다른 진로를 고민해 본 적도 많지 않고, 부모님이 저의 선택에 대해서 반대하신 적도 딱히 없어요. 즉 별다른 시행착오 없이 물 흐르듯 대학원에 오게 된 것이죠. 아이고 재수 없어라. 잘못된 시발점이 있다면 아마 아주 진작부터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저는 이제부터 어떤 고민을 어떻게 했길래 이 지경이 되었나 이야기해볼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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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생각해보면 대학원이라는 선택지를 1순위에 두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이불 팡팡 차고 싶은 대입 자소서에도 공부를 하겠다고 적었고요. 학부제여서 전공이 따로 없는 1학년 때에도 지리학과로 진입할 예정이며 지리학과 대학원에 갈 생각이라고 공공연히 얘기했어요. 인류학 전공 개론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 잠시 인류학에도 혹했지만 1학년이 끝나갈 즈음 별 이변 없이 지리학과에 전공 진입 했고요.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당시 새로 생긴 학과 내 학술 동아리에 가입하기도 했어요. 동아리 내에서 유이한(그때 같이 가입했던 동기 또한 대학원에 진학해서 지금 제 뒷자리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네요.) 선배들의 우쭈쭈를 받으며 2학년 막내로 활동했고, 수업에서 따로 다루지 않는 텍스트들을 읽고, 난생 처음 발제란 것도 해보았답니다. 이 때 저보다 몇 년 앞서가는 선배들을 만난 덕에 대학원 진학에 대해 대충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어요.

3학년이 되어서는 복수전공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거두절미하자면 저는 사회학을 택했습니다. 미술사학, 인류학, 심지어는 미대 등도 후보군에 있었지만 결국 같은 사회대라 이동 거리 적음, 다른 과 전공수업에서의 어려움, 그리고 다른 이유로 소거했어요.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사회학을 복수전공하게 되면 제가 대학원에서 전공하고 싶었던 정치지리학, 사회지리학 분야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지리학과 학부 수업에서는 제공하기 힘든, 혹은 다른 통찰력을 사회학 수업에서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거든요. 또 3학년 때에 제 관심사를 결정한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아시아 지역 연구 동아리를 직접 만든 일이었어요. 학내 연구소에서 일하던 친구에게 한 박사님이 동아리를 제안하면서 아시아 지역학에 관심이 있던 친구들과 함께 동아리를 만들게 되었어요. 이를 시작으로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동아리 활동 외에도 동아시아를 다루는 다른 전공 수업도 들으면서 배경지식을 쌓았어요.

대학원에 순탄 따위는 없다....

하지만 대학원에 순탄 따위는 없다….

이렇게 얘기를 풀어놓으니 별 어려움 없이 순탄히 흘러온 것 같군요. 그렇지만 항상 불안함도 따라 붙었답니다. 나는 학점이 왜 좋지 않을까? 이런 학점으로 공부를 한다고 해도 되는 걸까? 나중에 유학은 갈 수 있을까? 빨리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은데 대학원에 가면 돈은 어떻게 마련하지? 이런 생각들이 학교를 다닌 날이 다닐 날보다 많아지면서 저를 점점 더 괴롭혀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저는 4학년이 되는 걸 잠시 미루고 휴학을 하기로 했어요. 겨울 계절학기가 끝나자마자 저는 서울에서 짐을 몽땅 싸들고 내려와, 고향에서 과외를 하고 인근 대학에서 가끔 도강하는 것 빼고는 집에서 쉬면서 앞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시기에 어떤 외국 대학에 지리학과가 있는지, 그 대학에는 어떤 사람들이 제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전공하는지, 어떤 주제들이 연구되는지, 어떤 저널이 있는지, 그리고 유학 준비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보았어요. 영미권 대학의 지리학과에 있는 제 관심분야 전공 교수들과 그들의 연구주제를 싸그리 엑셀 파일에 정리하는 짓도 했답니다. 이 자료는 아직도 유용히 쓰고 있어요.

휴학 기간에 저렇게 건실한 너드처럼 집에만 박혀 있던 것은 아니고요. 과외해서 모은 돈으로 네팔로 혼자 여행을 떠났어요. 네팔 여행은 여러 모로 저에게 몹시 강렬한 경험이었습니다. 2015년 4월 27일 네팔에 규모 7.9의 지진이 발생했고, 저는 바로 그 현장에 있었어요. 지진 피해가 심했던 주요 관광지에 도저히 머물러 있을 수 없어서 저는 일정을 대폭 수정하고 한 한인 사장님의 소개로 시골 마을에서 며칠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재난 현장을 피해 머물렀던 시골 마을에서, 남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혹은 국외로 떠나 여자들이 집을 지키고 있으며, 이렇다 할 산업이 전무해 어떻게든 외국인과 어떻게든 연을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 우럭

사진 / 우럭

사진 / 우럭

사진 / 우럭

다시 도시로 돌아와서도 현지에서 사귄 친구를 통해 네팔 청년들의 구직 상황이나 이주노동에 대해 들을 수 있었고, 공항에서는 남녀가 줄을 따로 서는데 여자 줄은 거의 없었지만, 남자 줄은 무척 길고 그들의 대부분은 이주노동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저는 이런 것을 연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게다가 연구를 업으로 삼으면 저의 역마살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생각이 이쯤에 미치자 저는 일단 대학원에 진학해 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녀와서 제가 맘을 다잡고 공부를 열심히 했을까요? 역시나 그냥 팡팡 놀고 여행을 다니다가 복학을 해버렸답니다. ^ㅇ^ 그래도 휴학기간은 제가 쉬면서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분명 중요한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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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케이툰 연재 ‘즐거우리 우리네 인생’ / 작가 현이씨

복학하고서는 얌전히 수업을 마저 들으면서 졸업 준비를 했습니다. 논문을 작성하는 수업에서 나온 결과물로 학회에서 발표를 해보기도 했고요. 졸업 학기에는 학교 내 연구소에서 인턴을 했습니다. 같이 인턴을 하는 동료들은 모두 대학원 진학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를 진로로 삼는 것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었어요. 인턴을 하면서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점은 제가 배치된 센터의 선생님들께서는 제가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에서 깊은 경험과 학식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어서, 저에게 좋은 멘토가 되어주셨다는 것이었어요. 사실 학교에만 머물러 있으면 학과의 전임교원 외에는 연구자들을 만나기 쉽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경력의 연구자들을 만나고 일을 배우는 것은 공부 면에서든 진로 면에서든 배울 것이 많은 기회였어요. 이렇게 마지막 학기를 보내는 와중, 드디어 지리학과 석사과정에 입학 원서를 넣게 되었습니다.

막상 대학원 입시 자체는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학부 소속과 같은 과에서 대학원을 진학할 계획이었고, 경쟁률도 비교적 높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함께 연구소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던 다른 동학들과 비교하면 저의 대학원 입시는 일본의 에스컬레이터식 진학과 같았습니다. 익숙함 또는 정보의 양, 심지어는 배타성(!!) 때문이든 자교 자과생의 대학원 진학은 알게 모르게 수월하(다고 하)거든요. 선배들도 면접에서 욕을 하거나 뭘 집어던지는 짓만 하지 않으면 넌 붙을 것이라고 하고요.

저의 걱정은 합불 여부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그 학기에 입시를 한 다른 인턴 친구들 모두 치열한 생각과 노력이 그 간의 경험과 실천으로 나오는데 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거든요. 나만 안일한 것 같았고요. 다른 친구들은 대단히 대단하고 굉장히 굉장한 준비를 해온 것 같았어요. 나만 멋없어. 진짜 사람들 다 멋있고 나만 없어. 그리고 저는 여전히 어떤 연구를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다 구체적인 연구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고민은 그대로 안은 채 정신줄을 반쯤 놓은 상태로 달리다보니 어느새 합격과 입학이라는 포인트를 지나버렸네요.

이 화면을 두번 보게 되는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네요. 으아ㅏㅏ아ㅏ

이 화면을 두번 보게 되는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네요. 으아ㅏㅏ아ㅏ

잘못된 것은 없어요. 서두에 제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냐고 물었지만 말이에요. 대학원에 진학하고, 좀 더 거창하게는 공부를 업으로 삼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과거에 고민했던 제 자신과, 지식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침을 뱉는 일이 되는 것 같네요. 저는 제 전공이 좋아요. 아직도 연구주제를 찾는 것은 풀어야 할 과제이고, 당장 3일 뒤에 할 발표는 걱정이지만요. 대학원 생활도 좋아요. 저에게는 좋은 선배와 선생님들이 있고, 많진 않지만 장학금과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아요. 저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건 저와 비슷한 길에 들어선 다른 초학자 동료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이미 들어선 길, 나의 선택을 믿고 차근히 걸어가 보도록 해요.

교정 및 편집 / 저년이

글 / 우럭